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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1월 18일 09시 32분 KST | 업데이트됨 2021년 01월 18일 09시 33분 KST

인공지능 이루다 성희롱 논란은 정말 "성별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일까?

앞서 업체 측이 이루다 논란에 밝힌 입장 일부다.

스캐터랩
스캐터랩이 개발한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 서비스가 잠정중단됐다.

 

“그동안의 서비스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인간이 인공지능(AI)에게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인터랙션을 한다는 건 너무 자명한 사실이었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건 성별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공지능 전문 스타트업 스캐터랩이 내놓은 인공지능 ‘이루다’에 대한 논란이 일자 지난 8일 내놓은 첫 입장문 가운데 일부 내용이다. 이루다를 성희롱하는 이용자가 있다는 사실을 두고 여러 사람이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한 답이다. 스캐터랩의 입장문 가운데 강조 표시를 한 문구는 ‘성별과 무관’ 딱 하나였다. 이루다의 페르소나(타인에게 인지되는 성격)가 ‘여성’인 것과 관련이 없었나?

성별과 무관하지 않다. ‘이루다’뿐만이 아니다. 이 사회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성별과 무관하지 않다. 그걸 가늠하는 게 ‘성인지 감수성’이다. ‘성인지 감수성’은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난데없는 변화가 아니다. 성인지 감수성은 26년 전인 1995년 제4차 세계여성대회 선언문에 등장했다. 선언문 19조는 “여성의 역량 강화를 촉진하게 할 모든 수준에서의 정책·프로그램을 포함해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상호 강화적인 젠더 감수성 정책 및 프로그램을 설계·구축하고 관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라는 내용을 포함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성인지 감수성은 ‘일상 속에서 젠더에 따른 차별과 배제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그 배경과 구조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아 쓰이고 있다.

스캐터랩 누리집 갈무리
인공지능 ‘이루다’에 대한 논란이 일자 스캐터랩은 “성별과 무관한 일”이라고 강조했지만 과연 그럴까?


‘이루다’ 인공지능 서비스가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서비스인가를 따지기 전에 이 사회의 ‘성인지력(力)’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젠더에 기반을 둔 차별과 배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능력’ 말이다. 차별과 배제를 당하는 당사자는 ‘성인지력’이 발달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췄으나, 차별과 배제를 행하는 행위자는 ‘성인지력’ 없이도 살아가기 어렵지 않다. 이 불균형이 부정의를 가져온다.

여성비하 표현을 담은 국무총리실 홍보 만화, 임산부에게 집안일과 남편 돌봄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센터 게시글, 여성 출연자에겐 앞치마, 남성 출연자에겐 정장을 입혀 놓은 보건복지부 홍보 영상…. 성인지력 없이,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정부 홍보물들이다. 다행스럽게도 성인지력이 발달한 시민들이 이런 문제를 능동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걱정스러운 건 문제 제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하는 쪽이다.

지난달 15일 여성비하 표현을 담은 홍보 만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는지 취재하기 위해 국무총리실에 전화를 걸었다. 국무총리실 관계자는 “삭제만 하기로 했다. (항의해서 삭제한 것인가?) 삭제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 만화는 순수한 뜻으로 제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순수한 뜻’만 강조할 뿐 무엇이 여성비하 표현에 해당하는지, 그런 표현으로 인해 파생하는 문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스캐터랩이 내놓은 입장문 가운데 굵은 글씨로 ‘성별과 무관’이라는 강조 표시를 보고 단박에 “순수한 뜻으로”를 강조한 그때 그 통화가 떠올랐다.

부럽기조차 할 때가 있다. 성인지 감수성 없이 살아가도 별 문제 없는 삶이 말이다. 그런데도 성인지력의 발휘, 성인지 감수성 기르기는 포기할 수 없다. 순수한 놀이일 뿐이며, 별것 아닌 것이라 여기는 성차별적 콘텐츠가 형성한 이 사회의 ‘놀이 문화’가 인격을 처참하게 말살하는 문제들을 직면하면, 포기할 수 없다. 이루다 논란을 계기로 인공지능을 비롯한 정보기술(IT)의 젠더 편향성과 젠더 데이터 공백에 대한 논의 출발선에 섰다. 편향을 바로잡고, 공백을 채우는 게 정보기술 분야에만 한정될 일은 아니다. 먼저, 2021년엔 정부와 기관, 기업의 성차별 홍보물 관련 기사를 쓰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