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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가 되고 나서도 배우가 되고 싶었다

[마부작침②]

  • 안지환
  • 입력 2018.05.03 17:36
  • 수정 2018.05.03 17:39
ⓒhuffpost

입대

대한민국 평균 남성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군대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러 각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인사들이 “군대에서 인생의 교훈을 배웠다” 하고 말하는 걸 보면, “매우 훌륭한 분이 아니면 솔직하지 못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 말할 것도 없이 가기 싫었다. 타율이 지배하는 수컷들 의 공간에서 3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흔히 ‘군 대 3년’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2년 반 정도 된다. 나는 1989년 10월 25일부터 1992년 4월 23일까지 정확히 2년 6개 월에서 이틀 빠지는 기간을 복무했다. 1989년 9월 말 영장을 받아들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전역 뒤 다시 대학 연극영화과에 도전할 수 있 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3년 뒤 굳은 머리로 다시 입시 관문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시간이라면 그나마 효율적으로 보내고 싶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컴퓨터를 다룰 줄 알면 사단에 두 명 정도 있는 전산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20대 1이 넘는 경쟁을 통과해야 했다. 결국 몸으 로 때우기로 했다.

신병 의정부 306보충대에서 2박 3일간 기초훈련을 받았다. 첫날밤 몰래 울었다.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입대하기 전 부모님 속을 썩인 것이 후회됐다. 크게 빗나갔던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고 나가면 효도를 하겠
다는 결심도 했다. 나만 운 것이 아니었다. 훈련을 마칠 때 조 교가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 이름, 5초간 발사!” 하고 외 치자 모두가 “어머니이이!!!” 하며 울먹였다. 딱 한 명이 “아버지이이!!!”라고 외쳤는데, 그 정신없던 와중에도 특이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초훈련이 끝나갈 즈음 훈련병들 사이에서 “이번 기수 는 90% 이상 최전방으로 배치된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기왕 입대한 것, 어디에 배치된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는데도, 훈련병들은 귀를 쫑긋거렸다.

신병교육대로 이동할 때는 버스 창에 두꺼운 커튼을 쳐 경유지와 목적지를 알 수 없게 했다.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철원으로 가는 것 같다”라며 아는 체했다. 내려보니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9사단 백마부대였다.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야간에 멀리 도심의 조명이 보였다. 29연대 2대대 신병교육대에서 6주간의 교육을 마친 뒤 9사단 직할 통신대대에 배치됐다. 군사특기번호 320. 통신대 대는 4개 중대로 나뉜다. 본부중대와 무선운용중대, 유선운용 중대, 그리고 중계중대. 나는 무선운용중대에서 FM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일병 생활 중반쯤에 행정반 교육계로 전보됐다.

시스템

행정반에 가니 군대라는 시스템이 눈에 들어왔다. 흔히들 군 생활을 시간 낭비라고 하는데,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군대에서 조직의 작동 원리를 어깨너머로나마 깨우쳤다. 낱알 같은 개인을 효율적인 조직으로 묶기 위해 어떤 원칙과 절차가 필요한지 배웠다.

“내가 전역 후 돌아가게 될 ‘사회’라는 곳도 크게 보면 저렇게 움직이겠구나” 하고 짐작했다. 입대하기 전의 내가 아이였다면, 군 생활 중반을 넘기고 나서부터 나는 서서히 어른이 되어갔다.

군 생활은 평탄했다. 3년 동안 세 차례의 동계훈련과 두 차례의 유격훈련, 한 차례의 팀스피리트 훈련을 마쳤다. 구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낙오는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사격에는 소질이 있었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구보와 사격만 잘하면 군대생활은 그럭저럭 할 만하다.

전역

군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초병을 설 때 잡념에 빠지는 대신 초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세심히 관찰했다. 대대장의 어투와 몸짓이 이등병의 그것 과 어떻게 다른지 분석하다 보면 시간이 잘 갔다. 3군사관학 교 출신 중대장이 진급 경쟁에서 육사 출신에게 밀려 좌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배우라면 저런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시간이 남을 때는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소설을 읽었다. 어차피 군인들의 머리에 딱딱한 책은 들어오지 않는다. 무협지 『영웅문』 같은 걸 읽으며 활자를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변환시키는 연습을 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영웅들이 등장하는 소설도 읽었다.

전역이 가까워 오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큰 미련이 없었던 경영학과 강의실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배우가 되고 싶었다. 아니 ‘이전보다 더 간절히’ 배우가 되고 싶었다. 국방부 시계는 멈추는 법이 없어, 마침내 1992년 4월 23일 이 되었다. 나는 앞날이 불투명한 대학 휴학생이자 예비역 병장 신분으로 사회에 돌아왔다.

군 경험

가끔 입대를 앞둔 후배들이 조언을 구하곤 한다. “이제 막 뜰 만한데, 군대에 가야 한다. 선배님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대답은 간단하다. “다녀와라. 똑같더라.”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은 20대가 되면 누구나 군대에 가 야 한다. 징병제가 모병제로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0여 개월의 군생활 경험은 남자들의 삶에 획을 긋는다.

누군가는 군대에서 인생을 배웠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꿈속에서라도 다시 군대에 끌려갈까 몸서리가 쳐진다고 한다. 나는 각자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군생활이 못 견딜 만큼 지루하지도, 날마다 담을 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군대도 사람 사는 동네이고, 그런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군대에 있을 때 주중에는 아버지가, 주말에는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아버지는 가끔 들렀고, 어머니는 거의 매주 왔다. 부모가 면회를 오면, 훈련 중에라도 얼굴을 볼 수 있게 내보내준다. 자주 되풀이되다 보니 나중에는 고참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방송문화원

원래는 배우를 꿈꿨던 내가 성우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우연도 한몫했다. 제대할 때까지만 해도 성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없었다.

제대 후 염창동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뵈러 갔더니 식사하는 자리에서 성우 공채에 응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셨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점잖아 보인다는 것이 었다. 마침 MBC에서 성우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본 것 같다고 하셨다. 1992년 가을 MBC 성우 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합격한 줄 알았다.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축하받았다. 그런데 아니었 다. 알고 보니 MBC가 아니라 MBC 자회사인 방송문화원의 성우과정 1기에 합격한 것이었다. 그때 MBC는 7년째 성우를 뽑지 않고 있었으니 애초부터 성우가 되려야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처럼 정보가 흔한 세상이 아니었다. 요즘은 스마트폰 검색 한번이면 온갖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때는 아직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MBC 방송문화원은 1991년 MBC가 방송실무 인력 양성 을 위해 자회사로 문을 연 인력양성기관이었다. 교수와 강사진이 직접 방송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인력 위주로 꾸며졌기 때문에 개원 초부터 인기가 높았다. 내가 들어가던 해 경쟁률 이 250대 1쯤 됐다. 처음에는 분장, 조명, 오디오, 아나운서 준 비반만 뽑다가 내가 들어가던 해 성우반 1기를 선발했다. 현 대방송 개국 등으로 인해 전문방송 인력 수요가 늘던 때였다. 방송문화원에서 이론과 실기 교육을 받은 원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공채시험을 거쳐 방송사에 입사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MBC에 합격했다고 이미 소문을 낸 터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학 복학에 쓰려고 준비해 뒀던 등록금을 학원비로 냈다. 당시 돈으로 137만 원,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돈이 아까 워서라도 대학 입시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6개월 뒤인 1993년 3월 MBC에서 성우 공채를 재개했다. 8년 만이었다. 그때 내 수험번호가 1번이었다. 열심히 준비했으니 되겠거니 하면서도 일말의 불안이 없지 않았다. 가슴을 졸이며 합격자 명단을 위에서부터 못 보고 아래에서부터 실눈을 뜨고 훑어 올라갔다. 맨 꼭대기에 이름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꿈꿨던 배우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스물다섯 살에 방송계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가지 못한 길

방송문화원에 다니는 동안, 그리고 전속성우가 되고 난 후에도 배우가 되기 위해 탤런트 공채시험에 네 차례 도전했다. 그런데 매번 1차 전형에서 떨어졌다. 이유를 나중에 알았다. 너무 조잡하고 성의 없어 보이는 사진을 제출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원서에 붙인 사진은 조카가 집에서 가정용 카메라로 촬영해준 것이었다. 분장도 안 하고, 조명도 비추지 않았으니 천하의 장동건이나 정우성이라 하더라도 후줄근해 보였을 것이다. 오해는 마시라. 내가 그들처럼 잘생겼다는 소리는 아니다.

어쨌든 잔뜩 꾸민 뒤 스튜디오에 가서 공들여 찍은 사진을 제출해도 모자랄 판에 후줄근해 보이는 사진을 냈으니, 매번 떨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사진이 아직 내 스마트폰에 있다. 가끔 그걸 들여다보며 웃는다.

쥐약

방송문화원에 다니면서 저녁에 서울 상도동 장승배기역 근처 생맥줏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모가 운영하던 ‘두리두리치킨’이라는 전기구이 통닭집이었다. 기름에 손을 데어가며 닭을 튀기고 골뱅이를 무쳤다. 은행도 구웠다. 은행은 만지고 나면 늘 손이 끈적거렸다. 손님들은 항상 양이 적다고 불평했는데, 막상 떠나고 난 뒤 접시를 보면 반 이상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치우는 것도 골칫거리였다.

당시 어머니는 미용실 문을 닫고 단칸 월세방에 살고 있었다. 거기에 묵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이종사촌의 옥탑방에 얹혀살았다. 치킨집 다락방에는 어른 팔뚝만 한 쥐들이 밤낮으로 들락거렸다. 그놈들을 잡으려고 쥐약을 설치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그 쥐약을 넣고 다녔다. 배우가 못 되면 죽겠다고 결심했다.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 정도로 절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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