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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03일 11시 46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5월 03일 14시 12분 KST

겨울 안나푸르나, 설산의 황홀감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언플러그드 여행기 <2> 겨울 안나푸르나, 설산의 황홀감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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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가는 길, 설원이 이어진다. 앞선 일행이 다져놓은 등산로를 벗어나면, 1m 깊이의 눈 속으로 빠져버린다. 네팔/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starry9@hani.co.kr

히말라야 여행자들의 메카인 네팔 포카라를 출발해 트레킹을 시작한 지 엿새째,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4130m)에 발을 디뎠다. 1950년 8000m 14좌 중 처음으로 인간의 발길을 허락한 안나푸르나 제1봉(8091m), 웅장한 규모의 남봉(7219m), 돌올하게 솟은 히운출리봉(6434m)이 머리 위에 우뚝 솟아 있다. 맞은편에는 네팔인들이 신성시해, 등반을 허락지 않는 마차푸차레봉(6997m)이 석양에 붉게 물든다. 고산 증세로 숨이 가쁘고 머리가 아프지만, 황홀감이 모든 걸 압도한다.

이 황홀함을 느끼는 몸의 감각기관은 어디일까? 베이스캠프를 에워싸고 있는 7000~8000m 만년설 봉우리들의 장엄함이 상으로 맺히는 망막인가. 혼탁하고 분주한 도시를 떠나 히말라야의 맑고 차가운 대기를 호흡하는 코와 폐부인가. 날마다 7~8시간씩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피로가 뭉친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 그곳에 혈액을 보내느라 힘겹게 박동하는 심장인가. 아니면, 처음 4000m 고지를 밟아봤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인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반객들이 몰려서 생기는 병목 현상에 대한 대책으로 네팔 정부가 힐러리 스텝(8760m)에 12m 철제 사다리를 놓기로 했을 정도니, 4000m대의 트레킹은 특별할 게 없는 세상이다. 네팔에서는 6000m 이상만 등반으로 취급되고 그 이하는 그저 산길 걷기(트레킹)로 간주된다. 안나푸르나 지역을 찾는 이는 한해 10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대중화됐고, 트레커 대부분은 한국인, 중국인, 유럽인이다. 하지만 히말라야를 처음 찾는 등반객 저마다에겐 일생의 '버킷 리스트'로 올라 있던 각별한 경험이다. 다른 여행보다 준비할 것도 많다. 고산을 오르내릴 체력과 장비, 열흘 넘는 휴가와 적잖은 경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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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가는 길, 설원이 이어진다. 앞선 일행이 다져놓은 등산로를 벗어나면, 1m 깊이의 눈 속으로 빠져버린다. 네팔/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starry9@hani.co.kr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발길이 몰리는 곳은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안나푸르나는 비교적 평이하고 풍광이 빼어나 일찍부터 트레킹을 위해 개발됐다. 체력과 일정에 따라 다양한 코스가 있지만, 국내 여행자들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는 열흘 안팎의 여정을 선호한다. 현지인 가이드와 포터의 도움은 필수다. 국내의 트레킹 전문여행사를 통하거나, 포카라에서 현지 여행사를 찾아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나는 국내 전문여행사 프로그램을 선택한 5명 그룹에 속해 함께 움직였다. 첫날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해, 이튿날 오전 국내선 항공편으로 포카라로 이동했다. 30분이 안되는 짧은 비행이지만, 창 밖으론 고도 3500m의 항공기를 압도하는 히말라야 고봉들의 장관이 펼쳐진다. '잠시 뒤면 드디어 저 신성한 설산의 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니...' 트레킹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오른다. 포카라에 내리면 다시 한 번 탄성이 쏟아진다. 그림엽서 같은 안나푸르나 산군의 풍광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까닭이다. 포카라가 트레킹에 뜻없는 배낭여행객들까지 불러 모으는 매력이다.

포카라에서 두 시간가량 차량을 타고 트레킹이 시작되는 안나푸르나 지역으로 이동했다. 마을 어귀에서 트레킹 허가증을 받아 산행을 시작했다. 9일짜리 트레킹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엿새간 오르고, 사흘간 내려오는 일정이다. 하루 7~8시간씩 산길을 걷고, 잠자리와 식사는 루트 곳곳에 있는 로지(산장)에서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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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가는 길, 설원이 이어진다. 앞선 일행이 다져놓은 등산로를 벗어나면, 1m 깊이의 눈 속으로 빠져버린다.

첫날 나야폴(1070m)을 출발해, 힐레(1400m)에 짐을 풀었다. 조리팀과 포터를 동반하는 여정이라, 여행자는 휴대용 짐만 지고 산길을 걸어가고 로지에서 다양한 메뉴의 한식으로 식사를 제공받는다. 가이드, 요리사, 짐꾼을 동반한 트레킹이라는 점에서 지난 시절 '귀족여행'을 방불케 한다. 로지는 트레킹에 최적화되어 있다. 식당, 공용 화장실·샤워실을 갖추고 있지만, 숙소엔 침상 2개, 베개 2개, 알전구 하나가 시설물의 전부다. 난방장치는 물론 거울도, 전기콘센트도 없다. 지역단위로 소규모 수력 또는 태양광을 이용해 전기를 쓰는데 사정이 열악하다. 일부 로지에선 더운물 샤워가 가능하나 동작 날랜 몇 사람이 쓰고 나면 미지근한 물은 이내 찬물이 된다. 그나마 3000m 넘게 올라가면 고산증 우려에 샤워는 언감생심이다.

본격 트레킹은 둘쨋날부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걷고 또 걷는다. 고레파니(2860m)까지 고도를 1460m나 올리는 일정인데, 사진으로만 만나던 만년설 봉우리를 눈 앞에 보면서 한발한발 다가간다는 생각에 긴 오르막과 계단을 힘든 줄 모르고 걸었다. 어두워 숙소에 도착했다. 걸음을 멈추니 몸이 식고 비로소 고도가 느껴진다. 2월초 히말라야 2800 고지는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핫팩을 등에 붙이고 더운물을 가득 채운 식수통을 끌어안고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셋째날 새벽 헤드랜턴을 켜고 푼힐(3210m)에 올라, 일출을 기다렸다. 히말라야 3대 전망대라는 명성답게 푼힐에 서면 안나푸르나 산군은 물론 8000m 14좌의 하나인 다울라기리(8167m)봉까지 이어진 산악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다울라기리는 수십년 동안 세계 최고봉으로 군림해온 과거를 지닌 봉우리이기도 하다. 1808년 다울라기리가 서구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이때는 에베레스트 등 더 높은 봉우리의 존재가 알려지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에서 7번째로 높은 봉우리가 됐다.

동녘이 밝아오면 설산의 봉우리들은 장엄한 윤곽을 드러내며 구름과 어울려 시시각각 신묘한 빛을 만들어낸다. 하루종일 오르락내리락 걷지만 숙소인 타다파니(2680m)에 도착하면 아침보다 고도가 530m나 내려가 있다. 새벽에 잠을 깨 마당으로 나오면, 뜻밖의 풍경을 만난다. 칠흑같은 하늘에 쏟아져내릴듯 별이 가득하다. 고도 덕에 고개를 젖히지 않아도 정면에 숱한 별들이 반짝이는 걸 볼 수 있다. 일찍 잠들게 마련인 로지의 단순한 생활은 새벽잠을 몰아내고, 오염원과 광해 없는 히말라야 산중의 밤은 뭇별의 광휘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넷째날은 추일레(2245m), 촘롱(2170m)을 거쳐 시누와(2300m)까지 오르락내리락 산길을 지나간다. 촘롱은 깊은 산속에 있지만, 주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학교와 병원이 있고, 산중생활을 즐기며 장기 투숙하는 여행자들도 있다. 각종 장비를 갖추고 힘겹게 걷는 등산객들 사이를 교복에 가방을 맨 소녀들이 슬리퍼 차림으로 뛰어다니는 곳이다. 십여마리 노새에 짐을 부리면서 고샅길을 지나는 마을청년과 공동수도에서 머리를 감는 아낙을 만난다.

트레킹 루트의 만국 공통어는 환한 웃음과 "나마스테(안녕하세요)"다. 트레킹은 목적지보다 걷는 행위와 여정 자체의 의미가 큰 여행이다. 걸으면서 마주치는 풍광을 즐기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와 눈빛이 소중히 여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산 속 오지를 찾아가는 탐험이 아니다. 산간에서 오래전 방식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을 지나는 여정이다.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바퀴와 동력을 활용하기 이전처럼 살고 있다. 안쓰러우면서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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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네팔/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starry9@hani.co.kr

다섯째날부터는 민가를 뒤로 하고 산 속으로 들어간다. 도반(2590m), 히말라야(2900m) 로지를 거쳐 데우랄리(3200m)에 여장을 풀었다. 900m를 올라오니 주위가 다시 한겨울이다. 수목한계선 근처라 울창한 숲은 사라지고 관목이 전부다. 로지 내부는 춥고 화장실 물은 얼어 있다. 4000m에서 찾아올지 모를 고산증을 걱정하며, 저녁식사 때 숙면을 위해 곁들이던 반주도 삼간다. 다음날 온화한 일기를 기원하지만, 수시로 변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고산의 기후다.

여섯째날, 거리는 짧지만 트레킹에서 가장 힘든 고비다.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3700m)를 거쳐 목적지인 에이비시로 향하는 날이다. 해발 3000m 이상에서 산행은 이전까지와 전혀 다르다. 그동안 산책하듯 가볍게 산을 오르던 이들이 전혀 속도를 내지 못한다. 두통과 메스꺼움,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일행들이 늘어났다. 고산증세다. 기압이 낮은 탓에 행동식으로 챙긴 스낵이 터질듯 부풀어오르고, 로션 등은 팽창해 내용물이 쏟아졌다. 인체 내부도 비슷한 과정을 겪느라,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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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지역에서 등반객들의 눈길을 한눈에 받는, 네팔인들의 성산 마차푸차레(네팔어로 물고기꼬리라는 뜻, 정상 부근이 물고기 꼬리처럼 두갈래로 갈라져 있다). 네팔/구본권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 starry9@hani.co.kr

다행히 눈보라 대신 햇살이 강렬하다. 2월 초 에이비시 가는 길엔 눈이 1m가량 쌓여 있다. 만년설 봉우리로 에워싸인 눈부신 눈밭을 걷는 설산 트레킹의 진수를 느끼는 코스다. 등산로를 벗어나면 허벅지까지 눈 속으로 빠진다. 해발 4130m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일생 최고(最高)의 잠자리를 맞지만, 로지는 소박하기 그지없다. 정신은 혼미하지만 황홀하고, 뿌듯하다.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 눈밭으로 나와 안나푸르나 산군을 비추는 장엄한 일출을 보고 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은 고도가 높지만 올라올 때와 달리,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고 홀가분하다. 사흘간의 하산길 트레킹은 설산을 잠시 만난 기쁨과 이내 이별하는 아쉬움이 엉킨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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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