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5년 12월 29일 08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29일 14시 12분 KST

어른이 되는 법

연합뉴스

한일위안부 협상에 대해 제2의 한일협정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것이 한미일동맹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틀리지 않은 지적이다. 1965년의 한일협정이나 지금의 위안부 합의나 모두 미국의 주선하에 한미일동맹 강화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위안부 당사자의 처지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는 1940년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한미일동맹 강화는 결국 북중동맹과 대립되는 블록 정치 구도를 낳는다. 한미일동맹은 20세기 초의 영일동맹 하에서 조선이 식민지가 된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구도이다. 그때는 영국과 미국의 후원하에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여 러시아와 대립하는 구도였으며, 나중에 그 구도가 깨어지면서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후 냉전 상황에서 블록 정치는 복구되었고, 이번에는 한국이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대신에 전초기지를 지키는 하위동맹국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한국은 장기꾼이 아니라 장기말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조건의 산물이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에서 민족주의가 유일한 무기임을 알아차렸고, 약자의 무기로 채택한 것이었다. 사실 이번 정부의 위안부 협상은 한국 민족주의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역설적으로 민족주의라는 자원이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하고 있다. 사실 민족주의는 아직 힘이 세다.

지난 백여년 간 민족주의는 한국의 거의 유일한 정신적 자원으로서, 키다리 아저씨(미국)와 키작은 아저씨(일본)에게는 가장 신경 쓰이는 요소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 두 아저씨에게 한국은 힘없는 작은 아이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귀찮아 하는 것이 이 아이가 떼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우리가 민족주의라는 투정의 피해자 모드로만 나아갈 수는 없다. 민족주의는 강대국이라는 아저씨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작동되는 뒤집혀진 인정 욕구의 덫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이 떼쓰는 아이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동안 분노와 흥분의 민족주의를 에너지로 삼아 나름대로 발전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 한국 사회의 퇴행을 보면서, 과연 이 에너지가 우리 내부로 향할 때 끔찍한 파시즘으로 전화되지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것조차도 한미일동맹 유지 차원에서 아저씨들이 막아줄지는 알 수 없지만.

옴짝달짝할 수 없는 틀 속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속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씩 성숙해지는 것이다. 분노와 흥분에 기반한 백년간의 민족주의를 넘어설 정신적 자원을 하나씩 만들어가야 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민족주의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용한 무기였을지라도, 이제 그것이 제2의 블록 구도에서도 계속 쓸모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인정 욕구의 건강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민족주의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양철북>의 오스카와 같다.

조금씩 자라야 한다. 민족의 성장소설이 필요한 때이다.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록 하자. 위안부 문제만 하더라도 섣부른 예단을 하지 말고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보도록 하자. 그 속에 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우리 얼굴이 비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정한 현실 의식이다. 이것이 어른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