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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성폭력 생존자들의 ‘보이지 않는’ 상처

정신건강 서비스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욜란다 하닝 정신건강 매니저(국경없는의사회 루스텐버그 프로젝트)
욜란다 하닝 정신건강 매니저(국경없는의사회 루스텐버그 프로젝트) ⓒMelanie Wenger/Cosmos
ⓒhuffpost

국경없는의사회가 남아공 ‘백금 벨트’(백금 채광 지역)에서 진행하는 성·젠더 폭력 프로젝트의 심리학자로 일하면서, 최근 나는 캔디스(가명)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접했다. 집단강간을 당한 캔디스는 지방병원을 찾아가 이를 알리면서, 너무 괴로워 자살까지 생각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의료 시설에서 사용하는 1차 설문지에는 반드시 자살 경향성 항목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설문 결과 의심 증상이 있는 환자는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 즉시 심리학자나 정신과의를 만나야 한다. 안타깝게도 캔디스는 그러지 못했다. 1차 평가도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캔디스는 환자와 부상자들 옆에서 철제 의자에 앉아 밤새 의료진을 기다려야 했고, 결국 민간 시설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받았다. 사실 이런 경우가 흔한데 캔디스처럼 민간 시설을 찾아갈 여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아공에서 성폭력 생존자가 받는 정신건강 지원 실태를 조사한 국경없는의사회의 새 보고서 (Untreated Violence)를 보면,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현지 시설들의 지원 현황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성폭력에 대한 의료적 대응이 전반적으로 열악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강간의 신체적 피해는 어느 정도 인지되는 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 불안, 자살 경향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피해는 간과될 때가 많다. 남아공 정부는 265개 시설을 지정해 성폭력 생존자에게 종합 지원을 하도록 했으나 설문조사 결과, 현재 이러한 시설 5곳 중 1곳은 정신건강 서비스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전체 시설의 45%는 아동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있으며, 자살 경향성을 평가하지 않는 곳도 거의 40%에 달했다.

성폭력 생존자가 정신건강 서비스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서는 안 된다. 적절한 지원이 있다면 강간이 끼치는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예방하거나 줄일 수 있다. 상황을 진척시키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은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 시설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시설 대다수는 도시 병원에 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기도 어렵다. 이에 국경없는의사회는 남아공 노스웨스트 주 보자날라 시의 1차 의료센터에 성•젠더 폭력 전담 진료소를 마련하는 일을 지원해 왔다. 기존 지역사회 의료센터 안에서 운영되는 이 진료소의 이름은 ‘크고모초 지원 센터’(Kgomotso Care Centres, KCCs)다. 크고모초는 세츠와나어로 ‘위로의 장소’를 의미한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지원하는 4곳의 공립 KCC는 2016년부터 지금까지 총 1821명의 성·젠더 폭력 생존자에게 정신건강 상담을 제공했다.

2018년 6월 루스테버그에서 열린 몸 지도 그리기(Body Mapping) 워크숍에서 성폭력 생존자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18년 6월 루스테버그에서 열린 몸 지도 그리기(Body Mapping) 워크숍에서 성폭력 생존자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Melanie Wenger/Cosmos

적절한 지원 방안을 수립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성폭력 생존자에게 어떤 심리적, 사회적 서비스가 필요한지에 관해 분명한 현지 지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루텐스버그의 국경없는의사회는 세계보건기구(WHO) 가이드라인을 많이 참고했다. KCC에 들어오는 모든 의뢰인은 최소한 전문 상담가에게 정신건강 평가를 받도록 했다. 또한 KCC 직원 모두는 성·젠더 폭력 사건에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응급 요원 훈련을 받았다. 수시로 의뢰인을 KCC로 데리고 오는 국경없는의사회 운전기사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경우, 의뢰인은 1주일 뒤에 KCC에서 추후 평가를 받고, 심각한 증상이 계속될 경우 심리학자나 정신과의를 만나게 된다. 한편, 생존자가 속한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사회복지사도 만난다. 이들은 생존자들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생존자들이 각종 위기에 잘 대처하도록 함께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또한 KCC는 정신건강 지원이 계속 이어지도록 지지그룹도 만들었다. 이 모임을 통해 생존자들은 하루하루 부딪히는 일상의 어려움을 동료들과 나누며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국경없는의사회는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2018년 설문조사 결과를 활용해, 성폭력이 초래하는 심리적 장애와 고통을 줄이려면 남아공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지정 시설 265곳에서 24시간 상담을 진행해야 하며, 성폭력이 끼친 심리적 피해를 반드시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정신건강 서비스를 어디서, 누가, 어떻게 제공하는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를 위해서는 비용 계산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여러 제안을 내놓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모든 해답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상황을 개선하는 데 있어서 작은 역할을 맡을 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심각하고 끈질긴 심리적 문제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직접 도울 수 없어서 심리학자, 정신과의의 도움을 받았다. 매일 24시간, 일주일 내내 KCC를 열어 두지도 못했다.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정신건강 지원을 개선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남아공 정부가 이렇게 복잡한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 일이 실패하면 사람들의 꿈이 무너지고, 가족이 깨지며, 사람들이 병을 얻고, 인간관계가 허물어져 결국 삶을 망칠 수도 있다.

글 · 욜란다 하닝, 정신건강 매니저 / 국경없는의사회 루스텐버그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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