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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04일 13시 13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5월 04일 14시 12분 KST

우리 동네 위인전 | 미용실 원장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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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은 퍼머하는 날. 느릿느릿 동네 상가 지하의 미용실로 간다. 비 덕분에 예약 없이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 TV를 보고 있던 원장님이 반가워한다. 50대 후반의 그녀와는 15년 넘게 단골이다. 지난 넉 달 동안 제멋대로 자란 머리칼을 커트한 후 퍼머액을 바르고 롯드를 말기 시작한다. 지하상가 옆 가게인 반점의 짜장면을 주문해 함께 마주앉아 먹는다. 이제 그동안의 변화를 업데이트할 차례.

지난번 퍼머 때 보았던 수습 미용사의 행방을 물었다. 이야기가 길다는 대답. 30대 초반으로 몸이 민첩하고 말귀가 밝아 첫눈에 맘에 들었다고 했다. "오래 오래 있겠다"고 하도 노래를 부르길래 야무지게 가르쳐 볼 작정을 했다나.

커트 기술을 강도 높게 가르쳤다. 틈틈이 수습을 데리고 출퇴근길 지하철 2호선을 한 달 간 탔다. 20대, 30대 직장인의 헤어스타일에도 흐름이 있는 걸 현장 학습으로 가르키며 보였다. 지하철 2호선이 영등포 구간과 강남 구간을 통과하는 동안, '강남 스타일'의 대세도 볼 수 있게끔 훈련시켰다. 20여 년간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그 흐름들을 관찰하고 고객들의 헤어스타일에 반영해 온 만큼, 흐름을 읽고 적용하는 기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매번 지하철 승객 한 사람을 골라내 "저 분의 머리를 레저 커트에 무슨 스타일로 변형시켜보라"는 시뮬레이션 과제를 부여하기도 했다. 빡센 실습 한 달이 지나자, 수습미용사가 그만뒀다. "집이 너무 멀다"는 게 이유였다. "허무했지만 후회는 안 한다"고 했다. 어딜 가서든 그 젊은 친구가 한 달 교습 내용을 잘 활용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수습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더 많이 배운 것도 소득이란다.

그 후 다니던 교회 교양강좌에 자진해서 미용실습을 넣었다. 16명의 젊은이들이 몰렸다. 가발을 비롯한 실습 용품을 몽땅 지원했다. 매주 일요일은 커트와 퍼머 롯드 말기 훈련 시간. 공짜 강좌 수강생들의 열의에 강사가 더 신명이 났다. 5월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5천원씩 모아 8만원 봉투를 내밀었다. "완전 감동 먹었다"고 했다. 물론 어여쁜 제자들에게 밥 사주느라 돈은 두 배로 들었지만 말이다.

미용실의 후계 구도를 염두에 둬야할 시점이 다가온다. 2년 전에는 큰 아들을 후계로 점찍었다. 스포츠에 관심 많던 아들이 엄마의 미용기술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은근 기뻤던 원장님. 하지만 운동하다 허리를 다친 아들의 손은 크고 투박해 섬세한 미용 기술 연마에 별 도움이 안 됐다. 아들의 과묵한 성격도 주로 여성 고객들을 상대하는 서비스 직종에 살짝 부적합 판정. 엄마와 아들은 거의 동시에 세습 후계 프로그램을 작파하기로 결정했단다. 하고 싶은 건 꼭 한 번 해보지만 잘 안되면 그만일 뿐, 미련 없이 물러나는 성격 덕분이다.

요즘 원장님의 관심사는 미용실을 벗어난다. 제1순위는 성악. 교회 성가대에서 소프라노로 활동한 게 본격적인 성악 레슨에 동기를 부여했다. 전문가에게 일주일 한 번 보컬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K-Pop Star'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다. 참가자들의 노래실력에 비춰 자신의 기량을 점검했다. '다시보기'를 반복하며 배울 점과 고칠 점을 찾았다. 박진영씨 등 심사위원단의 예리한 평가에 감탄, 또 감탄을 했단다. "참가자들뿐 아니라 시청자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멘트가 'K-Pop Star' 프로그램의 백미"라는 극찬이다. 3년 넘게 성악 공부는 계속되고 있다.

배우고 싶은 건 그 외에도 많단다. 피아노, 기타에 하모니카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하늘을 찌른다. 아침마다 거르지 않는 수영 시간에는 배영이 뜻대로 잘 안 돼 고민이기도 하다.

일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 하나는 심야 영화. 토요일 밤 9시경 미용실 문을 닫은 후 저녁을 느긋하게 먹고 혼자서 또는 가족과 함께 심야 극장을 찾는다. 주로 화제작을 고르지만 액션, 로맨틱 코미디, 멜로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일주일의 무게를 극장 의자 등받이에 내려놓고, 영화 한 편을 때린 후 극장 문을 나설 때 만나는 밤 공기야말로 "바로 그 맛!" 이란다.

지금의 노동 강도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는 원장님도 모른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제 길을 찾아가게 돼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냥 밀고 나갈 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생각이 요즘 부쩍 많이 든단다. 어린 시절 막내딸을 언제나 믿어 주고 팍팍 밀어주셨던 아버지. 그래서 언제든 중요한 선택을 할 때 그녀에게 맨 먼저 떠오르는 분이 됐단다.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곰곰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무한 신뢰를 받고 자란 딸들이 알게 모르게 지닌 자신감을 뿜어낸다.

중화제를 바르고 20분이 지난다. 롯드를 풀고 샴푸를 한다. 머리를 살짝 드라이기로 말린 후 머리 모양을 잡아준다. 아, 시원하다! 5년 만에 최근 만원을 올린 퍼머 값은 6만원. "퍼머가 진짜 잘 나왔네요." 원장님의 인사를 뒤로 하고 미용실을 나온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제 자리에서 손님을 반기는 그녀! 평범함과 비범함의 황금 배합이 그녀에게 있다. 우리 동네 위인전 1순위에 올려 마땅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