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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24일 12시 11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24일 14시 12분 KST

이상한 화면 비율의 의미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의 화면 비율은 4:3이다. 대한민국엔 이 영화를 상영하면서 제대로 마스킹을 해줄 수 있는 상영관은 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에 대부분 관객들은 화면 양쪽에 회색 필라 박스가 뜨는 화면으로 이 영화를 봐야 한다.

도대체 감독은 왜 이 화면비율을 선택했을까. 4:3 비율이 인간이 실제로 세상을 보는 것과 비슷한 그림을 제공해준다는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한 말 같지는 않다. 우린 어느 경우에도 영화처럼 세상을 보지 않는다. 우리의 시야에는 분명한 프레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억지로 있다고 쳐도 결코 <사울의 아들>에 나오는 것 같은 그림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화면은 아주 이상하다.

<사울의 아들>의 4:3 화면은 <오즈의 마법사>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4:3 그림과는 전혀 다르다. 고전 4:3 비율 영화에는 공간이 충분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불타는 아틀란타나 맨덜레이 저택이나 오즈의 성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의 4:3 화면은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화면은 옛날 배불뚝이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6,7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양쪽이 잘려나갔다. 그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 내내 주인공 사울을 따라다니며 화면을 꽉 채운 그의 뒤통수나 정면 얼굴,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간신히 번갈아 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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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우슈비츠를 다룬 홀로코스트 영화치고는 이상한 선택이다. 당시 나치가 저지른 만행을 최대한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리는 것이 이 '장르'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은 보여줄 것들을 다 마련해놓고도 이걸 관객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시체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은 사울의 머리에 가리거나 초점을 잃고 뿌연 상태에서 구석에 밀려난다. 관객들의 안내인인 사울도 이들을 똑바로 응시할 생각이 없다. 이 상태에서 정교하게 연출된 음향효과가 관객들의 상상력을 조금씩 자극하기 시작한다. 이건 영리한 선택이다. 홀로코스트는 과잉 묘사된 역사적 사건으로 우린 이미 수십 년 동안 이 당시 비극을 온갖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접해왔으며 그 자극에 익숙해지고 무뎌졌다. 더 이상 자극의 정도를 높여서 관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역사적 비극의 의미가 그 익숙함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새로운 이야기 방식이 필요하다. 라즐로 네메스는 이를 찾아낸 것이다. 수많은 영화가 아우슈비츠를 방문했지만 <사울의 아들>처럼 들어가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끔찍한 역사나 사건을 재구성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어느 단계부터 소재를 착취하게 되고 결국 선정적인 포르노가 된다. 아무리 정당한 동기가 주어진다고 해도 이 과정을 막기는 어렵다. 여기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건 이야기꾼의 인권감수성과 예술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이들은 단순한 역사적 의무감만 가지고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그리고 그런 의무감이 일어날 수도 있는 잠재적 피해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