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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이고, 아시아계이면서, 게이인 이 드랙퀸은 '소수자 인권을 말할 때 돌아가는 길은 없다'고 말한다

  • 박수진
  • 입력 2017.03.17 10:06
  • 수정 2017.03.17 10:42

1. 이달 초 '자유주의자들이 원하는 미래'라는 제목으로 화제가 된 사진이 있다. 니캅을 쓴 무슬림 여성과 드랙퀸이 뉴욕 지하철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은 한 시민의 사진을, 극우 성향 뉴스를 전하는 트위터 계정이 퍼오면서 붙인 제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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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 계정의 의도와 다르게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미래'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왔고, 사진에 등장한 드랙퀸 길다 와빗은 AJ+와의 인터뷰에서 "그 사진을 부정적으로 본 사람들은 그냥 드랙퀸을 별로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라며 "우리에게 다가와 만나 친구가 돼야 한다"는 유쾌한 소감을 전했다.

2. 처음 미국 TV나 뉴스를 보면서 의아했던 것은 인종 차별을 말하는 자리에서 아프리카계 흑인, 히스패닉과 달리 아시아인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할리우드의 '화이트워싱'에 아시아계 영화인들도 목소리를 내는 등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3.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연구하는 엘더의 2015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 게이 남성의 90%가 '키가 크고, 젊으며, 근육질에, 남성적인 백인'을 사귀기를 원한다. 미국과 영국의 아시아계 게이 남성들은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자신들에게 덧씌워진 '여성적인 이미지'가 종종 '이국적'으로 받아들여지고,페티쉬의 대상으로 소비된다고 증언한다. 미디어에서 아시아 여성에게 전형적으로 대입하는 고정 관념과 같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28살, 카일 케이시 츄는 그런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이다. 평일에는 사회복지사로, 그리고 여가 시간에는 종종 드랙퀸으로 활동하는 카일은 지난 1월 지역 공공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드랙퀸 동화책 읽기 시간(Drag Queen Story Hour)'에 스토리 텔러로 참여했다. 몇 시간 동안 공을 들인 완벽한 드랙퀸의 모습으로 도서관에 간 '판다'는 5살이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만나 책을 읽어준 일로 현지 매체에 소개됐다. 그리고 중국계 미국인이면서 게이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알릴 기회를 얻었다.

미국에서도 가장 진보적이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 적다고 알려진 도시에 살면서도 그는 1) 어린 시절 자신이 롤모델로 삼을 만한 아시아계 게이, 혹은 아시아계 남성 자체가 미디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2) 중학교 때 커밍아웃 했다가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고, 3) 성인이 돼 간 게이 클럽에서는 "No Asian"이라는 거절을 면전에서 들었다. 장애를 가진 쌍둥이 형제 덕분에 소수자일 수록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마음껏 표현하기 위해 드랙퀸으로 활동하며 위의 경험들을 극복할 힘을 얻었다는 카일의 이야기를 좀더 들어봤다.

카일 츄는 중국계 미국인 4세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나고 자랐다.

- 드랙퀸으로서 스스로를 소개해달라.

= 이름은 '판다 둘세(Panda Dulce)'로, 판다와 멕시코 간식인 판 덜세이의 합성어다. 나 스스로를 '아시아 곰'이라고 생각하고, 또 탄수화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했다. 고스(goth) 문화와 테일러 스위프트를 남몰래 좋아하는 캐릭터다. 한때 유색 인종 퀴어들로만 구성된 하드코어 펑크 밴드 활동도 하다 해체했다.

-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나고 자랐다. 하비 밀크 등 미국 초기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상징 같은 도시로 타지역 성소수자들도 이주해오는 곳이다.

= 가족이 베이 지역에서 3대째 살아왔다. 뉴욕 시 인근에서 대학을, 뉴욕 시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이곳을 떠나 살 수 없었다.

나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정말 많은 유색 인종 퀴어, 트랜스 예술가와 활동가들을 접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케이스다. 특히 맹렬할 정도로 적대적인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가 스스럼 없이 공개적으로 판 치는 트럼프 시대에, 경계를 넘는 사회 정의를 위해 자신의 생을 바쳐 일하는 사람들 가까이에 늘 있어왔다는 건 정말 운이 좋은 일이다.

- 스스로 게이라는 걸 처음 안 건 언제였나?

= 처음 티가 난 건 아주 어렸을 때였다. 어릴 때 제레미라는 한 남자애를 쫓아다니고, 놀이터에서 껴안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와는 잘 되지 않았다.

확실하게 안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시트콤 '프렌즈'를 즐겨 봤는데, 나는 늘 맷 르블랑이 연기하는 '조이' 캐릭터에게 애정이 있었다. 따뜻하고, 강렬하면서 한편으로 헷갈리는 복잡한 감정을 갖고 조이를 봤고, 나는 그런 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나는... "당신처럼 되고 싶다?"'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그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다?"' 그것 역시 아니었다. 그리고 TV에는 조이가 여자와 키스하는 장면이 나왔고, 나는 조이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게 됐다.

그걸 알게 된 순간, 나는 앉은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방에 들어와 물었다. "왜 그러니?"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나 게이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 엄마는 웃으며 "넌 9살이야, 그걸 알기엔 너무 어려"라고 답했지만 곧바로 만약을 대비해 '부모 역할의 기본'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집 어딘가에서 찾아내 '동성애' 챕터를 찾아봤다. 성소수자들을 모호하고, 광범위하고, 같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설명하는 짤막한 문장들로 구성된 3문단이 전부였다. 나의 불안은 전혀 덜어지지 않았다.

- 커밍아웃도 어린 나이에 했겠다.

= 7학년 때까지 숨겼지만, 그때부터는 더 숨길 수 없었다. 10대 초반은 또래 남자애들이 한 친구 집에 모여서 포르노를 어떻게 하면 부모 몰래 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나이다. 다같이 하루 자고 온다며 한 친구의 집에 모인 후 다른 아이들과 억지로 포르노를 볼 때의 긴장감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더이상 이성에게 관심 있는 척 연기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방에서 탈출해야했다!

- 커밍아웃을 하고, 드랙퀸 활동을 하는 등 자신의 여러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로 마음먹은 계기로 자폐 장애를 가진 쌍둥이 형제 이야기를 했다. 장애인 형제와 함께 자란 것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이다.

=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날부터, 나는 자폐가 있는 쌍둥이 형제인 '케빈'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케빈은 당시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 최초의 장애-비장애 학생 통합교육 대상자였다. 그래서 선생님들과 반 아이들, 학부모들이 내게 정말 많은 걸 물었다. 아이들은 때로 "왜 케빈은 항상 손으로 귀를 가리고 있어?"라고 물었다.(그건 케빈이 소리에 민감해서 그런 것이다.) 또 "케빈은 왜 손을 떨어?"라고도 물었다.(한 가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놀이터, 교실 어디에서나 이런 질문들이 쏟아졌고 나는 그때마다 설명했다.

대부분은 케빈을 존중하고 잘해주려고 묻는 질문이었지만 일부는 정말 나쁜 자식들이었다. 케빈을 비웃고, 케빈에게 소리치고, 케빈의 물건들을 바닥에 집어던지던 아이들이 있었다. 또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는데,) '코너'라는 아이의 엄마는 다른 학부모와 교사들이 있는 곳에서 케빈이 한 교실에 있는 것이 '다른 학생들을 더디게 만들 것'이며 자신의 아들 역시 그 피해를 입을 거라고 주장했다. 수업 중 케빈의 옆에는 케빈만을 전담하기 위해 교실에 상주하는 사회복지사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중학교에서 커밍아웃을 하자, 이번에는 내가 초등학교 때 케빈이 당했던 것과 비슷한 말과 행동들로 괴롭힘을 당했다. 통합교육을 하던 학교에서 케빈이 유일하게 겉으로 드러난 장애인이었던 것처럼, 나는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유일하게 겉으로 드러난 성소수자였다. 고등학교에 가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집으로 익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전화를 받으면 익명의 상대는 내가 만약 다음날 다시 학교에서 눈에 띄면 신체적 폭력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반격의 행동을 취했고, 결과적으로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이때의 어두운 날들을 헤쳐나가게 도와준 게 사회복지사들이다. 케빈과 나의 인생에서 항상 도움을 준 사회복지사들 덕분에 나는 그 일을 내 직업으로 선택하기도 했다.

- 드랙퀸을 하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건 언젠가?

= 그것 역시 일찍 알았다. 어릴 때 엄마 치마를 입고, 립스틱을 바르고, 구두를 신고, 뮤지컬 '에비타'의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부르곤 했다. 엄마는 즐거워했고, 아빠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마지막의 극적인 죽음이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왜 에비타, 왜 마돈나였냐고?

한번 보라. 미국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아시아계 남자들은 판에 박은듯 안됐고, 절박한 처지의 '실패자'로 묘사된다. 나는 자라면서 내가 본받을 만한, 나와 닮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그다지 보지 못했다. 어설픈 다문화의 시대였던 90년대에는 이국적인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가 유행이었고, 나는 (에비타 이후에) 아시아 여성들에게서 롤모델을 찾게 됐다.

그래서 찾은 인생 최초의 롤모델이 피겨스케이트 선수 크리스티 야마구치였다. 성공을 거두고, 내 눈에 띄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아시아계 미국인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야마구치가 입은 세퀸 레오타드는 정말 내 넋을 쏙 빼놨다. 그게 처음 드랙퀸이 되고 싶었던 것 비슷한 것이었겠지, 아마?

'드랙퀸 동화책 읽기 시간'을 기획한 도서관 사서들, 그리고 그 자리에 나온 가족들은 아이가 드랙퀸들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매혹되는지 말한다. (영상 링크)

- 미취학 아이들에게 드랙퀸을 만나는 기회를 준다는 도서관 측의 아이디어가 참 멋지다.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으로 고른 '마이 프린세스 보이'도 젠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드는 이야기다.

=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언젠가 내가 일하던 학교에서 LGBTQ 독서 수업을 도입했다. 성소수자들의 다양한 스펙트럼, 젠더 유동성 등을 소재로 한 어린이책을 이용하는 수업이었다. 그때 쓴 책들 중 하나가 '마이 프린세스 보이'다. 남성의 성 정체성으로 태어나, 일반적인 '남자 아이들 옷'보다 치마 입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마이 프린세스 보이'는 이 아이에게 어떤 딱지도 붙이지 않는다. 소년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기보다는 완전히 모호하게 남겨두고, 독자들에게도 그 소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이 책을 반 아이들에게 읽어줬을 때 여러 반응이 나왔다. 일부는(대부분 여자 아이들이었는데,) 자신이 '프린세스 보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나에게 열렬하게 표현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외 다수의 아이들은 주인공을 비웃거나, 욕하거나, 비하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가진 시각이나 태도의 대부분은 자신들 부모로부터 배운 것들이다. 나는 '프린세스 보이' 이야기가 겨우 2학년생들에게조차 그렇게 엇갈리는 반응을 불러온다면,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더 일찍 공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앞서 한번의 경험이 있었지만) '드랙퀸 동화 읽기 시간'은 내게 정말 감동적이고 마술적인 경험이었다. 우선 자신의 아이들에게 공감과 다양성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많은 가족들을 눈앞에서 보는 것이 황홀했다. 트럼프가 당선된 어두운 시대를 헤쳐나가는 데 큰 희망을 준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했던 경험은 한 아이와 나눈 짧은 대화였다. 긴 머리에,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파란 아이섀도우를 한 아이가 나에게 다가와서 자랑스럽게 물은 것이다. "내가 남자인 거 알았어요?"라고.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무장해제됐고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곤 "그래서 네 기분이 좋다면!" 뿐이었다. 이후 이 아이의 엄마가 나에게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보내, 그 아이가 '드랙퀸 동화 읽기 시간' 이후 학교에서의 여성적인 자신의 모습에 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해줬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누군가에게, 특히 어린 누군가에게 이렇게 인생의 중요한 경험의 일부가 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느꼈다. 나는 해방감마저 느꼈다.

#arianagrande vs #mariahcarey #ricerockettes #drag #gay #asian #gaysian #drag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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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은 아시아계 드랙들로만 구성된 그룹 Rice Rockettes 멤버로, 한 달에 한 번씩 카스트로(Castro)의 Lookout 바에서 공연한다.

- 미국에 사는 아시아계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성적'이고 '연약'하며 그래서 열등하다는 것이다.

= 미국에서는 법적으로도 동양인 차별의 역사가 있다. 차이나타운에 불을 지르거나, 혐오 살인을 저지른 경우들뿐 아니라 특정 인종에 대한 관공서 및 기업체 일자리 취업 제외 등이 캘리포니아 주에서 명문화된 적 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여러 주에서 아시아계 미국인과 다른 인종의 결혼을 불법화한 적도 있다.

세탁소나 식당 같이 가사 노동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아시아계가 많게 된 배경에는 그런 차별의 역사가 있다. 아시아 남성들이 '여성적'이라는 고정관념이 뿌리박힌 주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은 흑백 구도로만 인종 이야기를 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서 위에 열거한 아시안이 겪는 차별은 거의 인지조차 않는다. 시민권, 사회적 정의, 억압에 관한 논의에서 아예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인권 운동이 미국 내 시민권 상승에 큰 역할을 했는데도 말이다.

이런 패턴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하다. 미디어는 여전히 아시아 남자를 주연, 혹은 로맨스를 담당하는 캐릭터로 캐스팅하지 않는다. 아시아와 관련된 이야기가 중심이거나 아시아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다루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시안 남성은 반복적으로 평면적이고, 2차원적인 코믹한 역할을 한다. 캐릭터의 발전이나 깊이, 품위도 없다.

드랙퀸 경연 리얼리티 프로그램 '루폴의 드랙 레이스'에서 준우승한 한국계 미국인 드랙퀸 김치(Kim Chi)는 자작곡 'Fat, Femme & Asian'에서 자신에 외모에 대한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작가 윈터 한은 애틀란틱 칼럼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항변하는 게 아니라, 뚱뚱하고, 여성적이고, 동양인인 것이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아시아계 남성들은 여성들 사이, 그리고 주류 게이 커뮤니티에서 종종 '기피 대상'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 이에 대해서는 아시안계 미국인 남자 99%가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동양인 남자들은 매력이 없고, 부차적이고, 쓸모 없는 인간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런 고정관념이 비인격적이라는 사실조차 잘 모르는 것 같다. 성기가 작다, 성적으로 절박하면서 동시에 엄청나게 밝힌다, 너드(nerd)다, 불쌍하다, 무기력하다, 외부인이다, 열등하다, 어색하다, 문화적으로 퇴보했다 등등의 평가들이다.

아시아계 남자들은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가장 자주 무시되는 집단이다. 흑인, 트랜스젠더, 뚱뚱한 사람들, 여성스러운 사람들도 비슷하게 디스되거나 묵살된다. 불운하고 좁은 우리 사회(라고 쓰고 '백인 위주의 사회'라고 읽는다)의 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로 말이다.

*'온라인 데이트 앱에서 정말 많은 게이들이 공개적으로 인종차별을 한다'는 제목의 VICE 기사에서 캐나다에 사는 한 26살 아시아계 남성은 "앱(그라인더) 안은 완전히 다른 세상 같다"고 표현한다.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아시아계 캐나다인 콜린 팩터는 백인이었던 첫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이게 나에 대한 관심인지, 아니면 동양인에 대한 페티쉬인지 끊임 없이 자문했다'고 말한다.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평등과 열림을 지향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굉장히 낙담스러운 일이다. 궁극적으로 '백인 중산층 비장애인 동성애자 남성'들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가르치는 진보를 실제로 실행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은 엉망진창이고, 비인간적이며,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

-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성소수자로 산다는 건 어떤 것인가?

= 내가 퀴어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표해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이해의 지점이다. 미국의 LGBTQ 사회가 우리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단순한 그룹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아름답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아시아계 퀴어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하지만 물론 개인적인 경험들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좋은 때도, 나쁜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게이바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난 당신쪽 사람들하고는 안 만나요' 라고 말하는 걸 듣거나, 아시아계가 많이 모인 곳에서 사람들이 내가 게이라는 사실이 마치 없는 일이고, 무효인 것처럼 대하는 경험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둘 중 하나의 정체성을 선택할 것을 요구받는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난 항상 둘다니까. 2008년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맞붙었을 때 '당신은 흑인이냐, 여성이냐'라는 질문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커밍아웃 후, 나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게이 커뮤니티 내에 만연한 인종 차별에 맞닥뜨렸다. 내가 아무런 적의 없이 말을 걸어도 어떤 사람들은 '아시아 거절', '쌀 거절' 같은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일상적인 편견이고 멸시였다. 오랫동안, 아시아 남성에 관심있는 이들은 일본어를 배우고 아니메 좋아하는 백인 남자애들뿐인 것 같았다. 어떤 백인 남성은 인종주의로 꾸민 아시안 테마의 침실을 완성하기 위한 물건처럼 나를 바라봤다.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내가 어릴 때 섹스했던 사람들 중에는 나를 '칭크(Chink, 중국인을 비하하는 은어)'라 부른 백인 남자도 있었다. 십대였던 나는 엄청난 굴욕감을 느꼈다. 그런 경험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정치적인 사람이 됐다. LGBTQ 커뮤니티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릴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일들은 슬프게도 아주 흔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에는 '게이시즘(Gaycism, gay와 racism의 합성어)'이 있지만, 다들 이에 대해 침묵한다. 게이시즘은 이런 류의 대화를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이들로부터 온다고 나는 추측한다. 지금 하는 이런 대화는 이미 오래전에 했어야했던 것들이다.

- 드랙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드랙 활동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건?

= 드랙퀸 활동은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복지와는 전혀 다른 길이지만, 나는 내 본업인 사회복지 분야의 가치들을 예술 작업에 가져오려고 노력한다. 사회 정의, 통합, 개인의 품위를 지키는 일 같은 것들이다. 나는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제기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 의구심을 갖거나, 그들을 짜증나게 여기거나, 혹은 본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슈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근시안을 깨고, 이런 고질적인 '심술'을 모두가 경계를 넘는 정치로 바꾸고 싶다. 실현된다면 정말 사랑스러울 것이다.

성소수자의 범주에서 자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고립감을 느끼고, 스스로의 감정을 억압하고, 감정 때문에 당황하면서 보냈다. 나는 언젠가 나의 이상하거나 복잡한 면을 그대로 봐주고, 받아들여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절박하게 매달려서 살았다. 이런 말이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이건 성장기의 아이들이 갖는 정말 흔한 열망이고 꿈이다. 특히 여러가지 면에서 소외된 집단에 속하는 아이라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당신이 견딜만해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 경험상 맞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일상적인 편견을 무시하는 일이 훨씬 쉬워지고, 자신만의 멋진 인생을 그냥 살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막 커밍아웃을 한 16살, 17살, 18살 때에는, 눈이 반짝거리고 얼굴에도 빛이 도는 그때에는 세상을 보는 시각에 심각하게 검은 칠을 하게 될 수 있다.

- 세상은 나아지고 있는가? 혹은, 트럼프 시대에도 세상은 여전히 나아지고 있는가?

= 트럼프 정부는 성소수자, 유색인종 미국인들을 보호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의 표가 사적인 이익에 필요해지기 전까지는 계속 그럴 것이다. 성소수자 혐오 범죄들은 대선 이후 불이 붙었다. 트랜스젠더 살인은 이전에도 주기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다. 게다가 살인자들은 종종 처벌을 받지 않고 넘어가기까지 했다. 성소수자 자살률은 정말 마음 아픈 수준이다. 특히 트랜스젠더로 가면 그 숫자는 훨씬 높다. 홈리스 인구 중 거의 절반이 가출한 십대 성소수자들이라는 말도 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소수자 기관들은 우리를 '동성결혼 법제화'와 같은 의제로 삼지 않는다. 동성결혼은 생사를 위협하는 이슈라고 보기 매우 힘든 데도 말이다. 이제는 우리의 목표를 조직화하고 민주화할 때다. 성수소자 1%의 목표를 채우는 데만 온전히 집중하는 대신 말이다.

나는 종종 사람들이 '나아지고 있는지' 묻는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재확인받기 위해 낚는 질문이라고 느낀다. 나는 그런 선언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하겠다. 바로 아직 해야할 일이 많다는 것.

이를 위해서 적당히 돌아가는 길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같이 헤쳐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당연하다고 느꼈던 것들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우리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급진적으로 바꿔야 할 수도 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나는 퀴어, 아시아계, 유색인종의 큰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정의의 편이라면, 당신도 우리 일원이 될 수 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고정관념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명하는 인터뷰 시리즈를 싣습니다. 특히 아시아에서 사회가 강요하는 성 고정관념이 어떻게 개인을 압박하고, 장벽이 되는지 그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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