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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16일 11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16일 14시 12분 KST

아기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gettyimagesbank

분당에 사는 친정 언니가 맡아 키운 외손녀의 돌잔치 소식이 날아온다. 3주에 한번 꼴로 아기를 보러가지만 갈 때 마다 이모할머니인 내 걸음이 빨라진다. 돌쟁이답게 걸음마 진도를 나가는 게 얼마나 앙증맞은지. 잼잼이나 곤지곤지 같은 고전적인 재롱 뿐 아니라 오이 넣은 이유식을 먹을 때 입을 비쭉대는 장면까지, 아기의 '예쁜짓 모음' 동영상이 SNS 가족 채팅방에 수시로 올라온다. 모두들 열광한다. 한류 아이돌 스타가 따로 없을 지경.

아기는 나를 보자마자 살짝 찡그린다. 울지 말지 결정을 못하는 건가. 선뜻 품에 안아볼 엄두가 나지 않아 눈치를 본다. 낯가림이 심한 아기에겐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요령. 십 분 가량 아기 곁에서 우물쭈물하다보면 아기가 적응되어 슬그머니 다가온다. 아기 사진 전문 스튜디오 촬영 기사가 건네준 꿀 팁이란다.

아기 엄마와 아빠인 내 조카 부부는 일주일에 세 번씩 드나들며 아기를 만난다. 각각 서울과 일산에 있는 직장 때문에 신혼집을 서울 도심에 얻은 때문. 아기와 강제 별거하려니 애간장이 녹는 판이다. 주말에는 아예 2박3일로 친정집에서 함께 지낸다. 요즘 이유식을 왕성하게 먹는 아기 덕분에 외할머니는 바쁘다. 우유를 대폭 줄인 대신 브로콜리와 완두콩 등 소금 간을 하지 않은 채소를 잘게 썰고 쇠고기도 갈아서 밥에 끓여 먹인다나.

교사였던 언니는 퇴직 후 쌍둥이 남매를 결혼시킨 다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수채화와 우크렐레 레슨을 받고 수영으로 건강관리를 했다. 동창회 모임을 휩쓸고 다니며 종달새처럼 즐겁고 우아하게 놀았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 날 선언했다. 임신 중인 딸의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를 키우겠노라고. 황혼 육아라니, 이건 함부로 논평할 수 없는 사안이다. 각자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언니의 친구들은 모두들 '바보짓'이라며 뜯어 말렸다. 언니의 결심은 확고했다. 안과 전문의인 딸의 커리어를 힘껏 뒷바라지하고 싶다는 게 가장 절박한 동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두 번째로 엄마가 됐다. 베이비 시팅 교육훈련까지 받아가며 준비된 '할머니 엄마'의 탄생. 딸 낳은 여자는 건강관리를 잘해 오래 버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녀다. 딸에 대한 친정엄마의 A/S기간은 평생, 아니 종신이기 때문이라나.

아기의 태명은 '튼튼희.' 과연 아기는 튼튼하다. 잘 먹고 잘 웃고 잘 운다. 목욕을 좋아해 물속에서 텀벙거리는 게 취미다. 아기 목욕을 시킬 때는 언니와 형부가 2인 1조로 함께 움직인다. 출근하지 않거나 언니가 짧은 외출을 하는 날은 형부가 아기 담당이다. 아기의 예방 접종을 위한 병원 나들이도 동행한다. 30년 만에 언니와 형부 사이 육아 파트너쉽이 부활됐다고나 할까.

언니와 딸의 모녀관계는 최상이다. "딸의 딸을 키우다보니 내 딸을 다시 찾은 느낌"이란다. 엄마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니 딸의 애정 표현 수위가 갈수록 높아갈 수밖에. 사위는 거의 '입양한 내 아들' 수준으로 가까워졌다. 주말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도맡아 하며 '마당쇠 마인드'를 장착한 새 아들로 거듭나고 있단다. 아기 하나가 태어난 후 아기를 둘러싼 인간관계가 재정립되는 현상. 그야말로 아기만 모르는, 아기의 힘이다.

지난 1년 간 거의 '영어의 몸'이 된 언니를 만나러 나와 자매들은 언니네 집을 수시로 드나든다. 나는 주로 음식을 들고 간다. 된장찌개나 김치콩나물국을 끓여 간다. 요즘 언니가 매 끼니 새 음식을 만들 체력이 부족해진 듯 보여서다.

사실 언니의 건강은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체중이 계속 줄어들어 50kg이 안 된다. 하루 종일 아기와 씨름하느라 허리가 아프고 무릎은 쑤신다. 일주일에 세 번 수영을 다니며 체력관리를 하지만 역부족. 손목과 팔목의 시큰거림은 만성적인 통증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황혼 육아의 가장 큰 딜레마다. 아기가 주로 외할머니와 일 대 일 관계를 맺다보니 심리적으로 외할머니에게만 매달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 이건 핵가족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다행히 요즘 더욱 자주 드나들게 된 아기 엄마가 외할머니의 1위 서열을 위협하고 있어서 우리를 안심시킨다.

아기와 종일 함께 있게 된 언니의 사회생활 결핍증도 걱정스러웠던 부분. 자매들의 방문은 말하자면 황혼육아 우울증에 대처하는 활동이랄까. 육아의 가시적 성과를 칭송하는 한편 바깥세상 소식이나 중년여성계의 유머 시리즈를 퍼 나른다. 아기의 탄생으로 이모할머니라는 직함을 얻은 나와 친정 자매들의 당연한 직무 수행이다. 이모 할배가 된 내 남편은 아기에게 망원경으로 별 보여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아기는 머지않아 어린이집에 다니며 사회생활을 익힐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가족 내 사회생활이 아닐까. 직계 가족 뿐 아니라 방계 혈족으로 이뤄진 확대가족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체성도 아기가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라도록 도울 테니까.

예전 대가족 내에서 아기는 엄마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숙모, 이모, 고모, 사촌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랐다. 양육의 일차 책임은 엄마 아빠에게 있지만 대가족 모두가 은연중에 아기를 돌봤다. 대가족 내 구성원들과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자란 아기는 특정인물에 대한 정서적 집착이 덜하다니, 나름 큰 장점이 아닌가. "아기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다. 이제부터 나도 아기와 함께 조금씩 동네 한 바퀴 돌기나 옛날이야기 놀이를 해볼 참이다. 나뿐만 아니다. 아기와 친해지려는 아이디어들이 샘솟고 있다. 아기의 증조할머니 댁에서의 일박이일, 20대 당숙들과의 짜장면 점심 외출도 야심차게 추진할 놀이 계획의 일부다. 자신을 둘러싼 직계, 방계 가족과 우주적 인연의 그물망 속에 있는 존재로서의 즐거움을 아기가 듬뿍 누리며 자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