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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경성에는 일본이 필요 없다

21세기 서울에서 유행하는 ‘경성’에 일본 문화가 설 자리는 없다.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 '모던보이'의 한 장면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 "모던보이"의 한 장면 ⓒKnJ엔터테인먼트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부쩍 자주 마주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경성’이다. 경성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수도의 도성’이란 의미로 사용하던 단어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 시대의 여러 문헌에도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경성은 심리적으로 일제강점기를 상기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경술국치가 일어난 이후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 칙령에 의해 한성이라 부르던 조선의 도읍을 경성으로 개칭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태생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경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로 일본을 거쳐 변형된 형태로 들어오던 서양 문물은 도시를 바꾸고,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고전 할리우드 흑백 영화에 나올 듯한 옷차림으로 꼼꼼히 단도리하고 신문물에 호의적이던 모던 보이, 모던 걸이 ‘멋쟁이’로 인식되면서, 경성은 당대의 유행을 선도하는 물리적 장소이자 멋쟁이의 심리적 안식처로 부상했다.

실제 근래의 드라마나 영화 속 경성을 보면 그 시기의 낭만이 만든 한국 근대 도시 문화의 매력적인 일면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즉, 일제강점기라는 상황 아래 경성을 보는 관점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으며, 긍정 혹은 부정이란 이분법적 시선으로 가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경성이란 단어의 범람 속에서 이미 고루해진 용어인 일본색, 즉 왜색이라는 낡고 민족 편향적인 단어를 다시금 끄집어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는 경험은 꽤나 우려스럽다.

얼마 전 요즘 핫플레이스인 익선동에서 파운드케이크를 파는 ‘경성OOO’이란 이름의 가게를 들렸을 때 온몸이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앤티크한 느낌으로 차분히 꾸민 가게는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소위 인스타그램 성지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는데 그중 내 눈길을 끈 것은 다름 아닌 케이크 세트였다. 여섯 종류의 케이크를 어여쁜 종이로 포장해 사이즈에 꼭 맞는 박스에 넣은 모습이 선물용으로 무척이나 괜찮아 보였다. 그 ‘어여쁜’ 종이의 문양에 대해 자세히 인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경성OOO'의 케이크 세트 패키지
'경성OOO'의 케이크 세트 패키지 ⓒHarry Jun

알록달록한 포장지의 실체를 접하자 머리는 차가워지고 가슴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꽃, 부채 같은 사물과 기하학적 요소를 비비드한 색채로 패턴화한 포장지는 말 그대로 어떤 상품의 ‘껍데기’였다.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관광 상품 말이다. 일본 문화의 정수라는 교토의 수공예 종이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인터넷에서 마음먹고 찾으면 금세 나올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이 디자인이 일본 것임을 어떻게 명백하게 확신할 것인가. 필자는 패키지를 모두 디지털 이미지로 저장한 후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1시간 정도를 투자했을 뿐인데 패키지 원본의 대부분을 스톡(stock) 이미지 사이트에서 찾아냈다. 스톡 이미지에 달린 검색용 키워드에 계속 등장하는 공통 단어는 바로 'Japanese'였다.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짚고 넘어간다. 지금 이 글은 가게에서 파는 상품의 포장지가 손수 그리거나, 전문 디자이너에게 맡긴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지의 질이 아니라 이미지의 종류다. 모든 이미지는 Japanese란 키워드로 쉽게 찾을 수 있다. 즉, 왜색을 넘어 일본의 정체성을 활용한 것이나 진배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겠다. 지금 세상에 일식집이 얼마나 많으며, 이자카야는 또 얼마나 한국의 밤을 지배하고 있던가. 일본어를 금지한 세상도, 일본 풍을 검열하는 시대도 아닌데 무슨 케케묵은 ‘왜색’ 타령이냐고 말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1998년 일본 대중 문화 개방 정책으로 이제 일본 문화는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심리적으로 호오를 탓할 순 있겠지만 일본의 수많은 상품은 한국에 유통된다. 당장 아무 편의점이나 가보자. 일본에서 수입한 과자, 음료수, 맥주 하나 없는 곳이 없다.

문제는 상황과 맥락이다. 경성OOO에서 쓰인 '경성'은 1910년 9월 30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35년간 서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던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는 게 명약관화하다. 그 시절이 내포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상점의 주된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는 데 이의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파운드케이크를 포장한 어여쁜 종이가 왜 일본 문화에 뿌리를 둔 시각 요소로 점철된 것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경성의 이미지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활보하던 신문물의 멋진 신세계가 아니던가? 언제부터 현대가 바라보는 경성의 쿨한 이미지가 일본 미의식의 산물인 왜색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나.

그리고 파운드케이크의 본고장을 따지자면 영국까지 올라간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을 비롯해 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조형 사조는 아르누보와 아르데코였다. 당시 경성은 세계의 유행을 동시대적으로 빠르게 습득하고 있던 상태였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들락거릴 경성의 케이크 가게 포장지로 동시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 아르데코 스타일과 일본 전통 문양 중 어떤 것이 더 어울렸을까? 답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아르누보 양식을 활용한 현대 패키지 디자인의 사례
아르누보 양식을 활용한 현대 패키지 디자인의 사례 ⓒNorman’s Printery

경성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시기에 서울이 일제 치하였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경성이 곧 일본은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색다른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단체 관광을 오던 조선의 최대 도시, 경성은 조선의 유산과 신문물의 융합으로 서서히 근대화되던 일본의 물리적 식민지였지, 일본의 문화적 식민지는 결코 아니었다는 말이다. 21세기 서울의 작은 파운드케이크 가게가 패키지 이미지를 선택한 관점이 일본 식민 지배에 대한 역린을 건드린다 여기면 침소봉대일까.

내년은 2019년이다. 미래의 전형이라 생각하던 2020년이 1년 남은 때이자, 동시에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사람이 의연히 일어나 비폭력으로 항거하던 3.1 운동이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경성과 일본을 동일시하는 관점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면,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 힘써왔던 지난 수 십 년의 세월이 너무도 허망하지 않을까. 과한 추측, 망상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작은 불씨가 조금씩 번져 숲을 모두 태워버리기 전에 고민과 성찰,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harry.jun@outl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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