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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3일 11시 40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14일 14시 12분 KST

[정두언 회고록] 22. MB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한 이유

연합뉴스

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최초로 주장

이명박 정권은 세종시 수정안 의결을 기점으로 무기력해지면서 레임덕을 맞기 시작했다. 당은 박근혜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명박은 원래부터 여의도를 멀리 하긴 했지만 이때부터 '이명박 정치'는 사라지고 '박근혜 정치'가 여의도를 움직였다. '정치'에서 밀린 이명박은 정책에 관심을 뒀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는 신자유주의였다. 중도 실용을 내세웠지만 오히려 그와 배치된 정책이 많았다. 감세를 추진한 것도 중도실용과는 맞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에 맞춘 공약은 '747공약'이었다. '747공약'은 경제 공약 비전으로 연평균 7% 경제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을 달성해 경제 강국시대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강만수가 재경부장관이 되면서 감세 정책을 내건 것은 결국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747을 달성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결국 노무현 정부 때보다 더 낮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노무현 정부의 평균경제성장률은 4.5%인데 반해 이명박 정부는 3.2%에 불과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드러나 폭발한 것이 2008년 금융위기이다. 신자유주의를 보완하거나 반대되는 정책을 폈어야 하는데 신자유주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금융위기를 사전에 막지 못하고 경착륙을 해버렸다. 그나마 수습을 잘 했다. 고환율 정책으로 수출을 유지시켜서 성장 기조를 붙들어 매 위기를 탈출했다. 그러나 그 부담은 서민에게 돌아왔다. 반면 대기업은 가장 큰 수혜자가 됐다. 당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대호황을 누렸던 배경에는 기술적인 것보다는 이러한 고환율 정책에 힘입은 바 컸다. 그로 인해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호조를 띤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명박 정부는 수입품 즉 생필품 가격 상승으로 인한 서민들의 부담으로 경제 위기를 돌파한 셈이다. 그렇다 보니 결국 복지 문제가 다시 촉발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09년 4월 9일 '석학과 함께 하는 학문과의 소통-한나라당의 신자유주의 돌아보기'라는 주제로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를 국회로 초청했다. 예전 한나라당에서 세미나나 연찬회를 할 때 보면 거의 극우파들을 불러서 얘기를 듣는다. 그러면서 '맞아, 맞아!' 하며 자기만족을 한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불러서 얘기를 듣는 것은 전혀 자기발전이 없다.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불러서 얘기를 듣고 자기를 점검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게 자기발전이다. 그래서 나는 장하준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고 한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던 임태희 의원과 여의도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김성조 의원이 축사를 했다. '이래도 신자유주의인가?'라는 도발적 주제는 당시로서는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감을 얻었다. 나는 2010년 12월에 다시 한 번 장교수를 초청했다. 1년 8개월이 흐른 시점이었지만 세상은 많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2010년 장교수의 강연에 앞서 나는 대략 이런 내용으로 인사를 했다.

"장교수님은 작년 4월에 '이래도 신자유주의인가?' 라는 주제로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하신 바 있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시장만능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반신반의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는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믿음보다는 의문이 훨씬 더 커졌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고성장국가였던 대한민국이 언제부터인가 저성장의 늪에 빠져 국민소득 2만 달러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기간 동안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고용불안도 악화되었으며, 금융위기는 상시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런 현상은 문민정부의 세계화 선언으로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장하준 교수는 그동안 일련의 저작을 통해서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인 저성장, 양극화, 고용불안, 금융위기 등의 주범이라고 일관되게 비판해왔습니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우리는 이제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우리 자신을 심각하게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천정이 무너져 비가 새는데, 천정 고칠 생각은 않고 계속 날씨 탓만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따라온 길을 되돌아보며 '오메, 이 길이 아니었나벼!' 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불편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고통과 저항이 따르더라도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 한나라당이 이 시점에서 그 일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를 써온 한나라당 세력이지만, 한 순간에 일본의 자민당 신세로 전락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이렇게 얘기 하더군요. 신자유주의는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아니냐고요. 아니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충실했던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정체성은 또 무엇인가요. 주자학, 성리학이야말로 나라의 정체성이라고 교조적으로 매달렸던 조선후기 우리 선배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오늘 장하준 교수의 강연이 우리의 지나온 길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번영과 통합의 길을 찾아 나서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인사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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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장하준 교수가 국회에서 열린 '새로운 자본주의와 한국경제의 미래' 초청강연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감세철회의 깃발을 들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추가 감세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당에서도 감세를 철회하라고 했지만 야당만으로는 힘에 부쳤다. 여당에서는 김성식 의원 정도가 목소리를 냈으나 메아리가 없었다. 내가 최고위원이 된 후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1년 여 동안 이슈를 끌고 간 끝에 감세철회를 이루어냈다.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기조를 바꾸자고 주장해 진통 끝에 결국 관철을 시킨 것이다. 급기야 18대 국회 마지막에는 증세법안까지 통과시키면서, 18대 국회를 마무리했다.

정치를 해오면서 느낀 것인데 정책에서 핫이슈가 되는 것은 교육과 세금 분야이다. 국민, 특히 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민심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교육이나 세금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면 이슈가 굉장히 오래 끈다. 정치적으로 보면 장사를 잘 할 수 있다. 나는 추가감세 철회 문제로 거의 1년 동안 이슈를 끌고 갔다. 외고 개혁도 한 1년 정도 이슈가 됐다. 정치인은 교육과 세금과 관련한 문제에 도전하고 성과를 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역대 영국의 보수당을 보면 세금 문제로 국면을 전환시키곤 했다. 영국 초기의 보수당을 돌아보면 지주계급과 귀족계급의 정당이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중소상공인을 위주로 하는 신흥 자산 계급인 부르주아 계층이 늘어났는데 보수당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못했다. 그것이 첨예하게 대립해 터져 나온 것이 곡물법 파동이었다. 지주계급과 귀족계급의 기반은 농장이었다. 보수당은 대농장을 보호하기 위해 유럽에서 들어오는 곡물에 대해 굉장히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그러니 중소상공인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생활비용이 높아졌다. 당연히 이것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것은 결국 관세철폐로 이어진다. 보수당은 지주계급과 귀족계급의 이익을 대변했으므로 관세를 계속 고수하려고 했지만 보수당의 필 내각은 곡물법 관세를 철폐했다. 이것이 곡물법 파동이다. 결국 보수당은 재집권에 실패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보수당은 곡물법 파동을 계기로 '중산층'의 중요성에 눈뜨면서 중산층 정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지 않았으면 보수당은 사라졌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서민대중정당을 표명했지만 기득권 정당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었다. 한나라당이 오랫동안 집권하고 국정을 주도하려면 지지 기반을 넓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민·대중을 위한 세금 정책을 써야한다. 감세는 혜택이 기업이나 부유층에 돌아간다. 낙수효과로 인해 그 혜택이 서민층으로 전가된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감세든 성격 자체가 부자감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다시 거둬들여서 복지로 쓰는 게 결국 서민·대중에 맞는 정책이다. 결국 감세를 철회하고 나아가 증세까지 해야 결국 복지 정책으로 나가는 기반을 만들 수 있다. 증세 없는 복지는 없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어디에도 신자유주의를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불과 1, 2년 사이에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흐름이 바뀌는데, 이명박 정부는 그때까지 감세를 고집하고 추가감세까지 밀어붙였다. 거꾸로 가는 정권이었던 것이다. 친서민 중도실용은 커녕 극우 정권으로 가버렸다. 그야말로 부자와 기업을 위한 정권이 됐다. 그렇게 가면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명박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감세로 승부 보겠다, 성장을 달성해서 복지를 하겠다는 게 MB노믹스였다. 그런데 그 방향을 바꾸면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친서민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경제는 정치다

세종시 수정안이 폐기된 때가 2010년 6월이다. 그 이후 이명박 정부는 새로운 일을 하지 못하고 인물이나 정책 면에서 수비적으로 갔다. 2010년 8월 이후의 정부는 그 전 정부와 완전히 다르다. 이재오가 2인자 역할, 컨트롤 타워, 실질적인 얼굴마담 역할을 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을 선도하기보다는 방어적인 국정 운영을 시작했다. 송태영 한나라당 충북도당위원장의 증언이다.

"단순한 권력투쟁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정책 지향점과 수단의 차별화다. 이명박은 기업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기업 논리가 강했다. 보수주의자의 DNA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 정권을 잡으면 기본적으로 대처리즘을 생각한다. 자본 논리가 과도하게 자유방임적으로 가다보니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거기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정두언 의원이 그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물을 댄 것이다. 이 물이 새로운 물이었는데, 이 부분에 대한 평가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 흐름들이 '추가감세철회안'이라는 이름의 법안으로 나타났다. 만약 정두언류의 생각이나 구상이 이명박 정부의 국정 전반에 능동적으로 펼쳐졌으면 이명박 정부는 달라졌을 것이다."

글쎄, 송 전 위원장의 분석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듣기에 싫지는 않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해보자. 이명박은 과연 서민인가? 그가 쓴 '신화는 없다'라는 책의 주제는 그가 서민 출신으로서 성공 신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서민이미지로 국민적 인기를 얻어서 대통령까지 됐다. 그리고 친서민 중도실용을 표방했다. 그런데 이명박의 정신세계, 사고방식은 과연 서민이었나?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었다. 그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가 서민이었다면 현대그룹에 들어간 이후, 기업인으로서, 재벌CEO로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전반부의 인생은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뿐 그의 실제 사고방식은 재벌이었다. 이게 집권 후 여지없이 드러났다. 강부자(강남, 부자),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인사를 한 이유도 그런 것이다. 주변에 소위 말해 가진 자들이 포진했다. 그러니 정책도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 감세 등을 통해 기업을 부양해서 기업이 성장의 견인차가 되도록 하는 신자유주의로 간 것이다. 어떤 정책을 표방하고 관철시키려면 거기에 맞는 사람을 자리에 앉혀야 한다. 사람은 다 기득권층을 쓰면서 그들에게 서민 정책을 하라고 하면 시늉만 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로버트 라이시, 폴 크루그먼, 조셉 스티글리츠 등 좌파경제학자들은 경제가 곧 정치라고 말한다. 경제가 정치지, 경제를 경제로 보면 경제는 불평등으로 가고 성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실제로 미국 역사상으로 증명이 된다. 단적인 사례로 레이건 시대에 그 이전까지와 정반대로의 정책 전환을 하는데, 기업인과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를 등장시키면서 감세 정책으로 간다. 그러면서 결국 불평등이 심화되고 경제성장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195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을 대압축시대라고 하는데, 이때가 가장 소득분배율이 좋았고 성장률도 높은 호황이었다. 그때는 최고소득세율이 80~90% 사이였다. 이게 레이건 시대에는 20~30%대로 떨어진다. 기업가들이 정책을 담당하고 감세정책을 쓰면서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성장률을 떨어뜨려 미국을 재정적자국으로 전환시켰다.

흔히 우리는 기업가나 경제학자가 경제를 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아마추어적인 편견과 선입견이다. 경제가 정치라고 전제한다면, 정치를 모르는 기업가에게 국정을 맡기면 경제를 망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정치에 문외한인 경제학자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의 핵심은 세금과 교육이다. 이런 것으로 경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완전고용을 목표로 규제를 완화하고 경쟁을 촉진해서 기업을 살찌우고 소득 불균형만 심화시킨 것이 신자유주의의 최종 모습이다. 기업 하는 사람이 경제를 안다는 것은 결국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이명박이 경제를 안다? 지나고 보니 우스꽝스러운 얘기였다. 기업을 아는 것이지 경제를 아는 것이 아니다. 기업과 경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지극히 초보적인 생각이다.

미국도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재무장관들을 다 월가에서 데려다 썼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초래했나. 결국 그 사람들이 미국의 경제를 살렸나? 아니다. 결국 금융자본만 살찌웠다. 그런데 오바마도 그렇게 했다. 선거 자금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기업가 출신들은 친기업 정책을 쓰지 친국민 정책을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정책을 전환하면 거기에 맞는 사람을 써야 한다. 안 맞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하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과 관련해 박재완, 강만수, 나성린, 백용호는 신자유주의류의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 굳이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곽승준, 조원동 정도에 불과했다.

감세철회가 성공하기까지

당시 여의도에 한겨레 기자 출신인 장정수가 운영하던 미래사회연구원에서 조원동(당시 조세연구원장)과 가끔 얘기를 나누곤 했었다. 하루는 조원동 원장이 3페이지짜리 자료를 가지고 왔다. '지금까지 감세를 해왔고, 앞으로 더 한다는데, 앞으로 더 할 것을 안 하면 매년 세수를 3조원 이상 확보할 수 있다. 그것을 복지로 쓰면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자료를 정운찬 총리에게 가지고 가서 정책 아젠다로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정운찬은 내 앞에서는 좋다고 하더니, 이명박 대통령에게 가서 말도 못 꺼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최고위원회의에서 감세 얘기를 한 것이다. 얘기를 꺼내고 보니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역시 세금 문제가 반응이 뜨겁다는 게 여기서도 확인이 됐다.

최고위원회의에서 그렇게 주장을 하고 나서 청와대 정책실장과 경제수석, 기재부장관에게 의견을 달라고 했다. 당시 윤증현 기재부 장관을 사석에서 만났다. 그때만 해도 윤증현 장관은 장관직에 무척 피로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정두언: 장관님 제가 자료 보냈는데 의견 안주세요?

윤증현: 나도 정의원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동감이에요. 그렇게 해야 해요.

정두언: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죠!

윤증현: 소신껏 하세요.

최고위원회의에서 추가감세 철회를 주장하고 난 후 나는 박근혜를 찾아갔다. 본회의장 박근혜 자리에 가서 자료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데, 카메라 플래쉬가 막 터졌다. 박근혜가 곤란하다는 듯이 '카메라 있잖아요' 하며 불편해 했다. 그래서 '알겠습니다. 자료 드릴 테니 보십시오' 하고 놓고 나왔다. 그게 사진도 나오고 기사도 됐다. 그것도 감세 문제가 이슈화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10년 10월 27일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추가감세를 다시 주장했다. 그때가 정기국회의 기획재정위원회 법안소위가 열릴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위원회 법안소위에서 소득세법이나 법인세법에 대해 정리를 한다. 그때 이종구 의원이 법안소위 위원장이자 정책위 부위원장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종구 의원에게 얘기했다. '형, 이제 우리 선거도 치러야 하는데 계속 감세해서 어떻게 선거 치르려고 해. 그게 맞아?' 그랬더니 이의원 말이 "조세소위에서 수치상으로는 이견이 있지만 추가감세를 철회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종구 의원과 함께 안상수 대표를 만났다. 전날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안대표는 "한나라당은 명실공히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이 되겠다. 개혁적 중도보수로 거듭나겠다. 고소득층까지 아우르는 '보편적 복지'보다 서민과 중산층을 포함한 '70% 복지'를 목표로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나는 '대표님, 어제 중도개혁 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구체적인 게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추가감세 철회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기재위 법안소위 분위기가 어떤지 이종구 의원 얘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이의원의 얘기를 들은 안대표는 '그럼 그렇게 하지. 나도 그렇게 해볼게' 그랬다. 나는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아 흥분했다. 바로 문화일보 기자에게 전화해 "안대표도 감세 철회하겠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이 내용은 바로 기사화 됐다. 그랬더니 청와대에서 바로 안대표에게 항의를 했다고 한다. 안대표는 다시 번복을 했다. 졸지에 내가 일방적으로 언론플레이 한 것처럼 돼버렸다. 그런데 그게 외려 이슈를 더 키웠다. 법안을 발의하고, 박재완과 강만수 하고 언론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그러는 가운데 이슈는 계속 커져갔다. 2010년 10월29일자 헤럴드경제는 이렇게 보도했다.

정두언 "강만수는 '감세귀신'이 들려있는 사람"

한나라당 내 감세철회 논란을 주도하고 있는 정두언 최고위원은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보가 '부자감세' 철회에 부정적 입장을 보인 것과 관련해 "이 문제(감세 철회)를 한나라당 의원총회까지 끌고갈 것"이라며 관철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정 최고위원은 특히 강만수 경제특보를 "'감세귀신'이 들려 있는 사람"이라며, "의원총회에서 많은 의원들의 동의를 얻어 (감세 철회에) 성공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강조해 앞으로 이를 둘러싼 여권내 갈등이 더욱 심화할 것임을 예고했다.

정 최고위원은 이날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감세는 대선공약이기 때문에 철회할 수 없다는 강 경제특보의 지적(본보 28일자 1면 참조)에 대해 "우리(여권)는 이미 중산층과 서민,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감세 공약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고소득자와 대기업에 대한 감세를 2013년으로 연기해 놓고 있는것인데, 그때는 이미 현 정부의 집권이 끝난 다음"이라며 "강 (전)장관 얘기는 재집권을 전제로 한 것으로, 우리(한나라당)와 접근 방식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차기 선거를 치러 정권을 재창출해야 하는 한나라당으로선 입장이 다르다는 말이다.

앞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강 특보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감세는 대통령의 공약이기 때문에 쉽게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다"며 강한 반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정 최고위원은 감세철회에 대한 사전 조율 여부와 관련 "한달 전부터 청와대와 정부에 관련 자료를 갖다 주고 설명도 했다"며 "하지만 묵묵부답이서서 당에서 (철회 추진을) 이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논의에 대한 당의 입장에 대해선 의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감세 철회를 성공할 것으로 확신했다. 정 최고위원은 "당 최고위 비공개 회의(10월27일)에서 감세철회에 대해 설명을 했을 당시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안상수 대표도 '그러면 교육이나 다른 부분에서는 할 것이 없느냐'고 묻기까지 했다"고 소개하고 "그런데 마치 (철회가) 확정된 것처럼 보도되니까 '톤'을 낮춰서 브리핑을 번복한 것"이라며 충분히 논의하고 설명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점점 선거가 다가오자 당에서도 감세 철회로 갈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의원들은 피부로 민심을 느낀다. 박근혜도 당초 감세 철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측근인 최경환과 나성린의 입장이 그랬기 때문이다. 박근혜 눈치를 보는 의원들도 나한테 와서는 "정의원 얘기가 맞아. 정의원 그렇게 해줘 봐" 라고 말하곤 했다. 결국 2011년 6월 16일 의원총회에서 '감세 철회'를 당론으로 결정했고, 그 해 9월 7일 고위 당·정·청 협의에서 그 방향으로 다시 최종 정리했다. 마침내 법인세법 일부 개정안은 2011년 12월 30일 국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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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 © 연합뉴스

내친김에 소득세 증세도 주도

감세 철회 문제가 가닥이 잡힌 뒤인 2011년 11월 7일 나는 미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버핏세를 인용하면서 "소득세 증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핏세 논쟁의 시작이었다. 기획재정부에서는 반대하고, 유승민은 찬성했다. 박근혜는 최경환의 입을 빌려서 문제가 있다며 부정적으로 나왔다. 나는 내친 김에 소득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다. 그런데 조세소위에서 관철이 안 됐다.

당시는 복지논쟁이 터져 나오고 박근혜도 경제민주화 한다고 할 때다. 당연히 증세를 해야 했다. 상징적으로라도 해야 했다. 부자들의 소득세 최고세율을 높여야 하는데, 박근혜가 또 반대했다. 결국 법안소위에서 최종적으로 소득세 증세는 없는 것으로 여야가 합의해 법안이 12월 본회의에 올라왔다. 나는 증세가 필요하고 이왕 할 것이면 한나라당이 주도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부자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던 차에 김성식, 정태근, 조문환 의원 등과 "우리가 본회의장에서 수정안이라도 냅시다"라고 뜻을 모았다. 수정안을 내려면 의원들 정족수 30명을 채워야 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돌렸다. 그런데 의외로 응원군들이 많았다. 그때는 친이에서 이탈하는 의원들도 많았을 때다. 이재오, 이상득 눈치 안보고 빠져나온 인원을 모으니 20명 가까이 됐다.

그런데 공교롭게 10시 반쯤 민주당 정책위의장이던 이용섭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용섭입니다. 듣자하니 수정안을 낸다고 하는데 같이 냅시다" 그랬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세율에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했더니 "우리가 맞추겠습니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야의원들이 합동으로 50여 명이 수정안을 냈다. 수정안이 들어오니까 황우여 원내대표가 화들짝 놀라 본회의를 중단시켰다. 그런 뒤 의총을 열었다. 의총에서 최경환, 나성린 등이 안 된다고 했다. 정책위 부의장인 나성린은 '이걸 하면 강남 전문직 사람들이 파출부를 쓰다가 못 쓰게 됩니다'는 발언을 해 의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나는 그날 의총에서 이런 얘기도 했다. "장관들이 하루 내내 만나는 사람이 교수, 공무원, 기업인, 언론인들이다. 서민 만나 본 적 있나? 우리는 지역관리하면서 서민 밀집 지역에 다니다 보면 세집 걸러 한집이 실업자다. 남자들은 소주 마시고 있고 여자들이 파출부나 식당에서 일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미안하고 맥 빠져서 못 걸어 다닌다. 그런데 맨날 다 갖춘 사람만 만나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저런 발언이 나온다."

의원들은 내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성린과 황우여가 그날 밤 박근혜를 설득하러 갔다. 박근혜를 만나서 얘기하니까 "내가 그냥 하라고 그랬잖아요" 하고 집에 가버렸다. 그 다음날 또 의총이 열렸지만,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나성린이 세율을 약간 낮춘 수정안을 냈다. 그러면서 이주영 정책위의장이 의총장에서 "정두언 의원,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김성식, 정태근에게 "내 생각에는 박근혜 체면을 생각해서 저 정도면 받아주자" 했더니 "안 됩니다" 라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좋습니다" 했다. 결국 나성린 안으로 재수정안이 나왔고 수정안이 통과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의정기록상으로는 내가 아니라 나성린이 대표발의자가 됐다. 수정안이 본회의에 통과되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This is politics!'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명박의 반대도 무릅쓰고, 그 막강한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반대도 무릅쓰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증세안을 한나라당 주도로 야당과 연합해서 통과 시킨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의미를 제대로 아는 기자들은 거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국가 주요 정책에 관한 노선 투쟁에서 이명박, 박근혜를 이긴 셈이다. MB 정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가감세 철회를 끝내 관철 시켰고, 박근혜 비대위의 반대 방침에도 불구하고 소득세 증세안도 야당의 협조를 끌어내 관철시켰다. 이후 박근혜는 내게 한 번 더 완패했다. 저축은행 사건과 관련하여 내 체포동의안을 처리 할 때 박근혜는 (체포동의안을)처리하라고 하고 지방에 갔다. 나중에 "정두언 의원이 책임져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표결 결과, 여야를 떠난 압도적인 반대로(찬성 74, 불찬성 179) 부결되었기 때문이다.

노선투쟁을 하다 보면 재미있는 면이 하나있다. 이슈가 심플한 것 같아도 논쟁 하다보면 계속 새로운 논리가 개발되고, 새로운 비유가 떠오른다. 이슈파이팅이 변화무쌍하게 진화한다. 내 딴에는 설득 논리를 완벽하게 준비했는데도 시간이 지나면 이걸 이렇게 말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꼼짝 못하겠지 하는 식으로 생각이 진화한다. 그러다보면 처음에는 아마추어인데 나중에는 전문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2.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청계천 복원에 협조하게 되었나

3. '좌파정책'인 대중교통개혁의 성공

4. MB 캠프의 태동

5. 안국포럼과 경선캠프의 실상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사건'

8. 왜 모든 정권은 비슷한 몰락 과정을 거치는가

9. 대선캠프의 변질

10. 백해무익한 정권 인수위

11. 인수위 시절의 어두운 비화들

12. 남북관계를 절단 낸 비밀 접촉

13. 한반도 대운하의 포기, 4대강 살리기로의 전환

14. 제18대 총선 한나라당 공천 작업의 내막

15. MB정부 인사실패의 교훈

16. MB정부 민간인 사찰의 겉과 속

17. 권력사유화 파동의 전말

18. 노무현 서거를 불러온 권력내부의 음모

19. 세종시 수정안은 왜 실패했는가?

20. 나는 왜 2010년 전당대회에 출사표를 던졌나

21. 자원외교, 무엇이 문제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