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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없어도 괜찮아

1988년의 덕선이는 고3을 앞두고 꿈이 무엇인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적성이 아닌 성적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던 나는 그냥 평범하게 회사 다니기엔 아까운 내 청춘에 대한 억울함과 걱정 없이 여행 다니고 싶다는 막연함으로 승무원을 해야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대학 4년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든 첫 면접은 떨어졌고 다음 해에 원하던 항공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꽤나 오래 했다. 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대학 4년을 다닐 때도 한 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그 일을.

  • 신혜은
  • 입력 2016.01.27 10:52
  • 수정 2017.01.27 14:12

2016년 1월 16일. <응답하라 1998>의 마지막 회가 방송되었다. 이로써 그 시절 한 세대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물론 그들의 삶은 2016년에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고3으로 올라가던 딸 덕선이와 아빠 성동일이 꿈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다.

"꿈이 뭐데? 어떤 사람이 젤로 되고 잡어?"

"난 꿈이 없어, 아빠. 한심하지? 나 진짜 멍청한가 봐."

"그 꿈은 시방 가지면 되지.... 아부지도 니 나이 때 아무 생각 없이 살았어. 덕선아, 다 그래. 너만 그런 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먹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지."

고등학생. 한참 진로에 대한 고민도 많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은 대학입시였다.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여유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바둑에 소질이 있었던 택이를 제외하고 공부 잘하는 선우는 엄마 소원대로 의대에 갔고, 정환이는 형이 못다 이룬 파일럿이라는 꿈을 위해 공군사관학교로, 공부보다 춤이 좋았던 동룡이는 고깃집 사장님이 되었다. 그리고 꿈이 뭔지 몰랐던 덕선이는 그 다음 해 대학에 들어가 어엿한 승무원이 되었다.

얼마 전 고등학교 여학생들을 만났다. 서울 모처의 여자고등학교 독서부 학생들이었다. 되고 싶은 직업에 대한 책을 읽고 방학 기간을 이용해 저자를 만나 인터뷰를 하는 활동을 한다고 했다. 이 학생들은 졸업 이후의 삶, 어른들의 사회생활이 궁금했겠지만 나는 그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궁금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아이들의 생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왜 승무원이 되고 싶은데?"

승무원이 되고 싶어서 나를 만나고 싶었다는 학생들에게 되물었다.

"그냥요. 여행도 하고 싶고......."

대답이 없는 학생 몇은 그냥 수줍게 웃기만 했다. 여고생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민망함이 밴 수줍은 웃음.

"음, 승무원을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1988년의 덕선이는 고3을 앞두고 꿈이 무엇인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적성이 아닌 성적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던 나는 그냥 평범하게 회사 다니기엔 아까운 내 청춘에 대한 억울함과 걱정 없이 여행 다니고 싶다는 막연함으로 승무원을 해야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대학 4년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든 첫 면접은 떨어졌고 다음 해에 원하던 항공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꽤나 오래 했다. 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대학 4년을 다닐 때도 한 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그 일을.

1990년 중반, 돌돌이(승무원들의 기내 가방을 일컫는 승무원들의 속어)를 끌고 기름칠을 한 듯 스프레이로 쫙 올린 쪽진 머리를 한 승무원들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승무원이 되고 난 이후에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승무원이 여학생에게 선망의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 비행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여학생들이 승무원이 되기 위해 학원을 찾는다. 그동안 서울에 한두 개밖에 없었던 승무원 학원은 시내 곳곳에 우후죽순 생겨났고, 심지어 승무원학과를 가기 위해 고등학교 학생들이 승무원 학원에서 입시공부를 하고 있다. 이날 마침 나를 만나러 왔던 여학생 중 고3에 올라가는 두 학생이 승무원학원에서 대학입시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매해 어려워지는 대학입시와 그보다 더 힘든 취업에 발목이 잡힌 아이들은 먼 미래를 보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수능시험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나에게 더 먼 미래를 내다보라 한들 들리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들지만, 21세기의 한복판, 우주여행의 상용화를 논하고 있는 지금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안타까웠다. 5년 뒤, 10년 뒤의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가장 궁금한 사람이 이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도 그랬다. (물론 이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모든 고등학생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가장 평범한 고등학생이기는 하다.)

요즘 고등학교 교과서를 집필 중이다. 여행 지리라는 교과목으로 새로 개정되는 교육과정에 신설되는 진로선택과목 중 하나다. 여고생들을 만난 이유에는 피교육자로서 교과서에 대한 아이들의 생생한 의견을 듣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교과목이 그들의 진로선택에 도움이 되려면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지 궁금했다. 그러나 막상 학생들을 직접 만나보니 이 교과목이 과연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겼다. 학교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네가 어떤 걸 하고 싶든지 간에 지금 시험 점수를 하나라도 더 잘 받아야 할 수 있는 거야.' 틀린 말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고 대학에서는 취직되느냐가 중요하니까.

1988년 덕선이가 다녔던 고등학교와 1998년에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그리고 2016년의 고등학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삐삐 대신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는 것만 제외하면 꿈이 아닌 점수를 강요하는 교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밤이 늦도록 하얗게 붉을 밝힌다. 아이러니하게도 30년이란 세월을 학교만 비껴간 듯한 느낌이다. 그 속의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나이 든 사람이 하는 뻔한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거다. 2016년 현재 쌍문동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은 정봉이 형이다. 7수 만에 법대에 입학한 정봉이는 고시를 포기한 대신 라면을 잘 끓였던 특기를 살려 집밥 봉선생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비행을 그만둔 지금, 고등학생 때보다는 세상 경험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꿈을 찾아 헤매는 것은 여전하다. 인생은 조금 더 살았다고 더 잘 알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지금 어디에 있던 끝이란 생각은 말자. 2016년은 우리에게 응답해 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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