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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12일 14시 06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4월 13일 14시 12분 KST

선거는 세대 대결이 아니다 | '20대 개새끼론'의 빈곤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며

연합뉴스

선거철만 되면 돌아오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강성대국 북한, 탈북자, 다짜고짜 석고대죄를 하는 여당 정치인들, 갑자기 준엄하게 정치를 꾸짖는 언론 등 여러 종류의 연어가 많기도 많지만 2000년대 초부터 새롭게 추가된 레퍼토리가 있으니 바로 "(투표 안하는) 20대 개새끼"론이다. 물론 이들은 직접적으로 "개새끼"라는 원색적인 욕설을 쓰지 않으며 (오히려 "개새끼론"은 이러한 시각에 반발한 젊은 세대가 역으로 비아냥거리기 위해 스스로 지어낸 표현이란 점에서 역설적이다) 표면적이든 진심이든 '다 젊은 너희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라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깔때기는 결국은 한 곳으로 모아지는데, '정치가 이렇게 개판이고 나라꼴이 엉망인 이유는 (젊은) 너희가 투표(혹은 보다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불평할 자격도 없으니 닥치고 있어라'라는 내용의 다른 말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모두 "20대 개새끼론"으로 충분히 퉁칠 수 있다. 기성 세대의 이러한 인식은 정치 성향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발견되며, 외려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인사에게서 더욱 자주 발견되기도 한다. 일찍이 2003년 홍세화가 그랬고(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나꼼수'의 김용민이 그랬고(너희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88만원 세대>의 우석훈 또한 그랬다. (청년들이 싸우지 않아 실망했다) 이번 총선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역사학자 전우용, 장하성 교수, 이재명 성남시장(선거날 MT 가는 대학생들), 도올 김용옥(투표 안하는 젊은이들은 헬조선을 말할 자격이 없다)까지 누구든 젊은 세대를 훈계하지 않고 그냥은 못 넘어가는 것이다. (하물며 이전 선거에 있었던,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빈곤층이나 퇴근시간과 휴무일이 자유롭지 못한 서비스직 종사자를 위해 투표시간을 20시 등으로 연장하자는 논의 같은 것은 구경조차 할 수 없이 젊은이들만 투표 독려를 받는 것은 정말 기괴하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 매번 선거 때마다 검증된 실체도 제대로 된 레퍼런스도 없는 '20대 개새끼론'이나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20대 개새끼론'의 허구성은 미디어오늘이 잘 정리했다) 젊은 세대가 투표하러 가서 야당에 몰표를 줄 거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 되었으며(같은 세대 안에서도 성장환경, 학력, 지역, 소득 등 다양한 변인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균질하게 묶인다는 착각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지금의 젊은 세대는 최근의 어느 때보다 보수화 경향이 뚜렷하고, 이 모두를 떠나서 20-30대도 본인의 정치의식이나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여당을 지지할 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이 선거날 투표하지 않고 하루쯤 놀러 간다고 '헬조선'이 되어 살기 힘들어지는 게 현대 민주주의고 선거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어느 쪽이 뽑히든 미래 세대와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보다 이로운 공공성의 정치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세대 대결을 하기 위해 선거를 하는 것도 아닌 이상 말이다.

게다가 2030 청년이 언제 현실 정치의 전면에서 주인공으로 나선 적이 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총선 비례대표 후보의 평균 연령은 52.5세다. 40대 초반이 각각 총리와 하원의장을 하고 있는 캐나다나 미국, 33세의 교육부 장관이 있는 스웨덴과 비교해보면 한국 정치의 노령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그나마 지역구에서 후보로 내밀고 "흙수저"를 자처하고 있는 젊은 후보들은 알고 보니 저금이 2억원이 있다든지 하는 식이다. 재산이 많아도 젊은 세대를 위한 진보적인 정치를 펼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평범한 청년'들과 경험치가 비슷하다고 애써 위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스스로가 젊은 세대 일반에 대표성을 갖지 못한다고 느끼는 방증이다. 새누리와 더민주 기존의 양당에서도 청년 정책은 언제나 변죽만 울리는 곁다리일 뿐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이 청년 세대를 대하는 태도는 여야를 불문하고 잘해야 '청년=거수기'일 뿐이다. 그들은 청년 정치인을 이용할 뿐 중용한 적이 없다. 현실 정치가 이토록 철저하게 청년을 배제하고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시켜놓고 이제 와서 투표를 하지 않으면 "헬조선"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고 욕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정치 논의가 보다 높은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대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는 신호는 비단 청년세대의 문제에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선거 민주주의는 완벽과는 거리가 아주 먼, 불완전한 시스템이다. 민주주의란 다양한 목소리가 공공의 장으로 나와 갈등하고 존중 받는 사이에서 합의와 조화를 찾는 것일 텐데 우리는 지금 그저 '목소리 크고 쪽수 많은 놈들이 이기는' 다수결의 함정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계속 점검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가장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단연 '사표(死票)' 문제이다. 크고 작은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사표' 논란은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유권자 개인의 선택으로 투표를 했을 뿐인데, 그것으로 인해 표가 분산되어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대개는 새누리)의 당선을 막지 못했다는 비난은 당연히 부당하다.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같은 개혁적 군소정당들의 지지자들은 매번 더불어민주당 같은 (그나마 새누리당에게 대항할) '될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라고 '양보'를 강요 받는다. 선거는 한 표, 한 표가 정치권리의 직접 실현이라는 점에서 사표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의 간접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승자독식의 결과를 낳는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와 문재인의 득표율은 51.6% 대 48.0%, 고작 3.6%의 차이로 그 수는 108만표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108만표가 만들어낸 차이는 얼마나 거대한가. 작금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총체적 상황이 문재인을 찍은 1천 46만 명의 표심도 반영하고 있는가?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고 결정하여 그렇지 않은 쪽을 소외시키는 지금의 시스템은 분명 결과적으로 사표를 만들고 있고, 이렇게 왜곡된 표심은 대의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대표성을 훼손하고 있다.

그리고 사표뿐만이 아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민주주의를 위해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논의할 것은 넘쳐난다. 이를테면 다음의 것들- 지금의 선거구와 비례대표 할당이 다양한 계층, 직업, 세대 등 복잡한 인구통계학적 요소를 충분히 반영하여 대표성을 띠고 있는지? 50세 이상 유권자가 40세 미만보다 321만명이나 많아서 야기되는 정책적 쏠림 현상에 보완점은 있는지, 소수자 혐오표현이 선관위의 인가를 받은 공보물에 버젓이 등장해도 되는지, 의석 수를 많이 가진 정당이 투표 앞 번호를 차지하는 관례가 유권자를 게으르게 만들어 묻지마 투표를 조장하고 군소정당이 주목 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건 아닌지(하물며 스포츠에도 하위권 팀에 드래프트 우선순위를 준다) 등의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누가 '옥새'를 들고 도망갔는지 누가 '친박'으로도 모자란 '진박'인지 아닌지, 간을 봤는지 말았는지 등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나아가 대통령 한 명이 바뀌었다고 국가 전체의 기조가 요동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그렇다면 도대체 비대한 대통령제가 봉건국가의 왕정 시스템과 다른 것은 무엇인지, 대통령제도 내각제도 아닌 다른 새로운 길은 없는지, 정치체제의 진화와 발전에 대해서 끊임없이 모색하고 논의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알파고가 인류를 지배할 것을 걱정인가, 발전하지 못하는 후진 정치를 걱정인가.

우리는 더 좋은 정치를 가질 자격이 있다. 투표용지에 몇 번을 찍든, 심지어 투표를 하든 안 하든 가리지 않는, 지지하지 않은 사람과 투표하지 않은 사람까지 배려하는 공공의 정치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