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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05일 06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7월 05일 14시 12분 KST

서울운동장을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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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영국발 뉴스 한꼭지가 눈길을 끌었다. 유명한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가 프리미어리그 경기장에서 음식을 판다는 내용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했는데 그를 영입하는 데 맨체스터씨티 구단이 제시한 돈이 자그마치 100억원! 자못 충격적인 액수였다. 그 돈이면 우리나라 프로축구단 하나를 사고도 남을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이란 경기장에서 파는 음식 메뉴를 짜는 것이란다. 튀긴 닭과 맛없는 핫도그 정도를 생각해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입이 떡 벌어질 아이디어였다. 미디엄레어의 스테이크 쌘드위치, 어머니 솜씨의 파이 같은 걸 판다는데, 이미 그런 음식을 먹으러 경기장에 가보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100억원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모양이다. 알다시피 프리미어 경기장 입장권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장 싼 표도 4~5만원 이상 가는 경우가 흔하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첼시 같은 인기 구단의 로열석 연간권은 암거래 가격이 1천만원을 넘기도 한다. 그러니 제이미 올리버에게 준 돈이 아깝지 않을 수도 있다.

일본에 가서 운동경기를 보면 두가지 재미가 있다. 하나는 도시락이다. 밖에서 사가는 게 좋지만, 경기장에서 파는 것도 제법 먹을 만하다. 일본 편의점 초밥이 웬만한 우리 일식당보다 낫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 그네들 도시락 수준이 짐작이 간다. 경기장에서 뭘 먹는 이야기 중에 인상 깊은 만화가 있다. 타니구찌 지로오.쿠스미 마사유끼의 『고독한 미식가』(이숲 2010)라는 걸작이다. 만화로는 한권짜리가 고작인데, 이게 인기를 끌어서 텔레비전 씨리즈로 제작되기도 했다. 엄청나게 더운 날, 주인공이 조카가 투수로 나오는 고교야구 경기를 보는 장면이다. 그저 매운 카레 도시락을 먹고, 땀을 뻘뻘 흘리며 조카를 맹목적으로 응원하는, 어떻게 보면 컬트 같은 희한한 만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장면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나도 한때 관중이 거의 없는 시시한 경기를 보면서 그렇게 뭔가를 먹는 게 취미였던 까닭일까.

일본의 경기장에서 도시락 말고 또다른 재미는 생맥주다. 캔맥주도 얼씨구나 언감생심인 우리들로서는 생맥주라니, 얼마나 호사인가. 그런데 이걸 시켜 먹는 재미가 있다. 등에 마치 석유통 같은 걸 지고 모자 쓴 아가씨가 '나마비루(생맥주)!'를 외치고 다닌다. 그러면 불러서 마시면 된다. 등에 짊어진 맥주통에 연결된 호스를 종이컵이나 투명한 플라스틱컵에 따른다. 내 경우 종이컵을 주면 일단 기분이 좋지 않다. 우선 시각적으로 보기 싫을 뿐 아니라 맥주에 거품이 너무 많아 정량(?)보다 적게 받게 되기 때문이다. 종이컵에는 안쪽으로 얇게 비닐 코팅이 되어 있는데, 이것 때문에 거품이 많이 생긴다. 병맥주를 마실 때 종이컵을 쓰면 따르기가 불편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불편하고 말면 그만이지만, 생맥주일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평소엔 생맥주에 거품이 있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던 내가 이 경우에는 지나친 거품 때문에 다시 입에 게거품을 물게 된다. 물론 실제로는 일본어를 못해서 거품 물 일은 없다. 그저 거품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시 더 채워주기를 호소하는 눈빛을 보내는 게 전부다. 그렇게 친절한 생맥주 아가씨지만, 이때는 여지없이 '나마비루.'하면서 사라져버린다. 하기는 나와 실랑이할 틈이 없다. 다른 손님들이 연신 아가씨를 불러대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잔에 600엔이 넘는 걸 말이다. 환율이 셀 때는 한잔 값이 1만원을 호가했다. 일본인들의 맥주 사랑은 정말 대단하다. 두어시간짜리 경기를 보면서 생맥주를 대여섯잔이나 마시는 사람도 있다. 기차간에서도 도시락을 안고 식전주로 캔맥주를 따라 마시는 일본인들은 아주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보인다. 음미하듯, 천천히 목울대를 흔들며 맥주를 흘려넣는 일본인들.

일본인들이 한 경기에 생맥주를 대여섯잔이나 마신다고 투덜거렸지만, 나야말로 맥주홀릭이라 경기장에서 과음하게 된다. 맛없는 캔맥주라도 마시는 게 어디냐, 이러면서 흠흠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한때 경기장 폭력이 문제되자 맥주 판매를 금지했다. 그러고선 노래방에서 파는 맥주 맛 음료를 팔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걸 마시고 야구장 삼루 쪽의 안전그물망에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경기장에만 가면 꼭 술을 찾는 이들이 있다. 평소에는 소심한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경기장에서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극성 팬들 때문에 야구경기장에서 외야수가 헬멧을 쓰고 수비하는 건 정말 코미디다. 그런 장면이 일상다반사인 수준은 벗어난 듯하지만, 아직도 경기장 들어갈 때 짐 검사를 하는 걸 보면 참 대단하다. 경기장의 '짐 뒤짐'의 경우, 서양에서는 축구경기장이 아주 엄격하다. 대개 화기를 적발하기 위해서다. 경기장에 불이 날 정도로 소란을 피우고, 정말로 불을 지르는 격렬한 팬들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딸리아에서 축구 팬을 뜻하는 용어가 '띠포지'일까. 띠포지는 티푸스.장 티푸스 할 때의 그 티푸스.즉 발열한다는 뜻에서 왔다.

경기장에서 내가 저지른 음주 사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축구장에서의 일이었다. 90년대 초반이던가, 김용세가 에이스였던 일화 천마(지금 성남 구단의 모체) 대 대우로얄즈 경기였다. 대우에서는 김주성이 야생마처럼 머리를 휘날리며 뛰던 시절이다. 물론 경기장에 몰래 가지고 간 술이 화근이었다. 마침 엄청 더운 여름이었고, 서울운동장.지금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인가 뭔가 하는 곳이 되어버린.밖에서는 무허가 리어카가 줄줄이 늘어서서 오징어 같은 주전부리에 소주를 팔았다. 외국 나갈 때 주로 사는 팩소주였다. 아무 생각 없이 오징어와 팩소주 몇병을 샀다. 경기를 보다가 팩소주를 따랐다. 이게 웬일? 소주가 펄펄 끓고 있었다. 한낮의 리어카 위에 놓인 소주가 얼마나 열을 받았겠는가. 그 뜨거운 소주를 입에 넣으니, 아무 향과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물처럼 들어왔다. 소주라면 목에 걸리고, 그러면서 좀 반응도 하고 조절을 하게 마련인데 물처럼 술술 들어오니 취할 수밖에. 다음 날, 같이 갔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야, 근데 경기가 어떻게 끝났냐? 후반전이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조간신문을 보니 김주성이 두골을 넣어 대우가 이겼다. 그랬던 적도 있었다.

서울운동장이 야구장과 축구장으로 나뉘어 한때 대한민국 스포츠를 책임지던 시절, 성동원두(城東原頭, 서울 동쪽의 너른 들판)라고 부르던.일제 때 이곳을 칭하던 일본식 말투라는 설도 있다.이 지역은 빅매치가 있으면 난리가 났다. 기마경찰대가 등장해서 말들이 머리로 관람객들이 슬슬 밀면서 질서를 세우려 했고, 리어카가 줄을 섰다. 술 반입을 금하려고 경찰이 가방을 뒤지고, 팬들은 들키지 않기 위해 온갖 묘수를 짜냈다. 오렌지주스 병에 소주를 담는 것은 고전적인 수법이어서 쉬이 들통났다. 아기 분유병에 담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미리 마셔서 배에 넣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경기에 불이 붙으면 슬슬 암매상들이 활약하는 타이밍. 외야에서 빨랫줄을 내려 경기장 밖의 패들로부터 보따리를 걷어올렸다. 경비원들이 호각을 불고 쫓아오면, 번개처럼 숨어버렸다. 입추의 여지 없는 3만 관중! 숨을 곳은 많았다. 그렇게 밀반입한 소주를 오징어와 묶어 팔았다. 왜 소주에는 마른오징어였을까. 실제 마셔보면 그다지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휴대의 편리성일까, 어쨌든 두 품목은 늘 붙어다녔다. 요새도 간혹 편의점 파라솔에서 그렇게 마시는 분들을 본 적이 있고, 나 역시 그런 음주법을 좋아한다. 오징어에 소주잔을 받으면 그래서 그 뜨겁던 70~80년대의 성동원두가 생각나는 것이다. 고교야구 라이벌전이 벌어지면 경기장 안팎에 그런 북새통이 없었다. 경기에 진 학교 동문은 동문대로, 이긴 학교는 또 그들대로 행진을 하면서 동대문과 종로통을 휩쓸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걸 두려워했던 정권 치하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내를 소리 지르며.그래 봤자 고향의 산과 바다가 등장하는 교가나 아카라카치, 하는 응원가지만.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특이한 경우였다. 그렇게 한바탕 행진을 하고 얼굴도 모르는 선후배들이 술집에 앉아 경기를 씹고, 안주를 먹고, 술을 들었다. 아아, 돌아오지 않는 시절들. 그래서 더 눈물 나는 경기장의 기억들. 오징어와 김밥, 소주와 맥주. 서울운동장 일층 구석에서 팔던 퉁퉁 불어버린 우동과 짜장면의 맛은 왜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이제 성동원두는 사라졌다. 거기에 이상한 우주선 같은 건물이 들어섰다.

그 시절에 나는 서울시 추계연맹전 같은 시시한 경기를 좋아했다. 몰래 가지고 들어간 소주를 마시면서, 쌀쌀한 날씨에 가을볕을 받았다. 그때 삼루수가 타구를 기다리며 팽팽하게 세우고 있던 종아리를 기억한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뜨거운 한 입>(창비, 2014)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