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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01일 09시 4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01일 14시 12분 KST

코비의 은퇴와 문학의 향기

kobe bryant

코비 브라이언트

 

미국 프로농구 로스앤젤리스 레이커스의 스타 코비 브라이언트(37)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쌓아온 농구계의 위상은 통산 3만2천점을 넘는 득점 기록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11월30일 현재 3만2683점을 쏘았는데, 이는 미국프로농구에서 역대 세번째로 높은 득점 기록입니다. 20년간 한 팀에서 프로로 뛴 것도 그가 최초입니다. 레이커스팀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동안 외신에서 전해지는 얘기나, 엔비에이 홈페이지에서 기록을 체크할 때 말고는 특별히 코비라는 선수를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코비로 부르는 게 더 정감이 느껴지네요) 그저 미국 농구계에서 내로라하는 선수이며, 특급 스타이기는 하나 마이클 조던이나 르브론 제임스에는 못미치는 선수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아니 또 있습니다. 슛 기회만 오면 무조건 던지는 이기적인 선수라는 이미지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비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편지글을 써서 밝힌 것을 보고 이 선수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운동 선수하면 흔히 시나, 문학, 수필, 예술 등의 단어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코비는 아주 멋진 편지글로 자신의 은퇴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전·현직 엔비에이 선수들의 블로그인 '더 플레이어스 트리뷴'(The Players Tribune)에 올린 편지인데요, 저는 그의 문학적인 글 솜씨에 반했습니다. 마치 시처럼 편지를 썼는데,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엔피아르> 방송도 코비가 시와 같은 편지로 은퇴를 선언했다고 전했고, 일부 온라인 매체도 코비의 편지를 시로 비유했습니다.

코비 편지의 특징은 사랑하는 농구를 의인화해서 자신의 농구 인생을 농구와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표현하고, 그렇지만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농구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 마음과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이별해야만 하는 애틋한 심정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한테 이별을 고하는 듯한 절절함을 안겨줍니다. 과연 이 선수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농구만 한 운동선수인지, 아니면 따로 문학수업을 받은 선수인지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을 볼까요. 편지의 마지막 대목인데요. 코비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안다. 내가 다음에 무엇을 하든지, 나는 항상 그 꼬마일것임을. 똘똘말린 양말과 구석의 쓰레기통, 계시기엔 5초가 남고, 내 손엔 공이 있다. 5 ... 4 ... 3 ... 2 ... 1. 사랑해 언제나. 코비(And we both know, no matter what I do next I'll always be that kid With the rolled up socks Garbage can in the corner :05 seconds on the clock Ball in my hands. 5 ... 4 ... 3 ... 2 ... 1 Love you always, Kobe)

코비의 아버지는 미국프로농구 출신으로 여러 팀을 전전한 조 브라이언트입니다. 아버지는 1980년대 이탈리아 프로농구 무대에서 뛰었기 때문에 코비는 이탈리아어도 잘 한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코비는 편지글의 첫 대목에서 '아버지의 양말을 굴리던 어린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열정이 고교 졸업 당시 코비를 전국 톱 랭커로 만들었고, 보통 대학을 거쳐 엔비에이로 진출하는 상례와 달리 고교 졸업 뒤 막바로 엔비에이에 진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때부터 레이커스의 오랜 홈구장이었던 그레이트 웨스턴 포럼은 그의 농구 열정이 화려하게 꽃핀 배경이 됐습니다. 현재 레이커스의 홈 경기장은 스테이플스센터입니다.

저는 농구를 사랑하는 사람에 비유한 것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야말로 농구 하나의 길에 온 인생을 걸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이렇게 썼죠. '너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어 내 모든 것을 주었지. 내 마음과 몸, 정신과 영혼까지.' '나는 땀을 흘렸고 아파도 농구를 했다. 도전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네가 불렀기 때문이다.' 열정의 수준을 넘어 농구와 합일한 듯한 절대 경지에 이른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코비는 '더 이상 집착적으로 매달리지 않고 보내주겠다'라고 합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저의 미국인 친구는 코비가 이런 시를 쓴 것은 코비의 다양한 문화 체험과 여행, 포용력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외국 문화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게 됐고, 늘 여행을 다니면서 견문을 넓히면서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들이 스포츠 하나에만 몰입하는 것과 달리 많은 생각을 하는 선수라고 합니다.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면 실제 코비는 어린이를 위한 농구캠프를 열거나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직접 재단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분투했기에 코비는 미국의 올림픽 2회 우승을 도왔고, 샤킬 오닐과 함께 레이커스의 엔비에이 3연패(2000~2002)를 일구는 등 팀의 5회 우승에 기여했을 것입니다. 또 엔비에이 올스타에 17번 선정됐고, 한 경기 81득점 기록을 포함해 통산 3만2천여점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코비의 통산 득점은 카림 압둘 자바와 칼 말론에 이어 엔비에이 3번째입니다. 물론 올 시즌에는 경기당 평균 15.7 득점을 하고 있고, 야투 성공률도 생애 최저 수준인 31.5%에 그치는 등 극도의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레이커스 팬이나 구단한테는 프랜차이즈 최고의 스타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코비의 편지는 앨릭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떠올리게 합니다. 퍼거슨은 축구 감독으로서 뿐만 아니라 구단의 경영 간부로서도 역대급 활약을 펼친 최고의 사령탑입니다. 1986년부터 2013년까지 26년간 맨유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총 38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선수를 키워서 팔거나 싼값에 영입해 비싸게 전출시키는 방식으로 재정적으로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은퇴 뒤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의 경영대학원에서 최고경영자 코스 강의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리딩>(Leading)이라는 자서전을 벤처 투자가인 마이클 모리츠와 공동으로 냈지요. 그가 받게 될 인세수입만 1000만파운드를 넘으니 73살의 나이에도 대단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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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릭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

그런데 퍼거슨 감독도 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지도자입니다. 그가 감독 시절 쓴 편지가 최근 공개됐습니다. <이에스피엔>은 이를 두고 시적인 감수성이 있다고 표현을 했더군요. 퍼거슨 감독이 맨유로 부임하기 이전인 1980년대 초반 애버딘이라는 팀에서 있을 때의 편지글입니다. 당시 퍼거슨 감독은 선수단과 호텔 숙소에 머물렀는데, 선수들이 호텔방에서 축구공을 1층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난을 치다가 수영장에서 쉬고 있던 퍼거슨 감독한테 딱 걸렸습니다.

퍼거슨 감독은 숨어서 지켜본 뒤 장난친 선수들에게 벌금 통보를 내립니다. 그런데 헤어 드라이라는 별명처럼 다짜고짜 선수들을 야단치지 않고 짧은 편지글을 타이프로 쳐서 선수들한테 돌립니다. 엄격한 훈육관의 이미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유머와 여유로 선수들을 다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월급 명세서에 내가 메긴 3파운드 벌금을 확인할 것이다. 10층에서 공을 떨어뜨린 대가다. 너희는 이 편지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다들 불편해하겠지. 그러나 나를 탓하지 말라. 모든 일은 이 트릭을 수행한 그 무엇에 있으니. 지금쯤 너희는 알 것이다. 또 다시 이짓을 하는 바보같은 이를 내가 안다는 사실을. 다시 장난을 치려고 한다면, 다음번에는 아예 은행의 월급 계좌가 없어질 것을 기억하라. 앨릭스 퍼거슨, 고번의 계관시인." 퍼거슨 감독은 자칭 고향인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고반의 계관시인이라며 유머의 요소를 높였습니다.

둘을 통해 한국 스포츠 선수들이나 지도자들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과거 조광래 축구 감독이 자기가 생각하는 축구의 철학을 A4 용지에 써 선수들에게 배포한 적이 있고, 윤영길 한국체육대 교수는 6월 캐나다 여자월드컵 축구대회 때 선수단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호텔방 문이나 엘리베이터 입구에 격려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수나 지도자들이 시적인 향취를 살려 자신의 생각을 밝힌 예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말이 아니라 문자로 생각을 전달할 때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코비의 편지가 그렇고, 퍼거슨의 편지가 그렇습니다.

선수나 감독한테서 문학적 향기를 느끼게 되는 것은 팬들한테는 행운입니다. 스포츠가 단순히 운동능력이나 몸의 기예만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형적 본질을 찾는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시적 감수성이나 문학적 여유가 있는 한국의 스포츠계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코비의 편지를 통해 한번 꿈꿔본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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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 편지의 마지막 부분. 시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더플레이어스트리뷴> 캡처

코비 편지 전문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