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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09일 07시 20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2월 10일 14시 12분 KST

성교육 표준안을 폐기하라

Oko_SwanOmurphy via Getty Images

나라 꼴이 난리다. 이게 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서 그렇다. 국정 역사교과서도 그렇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도 그렇다. 여기에 하나가 더 늘었다. 바로 교육부가 만든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하 표준안)이다. 개발에 무려 6억원을 썼지만 문제가 너무 많아 전문가와 시민단체들로부터 '폐기'하라는 비판을 받았다. 교육부는 개정을 운운하며 2년을 끌다가 수정할 것이 별로 없다며 일방적으로 전국의 일선 학교에 3월부터 표준안을 보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성교육의 내용을 국가 표준안을 통해 정하겠다는 발상부터 문제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도 경악할 정도로 비상식적이다. "여성은 무드에 약하고 남성은 누드에 약하다"와 같은 문구는 눈을 의심케 한다. 사기꾼에 가까운 '픽업 아티스트'들이나 연애를 많이 해봤다고 자랑하는 허세꾼들이 입에 올리는 저런 말이 실려 있다. 또 표준안은 '남성의 성욕은 여성에 비해 매우 강하다'는 입장을 드러낸다. 성욕은 성차가 아니라 사람마다 다 다르다. 욕망은 생물학적 원리가 아니라 심리다. 마음은 마음대로지만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는 분명 선택과 책임의 문제다. 하지만 저 말은 남성을 성의 '피해자'로 인식하게 만든다. '남성 성욕=강한 본능'을 반복적으로 학습한 남자들은 자신의 성욕은 순수한 본능이며, 그런 남자들을 여자들이 유혹한 것이 잘못인데 왜 나만 나쁜 놈이 되어 내 인생을 망쳐야 하는가, 남자는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식의 억울함을 주장하게 된다. 여성이 무드에 약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남성이 여성을 자극할까봐 '무드'를 잡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은 벌어지지 않지만, 남성이 누드에 약하다는 것을 배웠으니 여성은 남성을 자극하지 않도록 복장을 주의하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결국 성폭력에 대한 해석이 뒤바뀐다.

표준안에서 제시하는 성폭력 예방법은 더욱 가관이다. 만원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할 것 같으면 가방끈을 길게 해서 뒤로 메라고 한다. 아니, 대체 당할 거 같은지 아닌지의 판단은 어떻게 해야 할까?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막연한 경고는 심리적 위축감을 먼저 심어주고 오히려 사건의 책임을 피해자가 충분히 조심하지 않은 탓으로 돌릴 우려가 있다. 긴급 상황이 되었을 때 내 몸을 보호하는 대처법을 익히는 것과 가해자를 신고하고 어디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지 등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성교육을 통해서 반대로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진심으로 사과하고 책임을 기꺼이 지는 법도 배울 수 있길 바란다. 범죄자가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보다 우리는 가해를 저지르고도 모르고 사는 것을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한다.

교육부는 표준안을 유엔의 협약에 따라 제정했다지만 이마저 거짓말이다. 성교육에는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대한 이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유엔과 휴먼라이츠워치의 권고를 오히려 어기고 있다. 성교육 시간에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면 학생들이 동성애자가 되니 교육을 금지해야 한다는 보수 개신교 쪽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놀라울 따름이다. 동성애에 대한 학술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선천적으로 이성애자로 태어났다고 해도 갑자기 동성애자로 바뀐다는 것이니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이뿐 아니라 성폭력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인 성적 자기결정권이나 한부모 가정, 독신 등 다양한 가족 형태에 관한 이해를 돕는 내용들도 모두 빠졌다. 사회적 합의가 아직 안 되었다는 이유다.

교육부는 표준안이 교육 현장에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참고 사항일 뿐이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몇 달 전, 서울시교육청은 보건교사 740명이 신청할 정도의 인기 있는 온라인 연수 교육 프로그램을 갑자기 폐강시켰다. 성교육 표준안과 다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긴 한탄마저 부질없다. 정말 교육부가 해야 할 일은 학교에서 실질적인 성교육이 가능하도록 시간을 확보하고, 교과과정을 정식으로 마련하고, 성교육 전문 교사들을 양성하는 계획을 세우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는 게 박근혜 정부의 특기인 것 같다. 이 정부의 효력은 언제 끝날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