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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4일 07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14일 14시 12분 KST

여전사 캐릭터에 대한 조 라이트 감독의 착각

지난 몇십년 동안 '여전사'는 성차별에 대한 알리바이로 존재해왔다. 이중엔 알리바이로 가볍게 넘기기엔 아쉬운 훌륭한 캐릭터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하나의 캐릭터 옆에 묶인다. 남자 주인공 옆에서 와이어 액션을 하는 섹시한 조연. 이들의 액션이 쉽게 페티시화되는 건 물론이다.

조 라이트의 <팬>은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스캔들에 휘말렸다. <피터 팬>의 프리퀄이라고 주장하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라이트는 원작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공주인 타이거 릴리 역으로 루니 마라를 캐스팅했던 것이다. 루니 마라는 아름답고 재능있는 배우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니다. 왜 백인 배우에게 아메리카 원주민 공주 역을 주는가.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일단 입장을 보류하기로 했다. 줄거리만으로는 타이거 릴리가 어떤 캐릭터인지 알 수 없다. 영화를 보면 백인 여성이 타이거 릴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유가 나올 수도 있다. 어차피 타이거 릴리란 이름 자체가 그렇게 아메리카 원주민스럽지도 않다. 이건 전적으로 에드워드 왕조 시대 영국인이 별다른 고민없이 만들어낸 상상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그 캐릭터가 꼭 아메리카 원주민이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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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팬>을 봤다. 단골 상영관에서 3D 상영은 4D밖에 없어서 억지로 멀미를 참아가며.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형편없는 영화였다. 이 영화에 비하면 스필버그의 범작 <후크>는 걸작 취급을 받아도 됐다. 하지만 오늘 얘기 하려는 건 이게 아니다.

라이트의 영화 속 타이거 릴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닌 네버랜드 원주민 공주였다. 그리고 그 원주민은 백인, 동양인(한국인 배우 나태주가 연기한다), 오세아니아 원주민이 모인 다인종 집단이다. 그 좁은 세계에 사는 원주민이 어떻게 다인종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냥 영화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이거 릴리를 둘러싼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얼핏 보면 이 캐릭터는 멀쩡해보인다. 악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전사이고 누구의 짐도 아니다. 이 정도면 어린 소녀들에게 영감을 주는 멋진 캐릭터가 아닌가. 적어도 조 라이트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지 않다. 영화 속의 타이거 릴리는 이차원적이고 지루하며, 심지어 루니 마라의 미모에도 불구하고 쉽게 잊히는 인물이다. 왜 그럴까? 그건 라이트가 이 인물을 영혼 없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여전사'다.

지난 몇십년 동안 '여전사'는 성차별에 대한 알리바이로 존재해왔다. 이중엔 알리바이로 가볍게 넘기기엔 아쉬운 훌륭한 캐릭터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하나의 캐릭터 옆에 묶인다. 남자 주인공 옆에서 와이어 액션을 하는 섹시한 조연. 이들의 액션이 쉽게 페티시화되는 건 물론이다.

여성 캐릭터가 조연일 수는 있다. 그런 인물이 용감한 전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아예 그런 캐릭터를 상상할 의욕 자체가 부족하다면 이런 캐릭터들은 자연스럽게 영혼없는 한 점으로 수렴된다. 애당초부터 '여전사'란 단어를 그렇게 쉽게 쓰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조연이건 주연이건 글자 세 개로 정의되는 캐릭터에 무슨 깊이가 있겠는가.

차라리 작정하고 페티시화된 캐릭터라면 나도 여기까지 이 이야기를 끌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변태가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니까. 하지만 조 라이트 같은 감독이 그가 만든 타이거 릴리 캐릭터에 어떤 깊이나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건 그 자신이 만든 알리바이에 자기가 넘어가버렸다는 증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가 이런 따분한 스테레오타이프에서 근사하게 해방된 '여전사' 영화인 <한나>의 감독이기 때문에 실망이 더 크다. 그 영화에서도 의외로 감독보다 작가의 역할이 더 컸던 걸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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