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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04일 11시 55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2월 04일 14시 12분 KST

나는 모피를 반대하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내 어머니는 여느 어머님들이 무릇 그렇듯이 모피를 좋아한다. 20여 년 전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부피가 거대해서 저걸 입고 산을 돌아다니다가는 사냥꾼의 공기총에 맞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모피를 선물 받으시고는 당근을 얻은 토끼처럼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나와 외출할 때 모피를 꺼내신다. 아들과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는 시간이니 가장 근사하게 갖춰 입고 싶어서일 거다. 나는 모피를 입은 어머니의 팔짱을 낀다. 그 느낌이 소름 끼치지 않냐고? 전혀. 그건 어쨌든 옷일 뿐이고, 나는 어머니에게 윤리학 강의를 할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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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피를 반대하지 않는다. 이게 지금 무슨 시대에 뒤처지는 소리냐고? 일단 한번 들어보시라.

사실 나는 대부분의 모든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완벽하게 반대한다는 태도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옳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걸 고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완벽한 반대가 아니다. 이때 진정으로 필요한 태도는, 1. 현실을 받아들이고, 2. 그 안에서 가장 실용적인 대책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동물보호론자지만 개고기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건 반대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은 전통이든 나쁜 전통이든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는 개고기를 먹는 풍습이 존재한다. 그걸 즐기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들을 위한 개고기 산업이 존재한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개가 어떤 지방과 어떤 사람에겐 식용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한 뒤 지금보다 더 위생적이고 윤리적인 유통 방식을 도입하자는 거다. 그렇다고 개고기 산업이 더 성장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사라져 가는 산업이다. 나에게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도살당하는 개들이 적어도, 아주 적어도 소나 돼지 정도의 취급은 받으며 죽는 것이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뒤 산 채로 불태워지지 않고 말이다.

모피에 관한 나의 생각도 비슷하다. 고백하자면 내 어머니는 여느 어머님들이 무릇 그렇듯이 모피를 좋아한다. 20여 년 전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부피가 거대해서 저걸 입고 산을 돌아다니다가는 사냥꾼의 공기총에 맞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모피를 선물 받으시고는 당근을 얻은 토끼처럼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나와 외출할 때 모피를 꺼내신다. 아들과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는 시간이니 가장 근사하게 갖춰 입고 싶어서일 거다. 나는 모피를 입은 어머니의 팔짱을 낀다. 그 느낌이 소름 끼치지 않냐고? 전혀. 그건 어쨌든 옷일 뿐이고, 나는 어머니에게 윤리학 강의를 할 생각은 없다.

나에게도 모피라고 할 수 있는 아이템이 몇 벌 있긴 했다. 라쿤 한 마리의 가죽을 고통스럽게 벗겨내서 만든 털이 목 둘레에 둘린 겨울 재킷을 몇 벌이나 갖고 있었다. 나는 라쿤털이 좋았다. 보슬보슬하게 목에 감기는 느낌도 좋았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털 내음도 좋았다. 지금은? 지금도 그게 아주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가죽냄새가 좋고 털 냄새가 좋다. 본능적으로 좋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하기 위해 내 후각적 취향 앞에서 거짓말을 할 만큼 나는 낯가죽이 두껍진 않다.

지금은 모피가 없다. 몇 년 전 모피 제조 동영상을 본 이후로 하나씩 하나씩 버리거나 남에게 줬다. 그런데 그런 행위가 일순간에 이루어진 건 아니라는 걸 미리 말하고 싶다. 산 채로 털가죽이 벗겨지는 여우 동영상을 본 뒤에 나는 분명히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윤리적 죄책감과 패션을 향한 열정은 아주 간단하게 1:1로 맞바꿔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잔혹한 동영상을 SNS에 올리며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 노력해도, 그걸 본 사람들이 즉시 방으로 뛰어들어가 모피로 된 아이템을 모조리 불태우고 울며 모피를 입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효과는 천천히 발현된다.

나는 내일 만날 친구가 모피를 입고 온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거나 입으로 소리 내어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교조적인 태도가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역효과를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친구가 입고 나온 디자이너 레이블의 모피 코트가 너무나 아름다워 탄성을 내지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모피는, 시각적으로 아름답다. 나는 아름다움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건 도덕, 윤리와 관계없이 아름답다. 이를테면 그건 우리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입었던 군복의 아름다움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도 비슷하다. 유대인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나치를 소재로 한 영화 '발키리'를 만들었을 때, 나는 서울을 방문한 그를 만나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물었다. "솔직히, 나치 군복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죠?". 톰 크루즈와 배우들이 입은 나치 군복에 브라이언 싱어가 미학적으로 도취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눈치챘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 브라이언 싱어는 거침없이 답했다. "물론이죠. 나치 군복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의 군복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어요". 나치들은 치가 떨릴 정도의 학살을 자행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입은 군복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우리의 본능적 미감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 모피란 그런 것이다. 그건 분명히 아름답다. 사람들이 옷을 통한 아름다움의 외적 발화를 멈추는 날이 오기 전에는 모피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을 거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이상 모피를 구입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참고 있다. 여전히 라쿤털이 달린 야상을 매장에서 보는 순간 크레딧카드를 든 손이 파르르 떨리지만, 나는 그것이 불행한 방식으로 도살당한 동물의 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참는다. 우리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일순간에 모피를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은밀하게 솟구치는 욕망을 꾹꾹 누르고 참아내는 것이다.

나는 모피를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모피를 참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완벽하게 금지하는 것보다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욕망을 참아내는 것이 보다 '인간 지성의 승리'에 가깝다고, 아주 거창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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