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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1일 05시 15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11일 14시 12분 KST

낡은 과거, 늙은 생각

1.

MBC 월화 드라마 [화려한 유혹]에 보면 아빠 빽을 업고 기고만장한 악당 정치가 캐릭터가 한 명 나온다. 아무리 봐도 좋은 점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이 역겨운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뮤지컬 배우 김법래는 눈에 뜨이는 연기 스타일을 하나 찾아냈다. 그는 딱 반세기 전 후시녹음 남자 성우의 연기 스타일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 분명 작가와 합이 있었을 텐데, 그에게 제공되는 대사 역시 딱 그 수준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유혹]은 현대극이지만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반세기 전 인물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김법래가 차용한 연기 스타일이 꼭 악역 연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작정하고 역겨운 악역을 연기하고 있다. 하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그런 발성과 연기는 꼭 악역 연기가 아니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정상적인 남자주인공들이 그런 식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그런 식의 대사를 그런 식의 억양으로 쳤다. 그건 그냥 남성성의 과시였다. 물론 여자주인공들의 연기도 여기에 맞추어졌다. 60년대 여자주인공의 성우 대사가 종종 필요 이상으로 비굴하게 들리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반세기 전에는 중립적인 남자 연기였던 것이 지금은 역겨운 조연 악당 연기가 되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당시에도 내재되어 있던 불쾌함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잡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반세기 전 사람들에게 [화려한 유혹]을 보여주어 보라. 그가 내뱉은 "계집년은 뭘 모른다" 따위의 대사가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관객들이 상당수일 것이다. 나는 몇 개월 동안 일 때문에 필름이 소실된 6, 70년대 한국 영화의 각본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는데 읽다보면 그 어처구니없는 사고방식에 어이가 없어지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60년대가 현대인 줄 알았다. 착각도 그런 착각이.


mbc


2.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 얼마 전 모 원로가 모 신문과 한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다. 그가 말한 "지옥을 천국으로 만드는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운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의무교육을 거친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교장선생 훈화를 무시하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대충 넘기다 엉뚱한 내용에 발목이 잡혔다.

"2000~3000년의 문학은 살아 있지만 300년 전 뉴턴의 법칙은 벌써 낡은 게 되지 않았나. 문학에는 시대착오가 없다. 항상 미래의 예언가다."

이게 무슨 어이가 없는 소리인가.

미안하지만 정반대다. 21세기에도 나사에서는 여전히 뉴턴 역학을 기반으로 우주선을 다른 행성에 쏘아 올린다. 이런 작업에서 굳이 상대성 이론을 적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 안에서도 뉴턴 역학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를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가 나오더라도 뉴턴은 여전히 그 일부이다. 과학철학을 겉멋으로 배운 사람들은 과학의 주관성을 쓸데없이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그들의 지식이 겉멋이라 그렇다.

인문학은 사정이 다르다. 정상적인 과학지식에서 뉴턴과 다윈을 무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호메로스나 소포클레스를 무시할 수 있다. 나에게 [일리아드]는 이종격투기 중계 같아서 영 정이 가지 않으며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제거된다고 인문학 세계는 붕괴되지 않는다. 아무리 수천 년을 살아남은 고전이라고 해도 뉴턴과 다윈과 같은 필수교양은 아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대체물을 찾아낸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대부분이 그렇게 하찮다.

이들은 살아남는 데 성공한 작품인데도 그렇다. 조금이라도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문학이건 철학이건 음악이건 미술이건, 인간이 지난 몇 천 년 동안 만들어낸 인문학의 결과물 99퍼센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시대의 유물이며, 한 시대의 가치관은 소름 끼칠 정도로 빨리 낡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작품들은 희귀한 예외이며 심지어 그 시대를 충실하게 대표하지도 않는다. 옛날 사람들이 고전이라 생각했다고 해서 미래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라는 법도 없다. 요새 누가 밀턴의 [실낙원]을 읽는가. 여러분이 읽는 '고전' 중 몇 퍼센트가 20세기 이전에 쓰였는가. 인문학과 예술을 구성하는 절대 다수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문학에는 시대착오가 없다'라니. 이런 시대착오적인 말이.


3.

예술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불멸성을 꿈꾼다. 반세기 전 대한민국에서 영화 예술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들 중 운 좋은 몇 명은 불멸까지는 아니더라고 안정적인 장수의 자격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들도 당시에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왕년의 인기 배우 박노식은 요새 소수의 한국 시네필들이 열광하는 몇 편의 액션 영화를 감독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생각해보자. 그의 영화를 보면서 배꼽이 떨어져 나가라 웃어대는 관객들을 좋게만 볼까?

박노식은 그래도 운 좋은 극소수이다. 대부분 수많은 한국 영화들은 그냥 나쁜 기억이며 [화려한 유혹]의 악당연기 클리셰의 재료로나 활용된다. 나는 그들의 역사와 권위를 인정받으려 노력했던 수많은 영화계 원로들의 시도를 기억한다. 다 허튼 짓이었다. 지금 논의되고 연구되고 감상되는 옛 한국 영화들은 원로들의 시도와 아무 상관 없이 감상된다. 이들은 모두 지금 시대 관객들의 간택을 받은 작품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영화를 감상하거나 만드는 사람들 대부분은 원로들에게 빚진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는 방식이다. 몇몇 바보들은 후대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장엄하고 긍정적이기만 한 역사의 기술을 꿈꾼다. 하지만 발전하는 세계의 역사는 그럴 수가 없다. 역사의 발전은 과거의 어리석음과 추악함을 짓밟고 뭉개면서 이루어진다. 진정으로 위대한 역사는 스스로 아버지 세대의 숨통을 끊으면서 만들어졌다. 당연히 추함과 아름다움 모두가 존재하며 하나의 이야기만으로는 완성되지 못한다. 과거의 위대함만을 자랑하는 나라는 자랑할 현재가 없는 나라이다. 이집트와 그리스의 위대한 과거가 지금의 후손들에게 관광수입 이외의 무슨 도움을 주는가?

만약 이 나라가 제대로 발전하고 있다면 나이 든 세대는 과거의 어리석음과 부도덕함을 인정하고 그를 극복한 과정의 일부로 참여한 걸 기뻐하고 현재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만약 늙은이들이 과거의 업적에 집착하고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비난한다면 그건 이미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고 그들에겐 나라의 붕괴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 뭐가 있던가? 헬조센? 그것만으론 약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