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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권력 분립과 사법기관 중립성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헌재소장과 대법원장의 임명에 대통령과 국회가 이처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런 제도는 의아스럽다. 교과서에서는 이것을 기관간의 '견제와 균형'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정치권력에 의해 중립성이 훼손되어온 사법 현실을 경험한 국민의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뉴스1

지난 9월, 대통령이 지명한 사법기관 수장 후보자 인사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11일에는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헌정사상 최초로 부결된 반면, 열흘 후인 21일에는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권력 분립과 사법기관 중립성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헌재소장과 대법원장의 임명에 대통령과 국회가 이처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런 제도는 의아스럽다. 교과서에서는 이것을 기관간의 '견제와 균형'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정치권력에 의해 중립성이 훼손되어온 사법 현실을 경험한 국민의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더구나 정파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국가 안보에 매진해야 하는 국정원이 이명박 정권 당시 정치와 언론 등 국내 문제에 깊숙이 관여한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국정원이 이렇게 타락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심복인 원세훈 씨를 원장으로 심었기 때문이다. 사법기관을 포함한 중립적 공공기관의 인사를 정치권에서 이렇게 주물러도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9월에는 사법기관에 관련된 굵직한 뉴스가 또 하나 있었다. 18일 법무부의 개혁위원회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권고안을 발표하였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8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개혁 대상 제1호가 사법기관이었는데 공수처 안은 이런 여론을 반영하는 개혁 방안이다. 검찰의 기소 독점권을 깨트려서 공수처와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기관 모두 수장을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데, 두 기관이 임명권자에 대한 충성 경쟁을 벌인다면 지금보다 오히려 더 못해질 수도 있다.

위 여론조사에서 역시 개혁 대상 고순위로 꼽힌 언론도 마찬가지다.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방송공사의 수장을 대통령이 임명한다. 문화방송 인사에 관여하는 한국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 이사 인사권도 방송통신위원회에서 갖고 있으므로 방문진에도 대통령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다. KBS와 MBC가 정권 편향적 보도를 많이 했다는 지적을 받아왔고 급기야 정규방송을 제대로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도 바로 바로 그 때문이다.

중립적 공공기관 인사에 관여하고 있는 국회 역시 정파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대통령과 다르지 않다. 이번 헌재소장과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처리 과정에서도 보았듯이 각 정당은 후보의 능력과 도덕성을 따지기보다는 자기네 정파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졌다. 사법기관 인사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의 존재감 과시 기회로 삼는 듯도 했다.

중립적 공공기관 인사에 관해 대통령도 국회도 편파적이라면 일반국민의 의사를 직접 수렴하는 방식이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 건설 중단 또는 재개 여부를 판단하는 공론화위원회와 시민참여단의 활동이 주목된다. 시민참여단은 일반국민 중 무작위로 선출된 5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9월 16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첫 모임에 478명(95.6%)이 참석하였다. 공론화위원회가 예상했던 참석률 75%를 훨씬 웃돈 것으로 볼 때 일단 희망적인 출발이다. 대의 민주주의의 폐단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주목 받고 있는 '숙의 민주주의'의 좋은 선례를 만들어내기 바란다. 아일랜드에서는 추첨으로 구성된 시민의회가 개헌을 비롯한 중요 사회현안을 다루고 있을 정도다.

이런 방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물론 있다. 종래 중요한 결정을 대의기구 또는 전문가가 도맡아왔던 관행 때문인지, 비전문가의 판단에 너무 의존한다는 비판이 그 중 호소력을 가지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대의기구와 소위 전문가들이 얼마나 국민의 상식과 동떨어진 결정을 해왔는지 잘 안다. 조지 버나드 쇼는 "모든 전문직은 상식인을 무시하는 음모에 불과하다"고 했다.

* 이 글은 <영남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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