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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6일 13시 07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16일 14시 12분 KST

어떤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은가

옛 직장 선배가 썼고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들'이란 부제를 갖고 있다. 선배의 아버지는 얼마 전 별세하셨다. 책은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들이 자신을 어떻게 성장시켰는지에 대한 고백이다. 초등학교 2학년 중퇴 학력인 아버지의 어록에는 주옥 같은 구절들로 가득하다.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있다. "역경(逆境) 속 인내는 누구나 하지만 순경(順境) 속 겸손은 아무나 못한다." 십 년 넘게 한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그 선배에게 여러 번 들었던 구절이다. 그런 멋진 경구를 날려주는 아버지를 가진 선배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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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두 권을 받았다. 그 중 한 권은 내 친구의 남편이 쓴 것으로 제목이 <아버지, 그 그리운 눈빛>이다. 놀랍게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무한 이가 써낸 책이라니. 글쓴이가 생후 15개월 될 무렵 42세였던 그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분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펴냈다는 추모집. 함경남도 단천에서 한국전쟁 중 월남한 아버지의 삶을 아들이 재구성했다는 게 예사롭지 않다.

그에게 아버지는 빛바랜 흑백 사진 속 형형한 눈빛으로 남아있는 분이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교사 출신. 1951년 그 유명한 '흥남 철수' 때 미군 수송선을 타고 거제도를 거쳐 충남 제천에 정착했다. 북에 아내를 남겨놓은 채 아들 손을 잡고 내려왔으나 다시는 고향 단천 땅을 밟지 못했다. 그 후 제천에서 초등학교 교장직을 맡았고 제천 처녀와 결혼해 낳은 둘째 아들이 바로 이 책의 저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권유로 어머니는 재가했다. 글쓴이는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자랐다. 세분의 작은 아버지들과 형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마다 '그 분'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갔다. 견딜 수 없는 그리움으로 그는 아버지를 기억할 방법을 고심했다. 좀 더 멀리 아버지의 행적을 수소문하고 친척들의 단편적인 회고를 녹취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책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는 왜 그렇게 아버지의 생애를 기록하고 싶었을까? 그건 그냥 "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단다. 자신의 두 아이를 놀이공원에 데려가고 장난감도 만들어 주는 아버지 노릇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는 거다. 아이들을 키우던 중, 또는 세상살이의 어느 지점에서 문득 "이럴 때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는 저자. 그의 아버지는 북에서 남으로 온 거의 모든 이들이 겪었던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냈다. 섬세한 판단력과 미래 기획능력으로 아버지는 숙부들의 직업 선택을 비롯한 온갖 대소사 결정의 중심에 계셨다. 교육에 집안 내 거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 것도 아버지였다. 그의 사후, 전씨 가문이 남쪽에서 이뤄낸 성취의 밑그림을 그린 분이 바로 아버지였음은 집안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부분이 됐다.

추모집 발간에 있어 기록의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저자. 그러나 뜻밖에 사진 합성이 눈에 띈다. "바로 지금 여기 아버지가 함께 계셨으면"하고 간절히 바랐던 순간들이다. 그 중 하나는 저자의 아들, 그러니까 아버지의 손주가 대학에 입학하던 날이다. 그 입학식 장면에 아버지의 얼굴을 합성해 넣었다.

책은 아들에 의해 복원된 아버지의 생애 다큐에 머물지 않는다. 책이 지닌 미덕은 또 있다. 20세기 중반, 함경남도 단천에서 거제도에 도착한 한국전쟁 난민 가족이 낯선 남쪽 땅에서 65년 동안 맨몸으로 부딪치며 일궈낸 삶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직계·방계 가족의 모습을 성실하게 기록했다. 관련 사진 자료도 곁들였다.

또 한 권의 책은 <밥상에서 세상으로>이다. 옛 직장 선배가 썼고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들'이란 부제를 갖고 있다. 선배의 아버지는 얼마 전 별세하셨다. 책은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들이 자신을 어떻게 성장시켰는지에 대한 고백이다. 초등학교 2학년 중퇴 학력인 아버지의 어록에는 주옥 같은 구절들로 가득하다.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있다. "역경(逆境) 속 인내는 누구나 하지만 순경(順境) 속 근신은 아무나 못한다." 십 년 넘게 한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그 선배에게 여러 번 들었던 구절이다. 그런 멋진 경구를 날려주는 아버지를 가진 선배가 부러웠다.

딸에게 준 구체적인 생활 지침도 많다. "너는 다리가 가늘어 검정색 스타킹을 신으면 불리하다. 다리를 더 가늘어 보이게 하니까."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되도록 그 남자가 오게 하고 만나는 장소는 네게 가까운 장소로 정해라. 긴 여행을 하는 쪽이 더 큰 열망을 갖게 된다." 이건 숫제 연애 코칭이다. 웃음이 터진다.

책을 읽은 다음 우리 집 최고의 독서공간인 화장실 책꽂이에 놔뒀다. 즉각적인 파급효과가 발생했다. 화장실을 나온 남편이 딸을 불러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빠가 네게 사과할 일이 있어." 딸이 놀라서 아버지를 쳐다봤다. "옛날 네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아빠가 네 장난감 바이올린을 압수했잖아. 그 때 아빠가 잘못했어. 늦었지만 사과한다."

추석인지 설인지 어느 명절, 친척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딸은 문방구점에서 평소 벼르던 장난감 바이올린을 샀다. 초등생으로선 너무 큰 돈을 태연하게 써버린 딸. 아빠는 화를 냈고 장난감 바이올린을 빼앗아 다락에 올려버렸다. "장난감 바이올린을 빼앗기 전에 조금 더 네게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했어. 왜 그렇게 큰돈을 함부로 쓰면 안 되는지를. 근데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 20 년도 더 지났지만 그 '사건'을 기억해 낸 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사과를 받아들인 거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그 책을 읽던 중 "자식들에게 잘못했을 때 정중하게 사과하라."는 선배 아버지의 말씀에 꽂혔다는 내 남편. 선배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식을 읽고 난 후 자신이 어떤 아버지로 기억될지,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 걸까. 좋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먼저 '어떤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은가'를 고심해야 한다. 내 짐작에 딸은 "별보기를 좋아한 아버지"로 기억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딸의 아버지 본인이 원하는 바일까. 그 이상을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뛰어야 한다. 물론 목표는 성취 가능해야겠지.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 '잘 웃는 사람,'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나도 남편이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도록, 그가 조금 더 괜찮은 인간이 되도록, 힘껏 도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