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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7일 08시 2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27일 14시 12분 KST

나이 먹는 것도 실력

30년 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 화려했던 시절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옛날의 금잔디'형 인물들이다. 지나간 황금시대에 발목이 묶여 미래 기획에 별 관심이 없다. 예전 남다른 학습능력을 뽐내던 수재들이 스마트폰 사용법조차 배우려 들지 않는다. 채팅 앱을 쓰지 않으니 대화방에 끼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의 소통노력 부족을 통탄한다. 한편 몇몇은 여전히 어릴 적 상처를 이야기한다. 술만 마시면 살림살이를 깨부수고 처자식을 때리던 아버지나 대학에 보내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원망을 아직도 품고 있다. 나이 60이 넘어서도 유년기의 특정 트라우마를 되새김하고 있다니. 어찌 보면 '내 안의 우는 아이'를 보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은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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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씨와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나는 사이. 한때 동종업계 종사자였던 인연이다. 해물순두부 백반을 먹고 카페에 마주 앉자마자, 묵직한 비닐봉지를 내민다. 펴보니 붉은 고춧가루. 1kg은 될듯한데 색깔이 곱다.

"진짜 태양초에요. 마당에 널어 말렸거든요." 수줍은 듯 한쪽 눈을 쨍긋하지만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용인 너머 어느 골짜기 작은 집을 고쳐 지은 지 세 해째. 초짜라 작년 고추 농사를 망쳤다더니 올해 첫 수확한 귀한 고춧가루다. 말로는 "농사라고 내세울만한 게 없다"지만 줄창 농사 이야기를 쏟아낸다. 올 가을 가뭄이 심해서 고구마 맛이 제대로 들었다느니. 고구마 캐려고 줄기를 걷어내던 중 뱀 한 마리가 나와 엉겁결에 삽으로 찍어 뜻밖의 살생을 했다느니. 내년 고추밭엔 고랑마다 다른 품종의 모종을 심어야겠다느니.

신기하다. 아니, 신선하다. 내가 기억하는 직장시대 그녀의 얼굴엔 기미가 자욱했다. 눈 밑 다크 서클까지 달고 다녔다. 점심 모임에 오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직장 상사와 동료들의 불공정 행위를 규탄하기 바빴다. 마주 앉아 밥 먹는 게 때론 불편했다. 정년퇴직까지 버텨냈다는 게 전설이 됐을 정도니까.

그랬던 정미씨가 변했다. 20년 전에 사놓은 시골집을 작은 목조 주택으로 고쳐지은 후였다. 남편과 4도3촌 생활을 시작했다. 텃밭 농사에 불과한 규모지만, 한번도 해보지 못한 농사일이 '적성에 맞다'고 했다. 여름에는 상추, 깻잎이나 가지, 오이를 골고루 담은 지퍼백을 안겨주기 일쑤였다. 다크 서클은 간 데 없고 눈빛은 생기 넘쳤다.

정미씨 말고도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는 소그룹 사람들이 여럿 있다. 학연보다는 직장 관련 선후배, 또는 이런 저런 동네 인연이 발전한 결과다. 그들을 짧게는 10년, 길게는 30여년 관찰한 셈. 모두들 제각각의 모습으로 나이 먹어 간다.

30년 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 화려했던 시절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옛날의 금잔디'형 인물들이다. 지나간 황금시대에 발목이 묶여 미래 기획에 별 관심이 없다. 예전 남다른 학습능력을 뽐내던 수재들이 스마트폰 사용법조차 배우려 들지 않는다. 채팅 앱을 쓰지 않으니 대화방에 끼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의 소통노력 부족을 통탄한다.

한편 몇몇은 여전히 어릴 적 상처를 이야기한다. 술만 마시면 살림살이를 깨부수고 처자식을 때리던 아버지나 대학에 보내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원망을 아직도 품고 있다. 나이 60이 넘어서도 유년기의 특정 트라우마를 되새김하고 있다니. 어찌 보면 '내 안의 우는 아이'를 보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런 이들일수록 자신을 굳이 '피해자'와 '패배자'로 규정하려 든다. 그 '패배'를 어릴 적 상처 탓으로 돌리려는 걸까? 보기 민망하다.

성장 과정뿐 아니라 살아가는 날들 속 상처 받는 걸 피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어느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만회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실수나 실패를 겪기도 한다. 그렇지만 상처받은 우리에겐 자기치유 능력이 있지 않은가. 이건 자신을 안아주는 거다. 찌질하면 찌질한 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듬어 주는 것. 시간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20대의 뇌에 3도 화상을 입혔던 사랑마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리운 그림자로 남게 된다. 참기 어려운 상황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하루에 열 번씩 외칠 수도 있다. 내 경우, 이도 저도 안 되면 자포자기라는 최후 카드를 썼다. 실패를 인정하고 끙끙 앓았다. 그리고 느릿느릿 다시 일어났다.

큰 병을 겪은 이들의 태도는 다르다. 올 봄 항암 치료를 받던 중 병실 창 밖에 피어난 노랑 개나리의 아름다움에 전율하다가 어떤 '신비 체험'을 한 친구가 있다. 그 순간 평범한 하루하루가 엄청난 선물이라는 '깨달음'이 왔단다. 남편과 주위 사람들에게 불평 투성이로 살아온 게 얼마나 멍청한 시간 낭비였는지를 문득 알아차렸다는 거다. "큰 병을 얻은 건 내가 거기서 배워야 할 게 있었던 거야." 완쾌 판정까지는 4년이 남아있지만 그녀는 그냥 하루하루 재미지게 살자는 '명랑교'로 개종했다. 큰 병에 담긴 메시지를 잘 해독해 낸 성공 사례다.

가장 매력 있는 그룹은 뭔가 배우러 다니는 이들이다. 그들은 호기심을 잃지 않는다. 부지런하고 활기차다. '60 플러스' 그룹에게 가장 결핍된 게 무엇이겠는가. '새로움'이다. 앞으로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랄까. 배운다는 건 지금까지 몰랐던 세계와의 조우. 흥분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뇌가 긴장한다. 덕분에 치매예방 활동이 된다. 관심만 가지면 인문학 강좌도 있고 실사구시형 공부도 엄청 많다.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배울 건 천지!

배우러 다니는 게 취미인 친구 하나는 요즘 온갖 자격증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지난 2년간 딴 자격증만 해도 요양보호사, 베이비 마사지사, 수납정리전문가 등 다섯 가지가 넘는다. 관련 업체들의 콜이 오면 일을 나간다. 시급제든 일당제든 가리지 않는다. 예전 사무직 연봉과 비교 같은 건 아예 하지 않는다. 현장 경험이 자산이라 몸값이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자평이다. 이런 친구를 한 달마다 만나면 지루할 틈이 없다. 옛 직장 시절의 쓰디쓴 회고담 같은 게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그녀의 눈이 현재와 미래로 열려있는 덕분이다. 나도 그녀를 닮고 싶다.

정말이지 나이 먹는 건 자기 실력이다. 지난날의 영광이나 아픈 기억에 갇힐지, 내일로의 흥미진진한 여정을 계속할지는 각자 결정한다. 매달, 매년 그리고 십년 후 이십년 후, 그들과 그녀들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 마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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