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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19일 11시 4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19일 11시 41분 KST

헌법에 어울리는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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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현행 헌법의 경제 항목인 제9장 제127조 1항이다. 평범하고 익숙하게 들리는 이 문장을 지워버리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는 헌법에서 거의 유일하게 과학기술을 언급하고 있는 이 조항을 삭제하자고 주장한다. 문장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없애자는 것이다. 뭐가 문제라는 얘기인가?

과학기술이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해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현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닐 테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창조경제'를 거쳐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은 경제와 이어진 끈을 통해 예산을 배정받고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ESC의 주장은 과학기술이 경제 분야를 다루는 헌법 제9장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로 국한되는 과학기술은 대한민국의 근간을 천명하는 헌법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개헌 논의에 나선 과학기술인들의 생각이다.

헌법에 어울리는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헌법 개정 논의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된 지금, 헌법 안에서 과학기술이 맡아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경제발전이 전부가 아니라면 과학기술은 또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는 과학기술의 헌법적 가치를 묻는 말들이다.

과학은 단지 복잡한 이론과 수식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을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을 확인한다. 과학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헌법 제3조)의 환경을 탐구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생물과 무생물을 파악하고,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구와 또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일깨워준다. 미세먼지에서 블랙홀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하고 그 지식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존엄한 존재가 된다. 또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온갖 존재와 관계의 양상을 규명함으로써 과학은 이 땅에 있는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과학을 통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화롭고, 건강하게 살 권리를 가진 존재임을 몇번이고 반복해서 확인한다.

future technology

기술은 단지 신기한 제품과 서비스 모음이 아니다. 기술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구현하고 인간의 조건을 향상한다. 기술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어디서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물질적인 토대를 만들어준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음을, 특히 모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음을 믿는다. 이는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기술의 혜택이 "성별, 종교, 인종, 언어, 출신지역, 장애, 나이, 성적 지향, 학력, 사상, 정치적 의견, 사회적 신분"(국가인권위원회 헌법개정안)에 관계없이 골고루 돌아가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라는 뜻이다. 상하수도에서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술을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만들고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대한민국을 모든 이에게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인간의 존엄을 확인하고 인간의 조건을 향상하는 과학기술. 헌법에 담을 만하고, 헌법에 어울리는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의 수단에 그치지 않고 더 보편적인 지향을 가진 인간적 행위이다. 헌법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자리를 재고하자는 주장은 단지 과학기술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과학기술을 통해서 현재의 상태를 성찰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으며, 과학기술도 한국 사회를 통해서 그 보편적인 가치를 확인하고 실현할 수 있음을 인정하자는 제안이다.

"국가는 학술 활동과 기초 연구를 장려할 의무가 있다." ESC가 제127조 1항을 삭제하면서 새로 집어넣자고 제시하는 조문에는 '과학기술'이라는 단어가 없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신설 조문을 '제9장 경제'가 아니라 '제1장 총강'에 두자는 제안이다. 헌법 총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든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같은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선언을 적어놓은 곳이다. 그러므로 이 제안은 과학기술의 기본을 되찾고 그 헌법적 의의를 다시 생각하자는 뜻이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이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는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과학기술을 민주공화국을 '구성'하는 '원리'로 삼자는 것이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