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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04일 08시 47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05일 14시 12분 KST

여성 문제가 아니라 '박정희-박근혜 대물림' 문제다

뉴스1

"요즘 주변 남성들은 예전엔 조심했던 여성 리더십에 대한 비아냥을 방언이라도 터진 듯 쏟아놓는다. 농담인 척하지만 진담으로 들린다. 논리적으론 문제가 많다. 하나 심정적으론 이해가 되니 반박을 자제하고 때론 '같은 여성으로 미안하다'고 대꾸한다. 여성 선후배들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 농단 게이트가 터진 후 괜히 민망하고 쪼그라드는 느낌이라고 했다. 여성들의 유별난 연대감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 최씨는 여성 리더십을 허무한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중앙일보] 2016년 11월2일치. 양선희 논설위원 칼럼, '여성 리더십의 약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때문에 엉뚱하게도 여성들이 불편한 처지에 놓였다. 여성 대통령과 여성 측근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 상황에서 '여성'을 부각시켜, 여성 리더십 전체를 도매금으로 폄하하는 잘못된 분위기가 은연중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여성의 정치사회적 진출에까지 주름살이 생기지 않도록 문제를 명확히 밝히는 게 필요하겠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여성 리더십 일반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 의미의 여성적 리더십을 실천하지 않았다. 대신에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와 제왕적 리더십을 보고 배워, 판박이 꼴을 내보였다. 핵심은 이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두고 여성 리더십을 논하는 것 자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 리더십은 가부장적 리더십과 비교할 때 덜 위계적이며 더욱 관계지향적이며 수평적, 상호적, 협동적, 민주적인 특성을 갖는다고 이야기한다. 이견이 있을 때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추종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대화와 토론 과정을 끈질기게 이끌어나가는 능력과 태도를 중시하는 관점이다. 이런 리더십은 사실 여성만의 고유 특성도 아니다. 권위주의 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사회의 지도자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덕성이다. 다만 여성 지도자가 이런 특성을 발휘해 성공한 사례가 많긴 하다.

칠레의 여성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는 첫 임기 말 85%의 지지율을 기록하고도 단임제에 묶여 퇴임했다가 4년 뒤 다시 출마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현재 두 번째 임기를 수행하고 있다.

1951년생인 바첼레트는 박근혜 대통령(1952년생)과 성장 과정이 정반대였다. 공군 준장 출신으로 아옌데 정권에서 활동한 그의 아버지는 군사쿠데타 세력한테 '국가반역죄'로 체포되었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바첼레트는 대학 재학중 피노체트 정권에 맞서 사회주의 청년단 활동을 하다 붙들려 고초를 겪었다. 그 뒤 국외로 추방되었다가 민주화 이후 귀국하고 사회당에 들어가 정치 이력을 쌓았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첫 임기중 숱한 정치적 난관에 부닥쳤다. 칠레 교육체제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구리광산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다. 산티아고 대중교통 체계의 결함으로 지하철 질식 사망자가 나오자, 화염병 시위까지 벌어졌다. 바첼레트는 이해 당사자들과 대화와 토론을 통해 사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갔다. 여성사회주의인터내셔널 총재였던 피아 로카텔리는 "바첼레트가 민주주의와 거리에 나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바첼레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국방장관을 했다. 칠레는 군부 쿠데타의 위험이 여전한 상태였다. 그는 정치 개입을 일삼아온 군부 지도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했다. 보복하지 않고 포용했다. 군대를 사열할 때 딱딱하게 거수경례를 붙이는 군인들한테 볼 키스를 하기도 했다. 결국 군부 최고 실력자가 '군부가 칠레 민주주의를 뒤엎는 일은 결코 다시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핀란드 여성 대통령인 타르야 할로넨도 2012년 퇴임 때 80%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의 성공 비결도 수평적 민주적인 지도력이었다. 그는 '무민 마마'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것은 늘 느긋하며 아이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만화영화의 엄마 캐릭터에서 따온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책 관계자들과 수평적으로 토론하기는커녕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우선 측근인 문고리 3인방과 최순실씨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면 접촉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수석비서관한테도 주로 전화로 지시사항을 길게 불러주면서 "그런데 지금 적고 있는 거죠?"를 확인했다. 국무회의에서 말하는 사람은 대통령 오직 한 사람이었고 모든 국무위원들은 고개를 내리꽂고 받아쓰기에 몰두했다. 단순한 소통 부재 정도가 아니었다. "결정은 내가 하고 너희는 따르라" "입을 다물라"는 권위주의 리더십, 폭력적 리더십의 전형을 보였다.

박근혜 리더십은 박정희 리더십을 빼다 박은 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군사권위주의로 통치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총구의 카리스마'를 박정희는 발휘했다. 절대 권력자 앞에서 이견을 말하는 사람은 숙청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생활 20년 동안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고스란히 배웠다.

아직 전모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성형시술과 올림머리 등의 미용에 시간을 꽤 쏟았다고 한다. 특히 세월호 참사가 난 시간에 위기관리 회의를 바로 주재하지 않고 미용사를 불러 머리를 매만졌다는 것은 국가 지도자로서 책임의식을 결여한 것이다. 청와대 본관으로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음은 공직자로서의 복무 기강과 윤리가 해이했음을 드러낸다.

박정희는 청와대 근처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일주일에 평균 세 차례 술판을 벌였다. 중앙정보부는 여성 2명씩을 선발하여 대통령의 옆에 앉히고 권력자를 위안하도록 했다. 많은 연예계 스타와 모델 지망생, 여대생까지 동원되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밑에서 10․26 사건 가담자로 지목되어 교수형을 당한 박선호 중앙정보부 과장의 업무가 대통령을 즐겁게 할 여성을 선발하는 채홍사였다.

성형시술과 미용에 몰두하고 수시로 근무지를 이탈하는 행동이 여성 일반의 특성일 리 없다. 여기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방종, 방탕함을 보고 배운 것 같다. 대통령쯤 되었으니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호사와 특권을 누린 것이다.

사실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한테 표를 준 것은 여성이라서가 아니었다. 여성 지도자한테 민주적 수평적 리더십을 기대했던 게 아니고, '박정희 신화'에 취하고 속아서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뽑았던 것이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박정희한테서 학습한 '여자 박정희'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 여성 리더십이 어쩌고를 이야기하는 것은 논점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박근혜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권위주의, 특권 문화, 부패, 정경유착을 비롯한 시대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다.

* 이 글은 전현직 여성 국회의원들의 단체 한국여성의정이 발간하는 매체 '여성의정'에도 함께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