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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0일 11시 33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21일 14시 12분 KST

이재명, 독한 사이다

Bloomberg via Getty Images

나는 청량음료를 좋아한다. 중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코카콜라는 항상 냉장고에 비치한다. 콜라에 있어서라면 세상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다. 코카콜라를 좋아하는 사람과 펩시콜라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전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조금 더 '사이다'이기 때문이다. 사이다라는 제품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전자가 후자보다 탄산이 강력해서 속이 좀 더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다.

2016년은 사이다의 시대다. 많은 매체들이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면서 '사이다'를 빠뜨리는 일은 없을 게 틀림 없다. 뭔가 갑갑한 상황이 속 시원하게 풀렸을 때 사람들은 거두절미하고 '사이다'라고 말한다. 사이다는 인터넷 게시판과 소셜미디어에서만 통용되는 유행어도 아니다. 지난 4·13 총선이 끝나자 박원순 시장은 "한국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걸 보여준 사이다 선거였다"고 말했다. 반대말로는 고구마가 있다. 고구마를 먹고 목이 막혀 사이다를 들이켜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한국 정치에도 사이다가 하나 있다. 이재명이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데 엄청난 장기가 있는 정치인이다. '이재명의 대표적 4대 사이다'라는 동영상은 조회수가 굉장하다. 거기서 모두가 가장 좋아한 그의 사이다는 "노무현 대통령은 너무 착해서 상대 진영도 나처럼 인간이겠거니 하며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어설픈 관용과 용서는 참극을 부른다"는 거침없이 강한 사이다다. 다른 정치인들이라면 절대 입 밖으로 내뱉을 리 없는, 거의 염산에 가까운 탄산이다.

이재명 역시 자신이 사이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비상시국에는 고구마보다 사이다가 먼저"라고 말한 적도 있다.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가진 인터뷰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문재인에 비해 자신이 대선후보로서 더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 말이다. 문재인은 이에 대해 "탄산음료는 밥이 아니고 금방 목이 마르지만 고구마는 배가 든든하다"고 견제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사이다를 더 원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탄핵 정국을 거치며 이재명의 지지도는 급하게 뛰어 올랐다. 리얼미터가 지난 12월9일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그는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3위를 기록했다. 문재인이 23.1%, 반기문 UN 총장이 18.8%, 이재명은 16.2%다.

얼마전 경제 전문지 '블룸버그'는 이재명을 인터뷰한 뒤 그를 트럼프와 비교했다. 이재명은 인터뷰를 페이스북에 인용하며 "성공한 샌더스라 해달랬더니 한국의 트럼프 같다고...이재명의 지향은 트럼프가 아닌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입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인터뷰에서 트럼프에 대해 놀랄 정도의 동의를 표하며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선출해 기득권층을 탄핵했다"고 칭찬한 것도 사실이다. 정말? 지금 트럼프는 내각을 월스트리트 갑부들로 채우고 있으며 비윤리적 기업 중 하나인 엑손모빌의 렉스 틸러슨 회장을 국무장관으로 지명했다. 이재명은 "트럼프가 이익에 민감한 이성적인 사람"이라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트럼프와 함께 북한과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가 이성적인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익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건 이재명 시장이 필리핀 대통령 두테르테를 예로 들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기득권 카르텔'을 제거하겠다고 말한 부분이다. 조금 섬뜩하다. 두테르테는 마약사범들에 대한 초법적 처형을 주장해 대통령이 됐고 취임 이후 지금까지 필리핀에서는 5882명이 경찰과 자경단원에 살해됐다. 물론 이재명이 트럼프나 두테르테가 되진 않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완벽하게 동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재명은 자신의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는 현상의 이면에 트럼프·두테르테와 비슷한 퀄리티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은 것 뿐일 것이다.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를 대표하는 단어로 '포스트-트루스(Post-Truth)'를 선정했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탈진실' 정도가 될 이 단어는 '객관적인 팩트가 감정에의 호소나 개인적 신념보다 여론을 형성하는 데 힘을 덜 미치는 상황'을 의미한다. 옥스퍼드 사전 대표는 "소셜미디어가 뉴스의 소스로 부상하고 기득권이 말하는 팩트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기 때문이 이를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단어로 골랐다"고 했다. 영국인은 팩트와 관계없이 브렉시트에 투표했다. 미국인은 팩트와 관계없이 트럼프에 표를 던졌다. 팩트는 무의미해지고 있다. 팩트는 정치적인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팩트는 어쩌면 언론인들에게만 중요하게 통용되는 아주 사소하고 소소한 요소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나는 마침내 탄산음료를 끊기로 결심했다. 치아 건강 때문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임플란트를 했다. 의사는 빠르게 마모되는 내 치아 상태를 보더니 두 가지를 권했다. 양치질을 조금 덜 강하게 하라는 것. 그리고 청량음료를 그만 마시라는 것이다. 겉이 닳기 시작한 치아 때문에 풍치로도 고생하던 참이었다. 사이다를 정말로 끊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시도는 실패했다. 선물 받은 감자를 잔뜩 쪄먹던 어느날 밤 절망적으로 속이 답답해졌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도무지 속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느낌이 없었다. 마트로 뛰어내려가 1.5리터짜리 사이다를 산 다음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이다는 나의 막힌 속을 진정으로 뚫어주는 소화제 역할을 조금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내 위장을 약하게 만들고 이빨을 마모시켰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런 팩트는 내 뇌의 판단력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이가 들며 상해가는 치아와 장기는 탄산이 없는 깨끗한 생수를 원했겠지만 뇌는 모든 건강상의 팩트를 부인한 채 너무나도 간절하게 그 순간의 기분만을 뚫어주는 사이다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입은 만족스럽게 내뱉었다. 캬.

PS: 물론 최근의 그는 단순한 사이다로부터 뭔가 전략적으로 진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재명은 이렇게 해서 문재인을 이길 생각이다'라는 글을 읽어보시라.

*이 글은 한겨레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