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11월 18일 13시 10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18일 14시 12분 KST

파리 테러와 평화의 축구

다큐멘터리 채널 <내셔널지오그래픽>의 '2차 세계 대전'을 보면 20세기 전반 유럽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상을 실감하게 됩니다. 유대인 등 민간인에 대한 '도살에 가까운' 집단학살도 있지만, 연합군의 독일내 도시 폭격도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습니다. 독일과 연합군의 인명 피해는 수천만명을 넘어섭니다. 광기의 살육에서 인간의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악마성을 보는 듯해서 섬뜩합니다. 특히 독일의 히틀러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사람들에게 충성을 강요하거나, 군대 사열을 받는 모습에서 '악의 평범성'이나 '일인을 다루기는 어렵지만 다수를 다루기는 더 쉽다'는 말들도 떠오릅니다.

2015-11-18-1447835744-6919221-.jpg

17일(현지시각) 런던 웸블리경기장에서 관중들이 라 마르세유를 합창하고 있다. AP

끔찍한 일을 겪었던 유럽은 전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저는 그 변화의 상징적인 단면을 보통 5만~9만명이 운집하는 축구 경기장으로 보고 싶습니다. 축구의 대륙 유럽에서는 유명한 팀의 경우 보통 이 정도 관중이 모입니다.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경기장의 관중을 보면서 저는 70년 전 전쟁터로 몰린 젊은이들을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그들의 후손들은 이제 전쟁이나 살육에 내몰리기보다는 축구장에서 좋아하는 팀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응원합니다. 훌리건도 있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게임이 끝나면 큰 사고 없이 일상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들이 총을 들고 서로를 향해 쏜다는 일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스포츠 기자로서 바라보는 유럽 축구장의 대규모 군중을 저는 전후 평화체제의 정착, 인간성 회복, 야만에서의 탈피로 여기고 싶습니다.

스포츠를 바라보는 여러 시각 가운데 동물행태학적 해석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인간의 원초적인 폭력성과 스포츠의 집단성, 승패 몰입, 목표를 향한 물리적 충돌 과정 등을 연결짓습니다. 수렵시대부터 수많은 전쟁을 거쳐온 인류에게는 사냥·공격 본능이 있고, 현대의 스포츠는 그런 인간의 잠재적 폭력성을 분출시키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다는 애기입니다. 실제 스포츠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범죄율이 떨어진다는 학계의 논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11월13일 세계를 충격으로 빠뜨린 파리 폭탄 테러에 대한 유럽의 대응 과정에서도 저는 스포츠의 힘과 가치를 느낍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는 이슬람국가(IS)에 대한 폭격을 강화했고, 러시아 미국을 포함해 각국의 대 이슬람국가 응징도 강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런 물리적 응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불확실합니다. 분명한 것은 힘의 대결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런 측면에서 17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경기장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축구대표팀 평가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이날 경기는 웨인 루니를 앞세운 잉글랜드의 2-0 승리로 끝났지만 결과는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이날 경기 개막식 애국가 행사에서 프랑스 국가의 가사를 전광판에 올렸습니다. 모두 따라하도록 유도한 것이죠. <비비시>는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유를 따라 부르기 위해 모두가 일어섰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며 그 순간을 묘사했습니다. 축구에서는 라이벌이자 앙숙이지만, 경기장에 울려퍼진 8만여 관중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유 합창은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웃 국가와 국민에 대한 연대와 배려의 화음입니다. 비비시는 "불어 가사를 따라하는 팬들의 노래는 박자와 엉켰지만 열성적이었다. 그 모습을 본 프랑스 축구 선수들은 감정이 복받치는 듯했다"고 썼습니다.

 경기 시작 전에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 윌리엄 왕자, 로이 호지슨 잉글랜드 감독과 디디에 데샹 프랑스 감독이 함께 운동장 한켠에 파리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다발을 헌화했고, 묵념 행사를 펼쳤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지나 군사적인 행동의 과시보다 더 격조가 높은 '테러 반대'의 반향이 축구장 안에서 증폭됐습니다. 이번 테러로 사촌 누나를 잃은 프랑스 대표팀의 미드필더 라사나 디아라가 교체투입될 때는 경기장의 모든 관중이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공격수 앙투앙 그리즈만도 출전했는데, 그리즈만의 여동생은 바타클랑 극장 테러 현장에서 탈출해 목숨을 구했습니다. 두 선수는 프랑스 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독의 말에도 "반 테러의 뜻"을 표시하며 출전을 강행했습니다.

애초 잉글랜드축구협회는 평가전을 연기하려고 했습니다. 테러 충격에 빠진 프랑스 대표팀을 고려해서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축구협회가 "취소할 수 없다. 테러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며 강행의사를 표시해 성사됐습니다. 축구 평가전을 프렌들리(friendly)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친선경기에서 두 나라가 단합한 유럽인의 모습을 선보이며 평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스포츠가 갖고 있는 평화의 힘이고 열정입니다.

2015-11-18-1447835894-7905949-U20150415_UN4.jpg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토마스 바흐 IOC위원장, 김윤석 광주유니버시아드 사무총장

영국 관중들의 적극성은 프랑스 국기의 삼색인 파랑, 하양, 빨강(각각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으로 카드섹션 연출을 하고, 웸블리 경기장을 둘러싼 아치를 삼색으로 장식한 것에서도 확인됐습니다. 데샹 프랑스 축구대표팀 감독은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공동체의 슬픔을 함께 했다. 축구 차원을 뛰어넘어 인간 차원에서 오늘의 경기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휴고 요리스 골키퍼는 "영국 팬들에게 감사하다. 우리가 경기를 잘하지 못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연대"라고 말했습니다. 유엔도 스포츠는 평화의 수단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나 난민기구를 통해 분쟁·갈등 지역에서 스포츠 행사를 열거나, 스포츠를 매개로 평화 노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번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A매치가 유럽에서 개방성을 자랑하는 프랑스 사회에서 불거질지 모르는 극우의 반외국인·반이슬람 정서 부채질에 완충재 구실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하는 권력자도 많고, 때로 스포츠 갈등이 국가간 대결까지 이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스포츠가 세계 시민들한테 평화의 메시지로 기능한다고 보여집니다. 21세기 스포츠는 그래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