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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30일 06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31일 14시 12분 KST

누드와 나체

뉴스1

영국의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The Nude)'와 '나체(The Naked)'를 구분한다. 그는 누드란 나체와 달리 옷(Costume)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나체는 말 그대로 벌거벗은 것이다. 그러나 누드는 그냥 벌거벗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정교한 문법을 가진 미술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고도로 계산된 의상이다. 서구 미술사에서 누드가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다. 동양에서 산수화가 차지하는 정도의 무게를 가진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서구와 동양 미술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과 자연관의 차이에서 비록된다고 보아야 한다.

서구 미술에서 누드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케네스 클라크보다도 오히려 얼마 전 작고한 존 버거가 더 잘 설명해주고 있다. 존 버거는 저서 〈보는 방법들(Ways of Seeing)〉에서 서구 미술사에서의 누드 분석을 통해 여성의 신체가 어떻게 남성적 시선에 의해서 포착되고 재현되는지를, 그 이데올로기의 밑바닥까지 잘 해부해서 드러내고 있다.

최근 국회에서의 박근혜 풍자 누드화 소동은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뭔가 빗나간 문화적 이해의 문제로 보인다. 말하자면 서구 미술사에서 누드는 오늘날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 평가하든 간에 나름 역사적으로 축적된 표현의 문법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한국 미술에서 누드라는 것은 좀 생뚱맞게 차용된 형식일 수밖에 없다. 서구의 경우 전통적인 방식이든 아니면 현대적인 재해석이든 간에, 거기에는 일정한 의미의 고정과 재해석에 대한 규칙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번 박근혜 풍자 누드화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정치적 충돌 이전에 시각적 문법의 부재가 불러일으킨 좌충우돌의 하나로 보인다.

누드와 나체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 상태에서, 작가든 관객이든 간에 혼란과 착종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일차적으로 작가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는 기본적으로 서구 미술사에서 누드의 의미와 문법을 이해했어야 했고, 또 그것의 문화적 전치가 이 땅에서 어떤 의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미학적 계산을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부터 제대로 된 시각적 언어에 대한 이해 없이 정치적 표현 욕구만으로 밀어붙인 작업은 결국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만 것이다. 물론 원론적인 차원에서 당연히 그의 작업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미술의 관점에서라면 그것은 혹독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이 저들(?)에게 어떻게 이용되든지 간에 말이다. 최소한의 양식이 있는 작가라면 그는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 맞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