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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06일 10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12일 10시 50분 KST

뉴스타파 박대용 기자를 만나다

"우리의 언론환경이 그런 것도 있겠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공중파 뉴스에서 진지함이 많이 사라졌죠.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뉴스 또는 어떤 분노의 공감대를 트위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세상이 훨씬 넓구나. 내가 우물 안에 있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난 28살의 나이에 프로레슬링에 입문했다. 아주 늦은 나이에 업계에 발을 내밀었지만 말 그대로 청춘이라고 불리는 시기였다. 훈련 전후로 체중을 재보면 5킬로씩 차이가 나곤 했다. 운동할 때 입고 있던 티셔츠가 체열과 염분으로 인해서 금새 바래고 너덜거려서 도저히 못 입을 정도였다. 청춘의 패기를 논하는 게 구닥다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 나이는 그랬다. 젊다라는 건 알 수 없는 불안과 함께 선택도 할 수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체세포의 사멸속도가 빨라질수록 사람은 단단한 껍질을 자기주변에 두르고 그 안에 안주하기를 바란다. 사람이니까. 늙으니까.

2014년 2월 3일과 5일. 이틀 차이로 MBC 기자와 KBS 기자가 각각 뉴스타파와 청와대로 자리를 옮겼다. 전자는 박대용 기자 후자는 민경욱 문화부장이다. 세간에서는 두 사람의 선택이 큰 화제가 됐다. 나도 청춘의 시기가 훨씬 지난 나이에 저지른 두 사람의 과감한 선택이 정말 궁금했다. 언젠가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도 만나보길 고대하며 먼저 박대용 기자를 만나봤다. 이직과 이사를 동시에 하다 보니 정신 없다는 그에게 사정사정해서 2월 24일 밤 9시경 일산 마두역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미세먼지가 자욱했다. 아이패드미니 전원 어댑터를 연결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는데 박대용 기자가 들어왔다. 그와 나는 트위터로 알고 지낸 지 3년 정도 된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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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용

1974년 출생. 고려대학교 졸업.

2001년 입사. 2011년~2012년 언론노조 파견. 2013년 MBC노조 파견. 2014년 뉴스타파 이직, 미디어팀장

41살의 선택

"(사표라니)왜 그랬어요?" "으하하하. 그러니까요."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이미 본인도 알고 있다. 이미 주변사람들 대부분이 나같은 반응을 보였으리라. 꽤 한참 동안 마주보면서 헛헛한 웃음을 날리며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몇 모금씩 마셨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목이 계속 칼칼했다.

"회사 들어간 게 언제죠?" "2001년에 들어갔으니까 만 13년, 꽉 채워서 13년 일한 거죠." 혓바닥이 입술을 살짝 적시고 눈동자가 가로로 파도를 탄다. 생각이 많다는 얘기다.

그와 나는 같은 1974년 범띠다. 방송국 채널이 3개였던 시절을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MBC는 절대적 존재다.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생방송을 녹음한 테이프를 누가 더 많이 갖고 있나 경쟁할 정도였으니까. 나도 첫 방송생활이 MBC 특급작전이었다. 내 경험을 먼저 꺼냈다. "저는 1999년에 라디오 게스트로 엠비씨 처음 출연했는데 그때의 기억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MBC는 7층이 생방송 스튜디오잖아요." "그렇죠." "전 요즘도 다른 방송사 가서도 7층 생방송 스튜디오라는 말을 써요. CBS는 3층이고 교통방송은 5층인데 말이죠. 그래서 피디한테 여러 번 혼나기도 했는데요. 저는 잠깐이었지만 13년이면..." "길죠. 13년 길죠."

방송인이나 기자는 자신의 생각, 말, 글이 방송국이라는 거대한 앰프와 스피커를 통해서 출력되는 짜릿함을 잊지 못한다. 그건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도 사명이기도 하다.

"저는 그래도 좋은 직장에서 누릴 만큼 누린 거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말을 끊길래 질문을 훅 던졌다. "그런데 뉴스타파는 왜 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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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뉴스타파 스튜디오.

뉴스타파 아이디어의 제안자

"2011년이었을 겁니다. 노종면 앵커, 이근행 피디 등등. 많은 기자들과 피디들이 해고되거나 뉴스생산현장에서 배제된 상태였죠. 그때 인터넷을 기반으로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뉴스를 만들면 어떨까? 라고 제가 제안을 했죠." "아이디어를 먼저 제공하셨군요." "이 분들이 좋은 분들이고 능력도 좋은데 거의 컴맹에 가까워서요. 그 해 10월에 공식 제안해서 12월에 준비하고 다음 해 1월 27일에 첫 방송을 했지요." 나도 그때 뉴스타파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의 분위기는 '상해임시정부'가 광화문 앞에 이전한 것 같은 분위기. "공지영 작가가 200만원을 제가 50만원을 보태서 맥북 13인치를 샀고 그게 유일한 기자재였어요. 그랬는데 지금 30명 기자가 있는 조직으로 성장한 거죠." 잔잔했던 말투가 파도를 치면서 음량도 올라갔다. 본인이 생각해도 감개무량 뿌듯한 탓일 게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뉴스타파보다도 트위터 이야기를 먼저 좀 할게요." 그는 역시 기자다. 흐름을 주도할 줄 안다. "저는 공중파 기자잖아요. 고위 공직자들, 돈 있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죠. 물론 그걸로 호가호위를 한 건 아니지만 또 그렇게 맘 먹으면 쉽게 할 수도 있어요. 저도 어느덧 주변에 이른바 지배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기 시작했었는데 트위터를 하면서 정말 생생한 정보들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거죠." "트위터가 인생 조졌군요. 으하하하" "하하하하. 그런가요? 하하하"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이코노미스트 특파원 출신 다니엘 튜더가 자신의 책에서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상사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곧장 그랜드하얏트호텔로 들어간다. 짐을 풀어놓은 다음 서울대 A 교수를 만나고, 주요정치인 B와 커피를 마시고, 공무원 C와 저녁을 한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문학동네 , 18페이지) 튜더는 '우아한 영미권 저널리스트'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트위터로 만난 세상

"우리의 언론환경이 그런 것도 있겠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공중파 뉴스에서 진지함이 많이 사라졌죠.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뉴스 또는 어떤 분노의 공감대를 트위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세상이 훨씬 넓구나. 내가 우물 안에 있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거봐요. 신세 망친 거 맞다니까요." "트위터를 5년 동안 하면서 사람들의 선의가 모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구미 물 부족 사태 때도 처음 그걸 느꼈죠." "아. 트럭에다가 생수 싣고 내려간 거요?" "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도와줄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아. 사람들이 뭔가 스스로 행동하기를 원하는구나.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어떨까." "가능성을 본 거군요." "그래요. 그래서 굿앱스라고 해서 좋은 생각과 좋은 능력을 가진 개발자들을 모아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을 만들려고도 했고.." "잘 안됐죠?" 툭 던져봤다. "음. 잘 안됐다기보다 페이스북 페이지로 남아 있죠." "그게 잘 안된 거죠." "뭐. 그렇긴 합니다. 법인으로까지 만들려고 해봤지만 쉽지는 않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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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뉴스에 기자들도 한탄한다

"언론환경을 말씀하셨는데 얼마 전 미디어 오늘 기사를 보니까 MBC에서 지난 1년 동안 동물관련 뉴스가 무려 99건이나 됐다고 하더라구요." "아..그렇게나 많아요?" "MBC의 M은 멧돼지의 엠이다라고도 하는데, 뭐 동물뉴스가 나쁘다는데 아니라 민감한 뉴스를 연성뉴스로 덮으려는 시도로 보여서 그런 건데 내부에서는 어때요?" 입안이 마른 듯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시선이 한참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것을 봐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카카오톡 단체 톡방 있잖아요." "네. 단톡방." "네, 기자들끼리 모이는 단톡방이 있는데 멧돼지 뉴스가 나오면 우리끼리 아이쿠 또 나왔어 이러면서 한숨을 쉬죠. 우리끼리 조롱하고 자조하고 이게 대체 뉴스가 맞냐. 이걸 왜..." "우리가 해야 하나" "네 맞아요. 우리가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또 위에서 시켜서 하는 거니까 함부로 밖에다 말은 못하겠고 속만 상하는 거죠." "그렇긴 하겠네요." "만약에 나한테 써오라고 했으면 난 거부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쉽지 않더라구요."

아내의 허락, 대출심사 불학격

"그런데, 진실도 좋고 정의도 좋은데 문제는 가장이잖아요. 부인이 쉽게 허락했어요?" "그럴 리가요."

그의 부인도 뉴스타파 후원인이기도 하다. 평소 뉴스타파를 즐겨보고 응원하는 입장이었지만 번듯한 너무도 번듯한 직장에서 직접 그곳으로 간다는 남편의 생각에 부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처음에 택도 없는 소리라고 하다가 지난 추석 때였어요. 오랜만에 부부가 길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지요. 내가 여기서 누린 게 참 많다. 그런데 앞으로 내가 어떤 걸 더 누리는 것보다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 "그랬더니요?" "그 이후로도 계속 이야기를 했더니 결국 허락을 해줬죠. 솔직히 보내기 싫지만 늙어서 원망 듣기 싫다 라면서요" "싹싹 빌었군요." "싹싹 빌었지. 별 수 있나. 허허"

사직서. 나이 마흔한살의 사직서. 직장인이라면 특히 같은 연령대의 가장이라면 이 단어의 무게를 알 수 있으리라. 감히 꺼내기도 힘든 해리포터의 볼드모트같은 단어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사직서를 내기 전날 한 번 더 물어봤어요. 그러면서 뉴스타파 후원인이 3만명인데 희망적이지 않아? 그랬더니" "그랬더니?" "무슨 꼴랑 3만명이 희망적이노? 희망으로 치면 MBC가 훨씬 갑이지!" "쿠사리 먹었군요." "네..하하 그러면서 3만명이 희망적이라서 보내는 게 아니라 당신이 가서 희망을 만들라고 그러더군요." "가서 희망을 만들어라. 멋지다." "멋지죠? 그래서 제가 이 말 너무 멋지다. 이거 좀 적을게 라고 했죠." 부창부수는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그런데 춘천에서 일산으로 이사를 오려고 집 때문에 은행대출을 신청했는데 사직서 쓴 당일 날 전화가 온 거예요. 어? 사표 쓰셨네요? 이러면서" 헛기침을 한다. "회사 그만뒀기 때문에 대출이 안 된다는 거예요. 아이고. 그 이야기를 집사랑이랑 하는데 얼마나.." 부인을 마주하고 있을 때의 면구스러움이 톰방톰방 커피 잔 위로 떨어지는 듯했다. "13년간 몰랐었는데 MBC 소속일 때와 아닐 때를 사표 쓴 날부터 알게 된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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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시절 사진을 보내달랬더니 이런 사진을 보내주었다. "설정샷이죠?" "물론 설정이죠."

뉴스타파가 손석희 뉴스9을 보는 복잡한 심경

요즘 TV로 보는 뉴스 중에서 가장 볼만하다는 손석희 뉴스9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다른 매체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을 다루니까 그런 부분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다만.."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말을 끌었다. "출범 자체에 위법성 소지가 있는 종편인 JTBC가 뉴스나인을 통해서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구요. 또한 지금 같은 태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걱정이기도 하죠." 그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보다. "하지만 뉴스타파가 특종으로 발굴한 국정원 간첩조작사건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처음부터 보도를 한 매체니까요. 우리들끼리도 '어랍쇼 자기들이 다 취재한 것처럼 해서 내보내고 있네' 이러면서도 '그래 저렇게라도 알려주는 게 어디야' 이런 마음이 드는 거죠. 하지만 조중동은 우리나라 기득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구축한 매체이고 JTBC도 그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고 봅니다. 계속 주시해야죠."

뉴스타파를 강소언론으로 만들고 싶다

"우리가 후원인 3만명에 30명 조직인데 10만명 100명 수준이면 확실한 파괴력을 갖출 수 있어요. 일단 양적으론 그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 정도까지 되려면 내부에서 기획 일도 누군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죠. 제가 기획쪽 일을 하면서 SNS나 뉴미디어 쪽으로 영향력을 증대시킬 방법을 찾으려구요." 그는 소문난 얼리어답터이기도 하고 뉴스타파 사람들에게 SNS사용법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번 더 물어봤다."여기서 신촌쪽으로 출근하다 보면 버스 유리창 너머로 MBC 상암사옥 보일 텐데 후회 안되겠어요?" 그는 살짝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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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출퇴근길에 마주치게 될 MBC 상암신사옥

"지금 MBC가 위상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워낙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고 인프라도 좋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 더 발전할 겁니다. 하지만 전 여기 뉴스타파에서 보고 싶은 것이 있고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요. 그걸로 된 거죠." 남자는 치매에 걸리면 자신이 가장 성취를 이뤘던 회사 앞에 찾아가고 여자는 처음 산 집이나 아들 집에 간다고 한다. 혹시 치매에 걸리면 어디로 갈 것 같으냐? 라는 질문을 하려다가 너무 어이없는 질문 같아서 다시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박대용 기자는 참 반듯한 사람이다. 오늘 만남을 통해서 박대용 기자라는 동전 뒷면을 엿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앞면과 뒷면이 똑같은 사람이다. 그의 선택이 부디 성공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