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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6일 11시 12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2월 09일 07시 08분 KST

유럽에서는 이렇게 HIV를 예방, 치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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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유럽권 국가의 HIV 예방 및 치료 흐름과 PrEP(노출 전 예방법)

필자는 현재 영국에 사는 재외국민으로, 수년간 PL(People live with HIV)로서 생활하고 있다. (2017년 12월 현재) 유럽 및 영어권에서 HIV 이슈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한국과는 어떻게 다른지 경험담과 소개글을 쓰고자 한다. (신상정보에 관한 몇 가지 디테일은 약간의 각색을 거쳤습니다.)

1. PL로서의 경험담

나는 내가 처음으로 HIV를 심각하게 의심했던 순간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한다. '왜 이렇게 컨디션이 안 좋지?'에서부터 출발한 의문은 '컨디션이 안 좋을 이유가 없다'는 불안감으로, '이거 혹시 말로만 듣던...'이라는 걱정으로 이어져 나는 급기야 클리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담당의는 환절기라 몸살 환자가 많이 온다며, 응급기준을 상향해야겠다는 농담을 하고는 나를 대수롭잖게 그 중 하나로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내 몸을 꽤 잘 알고 있다. 평소처럼 살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컨디션이 나빠질 리 없다. 적어도 몸에 대한 이 직감이 지금까지 나를 배신한 적은 없었기에, 나는 혈액 검사를 부탁했다. 내가 MSM(Men who have Sex with Men)이며 이 증상은 급성 HIV 감염 신드롬인 것 같다고 했고, 의사는 항체 검사를 준비해주었다. 20분 후 음성 결과지를 받아든 나는 이내 창기간( HIV 감염 후부터 HIV 감염의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기간-Window Period)을 의심했다.

이전엔 내가 HIV에 걸릴 거란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고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주워듣게 되는 것은 있었다. HIV에는 12주의 창기간이 있고, 급성 HIV 신드롬은 주로 창기간 중에 발생했다가 자연적으로 없어지며, 그 이후로는 증상 없는 보균자가 된다는 따위의 정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창기간이 최대한 짧은 다른 검사를 구글링했고, 'RT-PCR 검사'라는 것을 받아서 내가 HIV에 걸린 것이 아님을 확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내가 의사의 소견을 무시하면서까지 '더 정확한 검사'에 집착했는지, 그 까닭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그 무서운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그래서 나는 안전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는 확신. 나는 성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솔로였고, 내가 있는 곳은 이역만리 외국 땅이었다. 안이하게 넘어갔다가는 뉴스에 나오는 'HIV epidemic'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자세하게 상황을 분석할 여유는 없었지만, 덜컥 겁이 났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100퍼센트에 가까운 '안전 선언'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성매개 질환을 전문으로 하는 클리닉을 예약하고, 받고 싶은 검사를 말하며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를 말하자면, 최신 선별 검사(4세대 항원항체 검사)에서는 '확진 불가'가 나왔고 문제의 PCR 검사(Polymerase Chain Reaction, 중합효소 연쇄 반응의 약자로 병원에서는 세균의 DNA를 이용하여 유전자를 증폭하여 세균 감염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의 일종)에서 나온 바이러스 수치는 무려 1ml당 200만에 육박했다. 보통 무증상기에 검사를 받아 확진되고 처음 PCR 검사를 하게 되면 1ml당 2만 정도의 수치가 나온다고 하니, 내 멘탈리티는 이 시점에서 이미 온전치 않았다. 묘사하자면, 수없이 많은 물음표들이 어깨 위로 턱턱 얹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약을 먹으면 괜찮다는데, 혹시 내가 무슨 특이한 케이스라서 약이 안 들으면 어떡하지? 괜찮다는 건 정확히 뭐가 괜찮다는 거지? 혹시 무슨 치명적인 부작용만 없는 거고 사실은 엄청 불편하면 어떡하지? 진짜 안 걸린 사람들하고 아무런 차이가 없을까? 그걸 어떻게 믿어? 그 사람들이 걸려보고 하는 말은 아니잖아? 나는 도대체 누구한테 옮은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의심할 만한 위험 관계가 없는데? 콘돔을 안 좋은 걸 썼던가? 나 그럼 이젠 섹스 못하는 건가? 혹시 나랑 섹스할 사람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떡하지? 바이러스가 200만이나 되면 그냥 보통의 감염인보다도 100배나 더 위험하다는 거 아냐? 여드름 짜서 피라도 나오면 그거 만진 사람한테 옮지 않을까? 소변이나 침에는 거의 바이러스가 없다지만 나는 100배나 위험한 사람이니까 그것도 장담 못 하는 거 아닐까?

내게 소견을 말해준 담당의는, 모든 검사에서 다 양성이 나오기 전까지는 확진을 보류하겠다며 다음 예약을 잡아주었다. 클리닉을 나와 당시에 살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물음표들에 짓눌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거의 매일 자위를 했고 성적으로는 활발한 편이었는데, 그 날 이후 2주 정도 무슨 수를 써도 발기가 되지 않았다. 성적 즐거움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치료가 쉽다느니, 만성질환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내 문제가 되고 보니 그 말들의 무게는 깃털 같았고 '섹스하면 옮는다', '못 고친다'는 두 문장만이 천근의 무게를 가지고 나를 억눌렀다. 내 몸에서 나온 모든 것이 독처럼 느껴졌다. 여드름을 짠 물티슈를 보면 '저 안에 바이러스가 득실득실하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치질을 하다 잇몸에서 피가 나도 무서웠고 혹시 누가 만질까봐 세면대를 구석구석 닦아야 했다. 소변을 보다 한두 방울 튀는 것도 신경이 쓰였고 면도도 시원하게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체액이라는 건 정말 흔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이 더럽게 느껴졌다.

잊어야 했다. 계속 저 물음표들에 눌려서 살 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그것은 성공적이어서, 대부분의 시간은 HIV를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생각을 쉬지 않는 연습을 하면서 자꾸 다른 일거리를 찾았다.

다음 예약일이 다가와 클리닉에 방문했을 때, 나는 확진을 받았다. 이전에는 검사결과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면 클리닉 스태프들의 태도는 정말 존경할 만했다. 내가 패닉을 일으킬 것을 예상한 것처럼 모든 것을 물 흐르듯 처리해주었고 내 몸을 만질 때 조심하는 듯한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 태도로 내게 어떤 문장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그렇게 대단한 병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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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럽권 국가의 HIV 예방 및 치료법

확진이 나오고 바이러스 유전형 검사, 약물 내성과 알레르기 검사 및 합병증 체크를 위한 대량(시험관 11개 분량)의 피를 뽑은 뒤 클리닉에서 귀가했을 때, 나는 이 병의 실체를 낱낱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걸리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교양삼아 알고 있던 HIV 관련 지식들이 극히 일반적인 것들이며, 어찌 보면 비감염인만을 위한 정보들이라는 생각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이니, 객관적인 정보를 내 몸에 맞게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논문, 의학저널, 감염인 기초 상식 등 인터넷으로 접근 가능한 모든 자료를 읽고 비교분석해서 정리했다. 약의 종류는 무엇이며, 어떤 치료법이 새로 나왔는지는 한국어 자료로도 찾을 수 있었지만, 한국어로 된 교양상식 류의 HIV 지식들은 쓸모없거나 지나치게 일반적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 중에 내가 찾은 정보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HIV 감염의 성공률(감염 확률)에 관한 자료는 지나치게 일반적이다. 항문성교시 콘돔을 쓰지 않고 체내에 사정했을 경우 3~5%라고 하는데, 이것은 개별 감염인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숫자이다. (콘돔을 착용하지 않고, 한쪽이 급성 HIV 감염 상태이며, 그가 탑 포지션에서 체내에 사정할 경우 HIV 감염 확률은 1회 성관계에서 약 10~68%까지 오른다. 이와 대조적으로, 감염인 쪽에서 꾸준히 바이러스 억제 치료를 받아 현재 상태가 '미검출'일 경우에는 수혈을 제외한 그 어떤 위험 성관계를 하더라도 감염의 성사율은 실질적으로 0%이다. 이는 후술할 U=U 공식에 의거하여 밝혀진 사실이다.) 더구나 감염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저 낮은 확률을 뚫고 걸렸다니 난 얼마나 문란하게 성생활을 했길래' 따위의 불필요한 죄의식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일반적인 감염률이 어떠하다는 정보는 비감염인을 안심시키는 목적으로만 유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만약 위기의식을 가진 비감염인이라면, 3~5%의 확률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콘돔과 PrEP 등으로 충분한 예방조치를 취할 일이다.

2) HIV 치료제에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과거 지도뷰딘(AZT)이나 디다노신(ddl) 수준의 위험한 부작용을 지닌 약제는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현재 일반적으로 처방되는 젠보야나 트리멕, 이센트레스 등의 약을 먹게 되면 불면증, 무기력감, 골밀도 저하, 신장기능 약화, 간수치 증가, 피부트러블, 말초신경병증, 지방재배치 증후군 등의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나를 포함한 감염인들이 치료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겪는 것은 불면증과 얼굴 피부의 트러블 및 근육/관절 이상증이며, 평생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볍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3) 콘돔이 HIV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일부만 사실이다. 실제로 콘돔을 사용하는 성관계 관찰 실험에서 '이론적으로 완벽한' 수준으로 착용하고 섹스하는 경우가 70%를 밑도는 수준이었고, 그 70% 안에서 HIV가 전염되는 경우도 보고된 바 있다. 소위 '실험실 섹스'를 하면 99%까지는 예방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드문 편이다. 예방책으로서는 이후에 소개할 PrEP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구글을 뒤지고 다니면 다닐수록, 한국어로 된 HIV 일반정보들은 HIV 혐오를 조장하거나, 단순히 비감염인의 공포를 덜기 위한 목적에 따른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국에 감염인의 비율 자체가 매우 낮은 편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감염인의 입장에서는 난감할 따름이다.

보통 HIV 양성임을 확진하고 나면 최적의 약을 처방하기 위해 바이러스의 상태를 자세하게 검사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증상이 확정적이고 매우 심각한 상태가 아닌 이상 첫 양성 결과를 받고 나서 약을 손에 넣기까지 적어도 한 달 정도가 걸린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온갖 끔찍한 상상들을 해야 했다. 나는 내가 이 병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보다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증오했기 때문에, 내 상태가 '전염 가능'인 채로는 일상생활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약을 받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내 몸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소위 몸에 좋다고 하는 영양소들을 챙겨 먹고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자료를 찾아보면서 알게 된 것인데, HIV 환자들은 체내의 셀레늄 소모량이 비감염인에 비해 매우 높고 만성적인 셀레늄 부족증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또한 당시에 셀레늄이 '항레트로바이러스 약제와 동등한 수준'의 바이러스 억제 효능을 가지고 있다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해서, 멀티비타민과 셀레늄을 중심으로 영양을 챙겼다. 그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약을 받기 직전에 검사했던 바이러스 수치는 무증상기 감염인 평균의 1/20 수준인 1000대까지 떨어졌다. 나는 이 놀라운 결과에 고무되어,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까지 열심히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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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출 전 예방법(PrEP)

영국으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노출 전 예방법(Pre-Exposure Prophylaxis, PrEP, 이하 프렙)'이라는 것을 들어보기는 했다. HIV에 대응하는 칵테일 치료제(ART) 중 하나, 구체적으로 트루바다(Truvada)를 꾸준히 복용하면, HIV 바이러스와 접촉한다 해도 감염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프렙을 해서 바이러스를 막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대충 자료를 훑어본 것이었지만, 이제는 나와 섹스할 상대방에게 권할 목적으로 프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탐독했다. 내가 확진을 받던 당시에는 제네릭(복제약)이란 것도 없었고, 트루바다가 배타적인 특허권을 행사하던 때라 접근이 매우 어려웠으며, 의사들이 처방도 잘 해주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집에 프렙을 위한 약을 준비해두고 섹스할 일이 있으면 파트너에게 권하는 편이다. 당시에 자료를 찾으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1~2년 만에 완전히 패러다임이 바뀔 정도로 HIV/AIDS에 대한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생각날 때마다 다시 구글링을 통해 최신 자료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을 정도이다. 2015년경 영국에서 처방전 없이 프렙을 구매할 수 있도록 허가가 나오고 국립 의료시스템의 인증을 거친 온라인 판매 사이트가 열렸을 때, 나는 환성을 질렀다.

나는 HIV에 관련된 수많은 논문들과 자료 중에서도, 특히 프렙에 주목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프렙이 아주 혁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감염인들이 HIV 약을 챙겨먹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감염인과의 중요한 차이를 하나 없앰으로써 HIV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꾸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비록 비감염인 쪽의 부담이 더 적다고는 하나, 활발하게 섹스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약을 챙겨먹는다면 누군가가 HIV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 영국을 위시한 유럽 국가의 HIV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발전된 수준이다. 멀쩡한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약(감염인이라면 추가적인 약을 좀 더 먹긴 하지만)을 꾸준히 챙겨먹기만 하면 공포에 휩싸일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꽤 널리 퍼져 있다. 정기적인 성병 검사를 전문으로 하는 클리닉은 연일 사람들로 북적이고, 수요가 많아 계속 증설되고 있다. 이것은 클리닉에서 접한 말인데, 도움이 되었기에 소개한다: "성병을 피하려는 노력은 절대화될 수 없다. 확률을 낮추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섹스를 활발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병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다. (비단 HIV만의 문제는 아니다.) 당신이 아직까지 성병에 걸리지 않은 것은 회피하려는 노력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운이 좋기 때문이다. 확률에 건강을 맡기거나, 운이 나쁜 사람을 문란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정기적인 검사로 건강을 체크하고 빠르게 대처하며, 환자에게 도덕적 가치를 들이대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인증을 거친 온라인 프렙 사이트 덕분에, 2016년 말을 기준으로 한 영국의 신규 HIV 감염자수 추이는 전년 대비 40% 감소했다. 이런 인식 속에서 살다 보니, 가끔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스스로 위축되는 것을 느낄 지경이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프렙을 상용화하기 위해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는 모양인데, 영국에서 통용되는 가이드라인 중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들을 공유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1) 프렙을 권하는 대상에 대한 가이드라인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HIV 음성이며 남성과 섹스하는 남성(MSM), 특히 고정된 성 파트너가 없는 사람. 직업 성 노동자. 고정된 성 파트너가 있고 그 사람이 HIV 감염인인 사람. 콘돔에 대한 불안감이 있거나 사용할 수 없다고 응답하는 사람.

2) 프렙을 권하지 말아야 할 대상에 대한 부분은 더욱 흥미롭다. 고정된 성 파트너가 있고 그 사람이 HIV 감염인인 경우에도 그가 정기적으로 치료받고 바이러스 수치가 미검출(Undetectable)을 유지하고 있다면 비감염인 파트너에게는 프렙을 권할 수 없다. 미검출자에게서는 HIV를 옮아올 수 없음이 명백하며(이것은 후술할 U=U에 힘입은 바가 크다), 파트너에 대한 과한 불안감을 줄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3) 프렙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권장되며, 시작하기 전에 간수치와 크레아티닌 청소율(Creatinine Clearance), HIV 감염 여부를 면밀히 체크해야 한다. B형 간염 등에 걸려 간수치가 높은 상태이거나 크레아티닌 청소율이 60ml/분 이하인 경우에는 경미한 부작용을 겪을 우려가 있어 프렙을 권할 수 없다.

4) 프렙의 복용 방법은 복용자와 상황에 따라 크게 4가지가 있다. 1일 1회 매일 복용, 격일 1회 복용, 기간 설정 복용, 필요시 복용이 그것들이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프렙과의 상호작용이 활발한 경향이 있어 격일로 1회를 복용해도 매일 복용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예방효과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보통 투여한 지 1주일이 지나면 약물이 혈액 속에 충분히 분포하는 것으로 판단하므로, 특정 기간을 설정해서 약을 복용할 경우에는 기간의 시작점으로부터 1주일 이전, 그리고 기간이 끝난 후 1주일 뒤까지 매일 복용하고 프렙을 중단해도 상관없다.

5) '필요시 복용'은 더욱 혁신적인데, 성관계가 언제 있을지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경우 해당 관계 2~24시간 전에 프렙을 2알 복용하고 이후 24시간 간격으로 한 알씩 이틀간 추가로 복용하면 충분한 수준의 감염 예방 효과를 얻을 수 있다.

6) 프렙이 처음 소개된 지도 5년이 훌쩍 지나면서, 예방효과를 얼마만큼 기대할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와 실험도 많이 이루어졌다. 가장 유명한 두 번의 임상에서 프렙의 예방효과는 각각 83%, 100%로 드러났으며, 83% 케이스에서 예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17%의 세부사항은 '트루바다 약제에 대하여 내성을 가진 HIV와 접촉한 경우',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고 위증한 뒤 사실은 복용하지 않은 상태로 HIV와 접촉한 경우'로 나타났다. (참고로 트루바다 약제 내성을 가진 HIV는 전체의 1%가 채 되지 않는다.) 즉, 복용량을 준수한다는 전제 하에 프렙을 복용하면서도 HIV에 감염될 확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셈이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프렙이 보급되면서, 나는 프렙의 복용 대상이 아니지만 상대에게 프렙을 권하는 일은 꽤 자주 생겼다. 한국 사람들은 약 그 자체에 대한 저항감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내 경우엔 상대에게 FDA 이야기나 프렙의 효과에 대한 설명을 거치면 보통은 OK를 받고 사용하곤 했다. 주변에서 먹는 경우를 많이 접하는지, '이거 비싼 거 아냐? 약값 줘야 해?' 류의 반응은 있었지만 '독성 있는 거 아냐?' 같은 반응은 거의 없었다.

프렙이 상용화되면서 HIV에 대한 서구의 인식이 상당히 개선되긴 했지만, 심지어 그 프렙조차도 최근에 밝혀진 'U=U'(Undetectable = Untransmittable)라는 공식이 가지는 의미에 비하면 빛이 바랜다. HIV를 치료하고 있는 환자가 바이러스를 미검출 수준으로 낮게 유지하면 타인에게 전파시킬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주장 자체는 꽤 오래전(2000년대 초반)부터 있었다. 올 9월에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서 받아들인 결론은 그 주장에 입각한 연구가 확실한 성과를 내었다는 방증이다. 누적 실험건수 7만 건 이상의 모집단에서, 바이러스 미검출까지 치료한 HIV 감염인이 비감염인에게 자신의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데 성공한 케이스가 '0'으로 집계되었다. 이 결과가 보여주는 바에 따라, CDC에서는 바이러스 수치가 1ml당 200개 미만인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감염인은 바이러스 전파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면서 '감염방지 수단으로서의 치료(Treatment as Prevention, TasP)'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HIV 양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의 굴레다.

무차별적으로 퍼져 인명을 희생시키는 악마의 불치병은 옛말이 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이러한 '옛말됨'은 대중이 변화를 널리 인식할 때에 비로소 성립한다. 아프리카에서 창궐하는 HIV-2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를지 모르지만, 영미권의 동성애자 집단에 퍼져 온갖 비극을 연출한 HIV/AIDS는 날이 갈수록 확실하게 극복되고 있다. 어쩌면 의료기술의 발전(완치 수단의 발견과 보급)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대중의 공포감과 혐오감을 해소하는 일일지 모른다. 대부분의 HIV 감염인들이 설문조사에서 '병의 증상이나 건강의 문제보다도 부당한 사회적 시선과 차별이 더 괴롭다'고 응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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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국에서는 HIV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지나치게 심하고, 환자를 실명등록 하도록 유도하여 관리하는 제도에 대한 저항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아가 'HIV 감염 사실을 아는 환자가 고의로 위험한 성접촉을 했을 경우 형사처벌'하는 법(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19조 전파매개행위 금지 조항)까지 있어, '걸리면 인생 망하는 거다' 따위의 인식이 매우 보편적으로 상식화되어 있다. 그 때문에 '걸렸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지 않다, 설령 걸렸더라도 내가 모르고 있어야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모습도 본 적이 있는데, 이것은 환자 개인의 건강 차원에서도 문제이지만 공공보건의 측면에서도 매우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검진과 치료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에게는 프렙도 U=U 공식도 소용이 없고, HIV는 그들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 있다. (검사 없이 HIV에 이미 감염된 사람이 프렙을 복용할 경우 불완전한 치료로 인해 약제 내성 HIV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프렙의 효과 자체가 거시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감염인과 비감염인, 검사에 불응하는 사람 모두를 위한 HIV 건강정보가 시급히 보급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많은 수의 감염인들은 '비감염인과 별 차이 없이' 살고 있다. 병이 나의 삶에 미친 영향이 작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 어두운 감정에서 벗어나려 애쓰다 보니 정신적 타격은 시간이 갈수록 아물어가는 것을 느낀다. 모쪼록 이 글이 초진 감염인들에게 한 줌 유용한 정보로 쓰이길 바라며, 비감염인들도 이 글에서 쓸모있는 예방책과 HIV 지식을 얻어 막연한 감정적 공포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을 받았으면 싶다.

* 위 글의 참고자료들은 원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글 | 지로

(https://chingusai.net/xe/index.php?mid=newsletter&category=514437&document_srl=514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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