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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02일 06시 13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02일 14시 12분 KST

음모론의 유혹

쇼박스

얼마 전 개봉한 <빅 쇼트>는 2008년 미국 금융대란의 주범인 모기지론이 거품투성이여서 주가가 폭락할 것을 미리 알고 공매도해 떼돈을 번 사람들의 실화다. 모기지론을 신처럼 떠받들면서 금융대란을 부추긴 거대 금융회사의 뒤통수를 때려 대박을 터뜨린 이들의 통쾌한 이야기? 주인공들의 예상은 정확했지만, 수백만명이 집을 잃고 실직하는 비극 위에 벌어들인 그들의 돈이 어딘가 찝찝하게 여겨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화를 보면 금융업계 종사자였던 주인공들이 예상한 건 금융대란까지는 아니었다. 그런 참사를 맞기 전에 시스템이 작동해 모기지론이 하락하고 일시적 혼란은 있겠지만 곧 정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경고등이 울리는데도 모기지론이 떨어지기는커녕 거기에 기반한 파생상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모기지론의 하락에 투자한 주인공들은 패닉에 빠진다. 그중 한 명은 평소에 미국 사회가 다 썩었다고 생각하는 냉소적인 세계관의 소유자다. 그가 흥분해서 말한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냐고. 그의 성질을 아는 이가 말한다. '넌 냉소주의자를 자처하는 놈이 아직도 시스템을 믿은 거야?'

갑자기 뜨끔했다. 나도, 다른 이들도 저럴 거다. 사회가 후지다고, 시스템이 개판이라고 버릇처럼 말해도 맘속 어딘가에 시스템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을 거다. 그 기대를 위협할 만큼 시스템이 마비되거나 오작동하면 아무리 냉소주의자라도 패닉에 빠질 거다. 공동체가, 시스템이 개인에게 행사하는 구속력은 그만큼 크고, 그 앞에서 개인은 그만큼 약하고, 약해서 선한 거구나. 하지만 그래도 사회는 후지고, 왜 그런지 답은 어렵고 복잡하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금융대란이 오기까지 그 많은 경고등들을 안 봤는지 못 봤는지, 짜고 친 것도 아닌데 금융인과 관리기관 종사자 모두 그렇게 집단적으로 마비될 수 있는지, 대란 뒤엔 예방책이 갖춰진 건지, 영화는 질문투성이다.

<내부자들>은 왜 사회가 이 모양인지 단순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청와대, 여당, 검찰, 언론사, 재계의 최고 실세들이 한편이 돼 권력, 금력에 매스컴의 힘까지 더해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재창출하려 한다. 이런 조합이면 못할 게 없다. 사회가 이 모양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게 다행일지 모른다. 음모론적인 설정을 빌려 강력한 나쁜 편을 만든 뒤, 건달과 '빽 없는' 검사 둘이서 이들과 싸우게 한다. 좋은 편, 나쁜 편의 선명한 구분, 직설적인 대사 같은 영화의 장치가 분명히 말하는 것 같다. 시스템을 파고들기보다 권선징악의 쾌감을 중시하겠다고. 그래도 '사회를 이렇게 과장, 혹은 왜곡해도 돼?' 하는 반론을 잠재우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한 칼럼, 사설들을 봤다. 대체로 이런 투였다. '한국의 권력층은 욕들어 싸다. 이 영화가 하는 욕이 정확하고 옳고 재치있냐? 그런 건 차치하고 수백만명이 봤다는 건 권력층에 대한 분노가 위험 수위까지 쌓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호소하는 정서는 '분노'라기보다, 음모론적 설정의 단순명쾌함이 주는 후련함에 가깝지 않을까.

권력자들끼리 이너서클을 구성해 시스템을 오작동시키는 음모론적 설정은, 3~4년 전부터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해, 그 빈도가 잦아졌다. 그건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동시에 적에게 힘을 주는 손쉬운 장치이기도 하지만, 정작 위험한 건 시스템을 파고들거나 파고든다고 말하는 작품에서(<내부자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모론적 설정을 픽션으로 끌어올 때다. 그렇게 거품 위에 분노를 쌓으면 그게 약자 편이 될 수도 있지만 강자 편이 될 수도 있을 거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