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06월 03일 06시 21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6월 03일 14시 12분 KST

1차원적인 페미니즘 논쟁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페미니즘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 상당수가 페미니즘 영화를 일대일 상징으로만 이루어진 지루한 영역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여 심히 걱정스럽다는 말은 해야겠다. 적어도 내가 전에 체크했을 때 이 세계는 훨씬 역동적이고 다양한 곳이었다.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여성들이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는 이 영화의 페미니즘 자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듀나의 영화 불평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얼마 전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를 최근 한국 영화 속 두 여자주인공과 비교한 글을 읽었다. 그 글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견이 없다.

하지만 필자가 퓨리오사가 타고 다니는 워리그를 '여성의 부푼 배, 임신한 자궁'과 비교하는 순간 난 신경질적으로 웃고 말았다. 내 눈엔 워리그가 자궁이 아닌 거대한 남자 성기처럼 보인다. 심지어 뒤에는 고환처럼 생긴 동그란 연료탱크까지 하나 달려있다. 에스에프(SF) 작가 윌리엄 깁슨은 트위터에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원래 연료탱크를 양쪽에 두 개 달려다가 너무 뻔해보일까봐 바꾸었을 거라고 농담한 적 있다. 그렇다면 워리그는 남근 상징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더 깊이 다룰 생각은 없다. 영화 속 모든 것들을 인간 신체의 상징으로 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결정적으로 그건 상상력이 필요없는 따분한 게임이다.

많은 비평가와 관객들이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가 페미니즘 영화인가에 대해 토론한다.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논쟁에 들어가면서 영화와 영화 속 캐릭터가 이상할 정도로 지루하고 평면적이 되는 건 다른 일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그 지루함이 대상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환경주의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부발리니족 할머니들은 어떤가. 그들은 척 봐도 레즈비언 분리주의자들이며(많이들 무시하는데 퓨리오사는 엄마가 둘이다), 벌거벗은 여자를 미끼삼아 길가는 남자들을 사냥하는 호전적인 전사이다. 이들을 '관습적으로 여성적인' 동글동글한 표현들로 치장하는 건 모욕적이다. 퓨리오사 자신은 어떤가? 과연 상징적으로 임신한 무거운 몸을 끌고 다니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여성성의 현신인가? 퓨리오사의 캐릭터에서 여성성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이 캐릭터의 기능적 힘은 우리가 보통 남성적 장점으로 분류하는 것들이다. 이 여성들은 무자비하고 잔인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생생한 사람들로, 무언가의 상징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맥스가 퓨리오사에게 시타델을 점령하자고 제안하는 장면을 보자. 어느 입장에 속해있건, 이상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맥스를 남성의 대표로, 퓨리오사를 여성의 대표로만 본다. 하지만 <매드 맥스> 시리즈의 전체 성격을 보면 그런 식의 읽기는 부족하다. 오히려 고전적인 서부극의 공식이 더 잘 맞는다. 맥스는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떠돌이 총잡이다. 퓨리오사는 그 이후에도 남아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잠재적인 지도자다. 시타델의 점령은 맥스가 말할 때와 퓨리오사가 말할 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진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도 두 의미의 차이, 그리고 그 낙차에서 발생하는 내적 드라마이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성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비평하면서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다 분석할 수도 없다. 내가 이 영화를 특정한 시선으로 본다고 해서 그걸 무조건 강요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페미니즘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 상당수가 페미니즘 영화를 일대일 상징으로만 이루어진 지루한 영역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여 심히 걱정스럽다는 말은 해야겠다. 적어도 내가 전에 체크했을 때 이 세계는 훨씬 역동적이고 다양한 곳이었다.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여성들이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입체적이고 불완전한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는 이 영화의 페미니즘 자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