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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21일 08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21일 14시 12분 KST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한국인의 인간관

연합뉴스

"호박 밭에 말뚝 박기. 똥 누는 놈 주저 앉히기. 이 앓는 놈 뺨치기. 옹기장수 막대 치기. 장님 귀에 소리 지르기. 불난 집에 부채질 하기. 초상집에 춤추기. 해산한 집에 개잡기. 빚값에 계집 뺏기..."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의 심보이다. 놀부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무려 여러 쪽에 걸쳐 그의 악행이 자세히 소개된다. 하지만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의 캐릭터는 깊이가 없이 그저 평면적으로 넓게 펼쳐져보일 뿐이다.

우리 고대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전형적이며 어떠한 개성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선인이거나 악인이며, 영웅이거나 원수이다. 놀부는 악인의 전형으로서 그에게는 어떠한 선한 면도 없다. 반대로 흥부는 선인으로서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착하고 좋다. 고대소설이 보여주는 인간관은 이처럼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모든 인간이 신분과 계급으로만 존재하던 그 시대에 개인의 특성이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서구의 근대적 인간관은 인간을 신분이나 계급이 아니라 개인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역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근대문학이다. "소설이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실존의 단면을 발견하는 예술이다"라는 밀란 쿤데라의 발언은 이 점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준다. 루카치가 소설을 가리켜 "부르주아의 서사시"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설사 액면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서구의 근대적 인간관은 근대문학이 잘 보여주듯이 실존적 개인을 단위로 삼는다.

오늘날 한국인의 인간관은 여전히 개인으로의 분화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대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한국인들은 인간을 민족이나 씨족 같은 종족 단위 아니면 수저론으로 대표되는 신분계급의 일원으로 파악할 뿐, 개인으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도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민족의 처녀'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들은 우리 '민족'이어야 하며 '순결한 처녀'여야 하며 '강제로 끌려가야' 한다. 우리 민족이 아니거나 순결한 처녀가 아닌 매춘부이거나 강제로 끌려가지 않고 제 발로 걸어간 여자들은 결코 진실한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이 역시 우리의 고대적 인간관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는다.

프랑스 영화를 보면 좋은 놈도 나쁜 놈도 없다. 주인공인데 알고 보면 나쁜 놈이다. 악당인데 의외로 좋은 면도 있다. 주인공은 안 죽을 줄 알았는데, 나중에 죽는다. 알랭 들롱이 나오는 갱 영화에서 그는 대부분 마지막에 죽는다. 여기에는 분명 프랑스인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혁명과 전쟁을 겪으면서 경험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찰이 배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며 그래서 결코 평면적일 수 없는, 두터운 세계관, 인간관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 영화를 보면 주인공과 악당은 명확히 구분되며 그들 사이의 어떠한 캐릭터의 교환도 없다. 이 역시 미국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프랑스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을 전형적이고 평면적으로 파악하는 한국인들에게 인간 세상은 기본적으로 멜로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딴 데서 찾을 길 없다. 잘생긴 사람은 반드시 사랑에 빠져야 하고 악당은 좌충우돌하다가 종국에 파멸되어야 한다. 멜로 드라마의 세계는 우연한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상상된 필연의 세계이다. 그러나 현실은 멜로 드라마가 아니다. 여기에서 의식과 세계의 불일치가 나타난다.

한국인들이 '강제로 끌려간 민족의 순결한 처녀'라는 이미지를 넘어선 위안부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문화로 인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한국인들에게 위안부가 제 발로 찾아간 더러운 매춘부일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정신적 레퍼토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에게 현실은 멜로 드라마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결국 우리의 문화적 무의식까지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 아포리아를 내포하고 있다. 과연 지금 우리가 그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