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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13일 14시 06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4월 14일 14시 12분 KST

각자의 시대, 세대의 걸작

Gettyimage/이매진스

죽음에 대해서는 데면데면한 편이다. 남은 자들은 슬프고 때로 억울할 수도 있지만 떠난 자는 오히려 편하고 홀가분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자유일지도 모른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생각한다. 그 믿음조차 분명한 것은 아니고 어렴풋한 상상일 뿐이다. 어쩌면 내세가 더 편할지도 몰라. 신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을 지도. 혹은 진정한 그이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일지도.

지난 1월 10일 데이비드 보위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런 기분이었다. 지난 해 히트한 영화 <마션>에서는 데이비드 보위의 < Starman >이 흘러나왔다. 화성에 홀로 남은 남자의 고독이라기보다 담담한 생존기에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 Space Oddity >와 <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라는 제목의 앨범을 내고 < The Man Who Fell to Earth >라는 영화에도 나왔던 데이비드 보위는 정말 지구의 존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외계인에서 어떤 때는 양성애자로 변신했고, 시대가 변할 때마다 첨단의 트렌드에 앞장섰던 선구자 데이비드 보위는 항상 낯설었다. 수십 개의 얼굴을 가진 부처가 이승에 내려와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올해 마지막으로 발표한 앨범의 이름은 < Blackstar >이다. 자신의 별로 돌아갈 때를 예감한 것처럼, 아니 분명히 인지하고 지은 제목이라고 믿는다. 그는 선지적인 능력이 있었다고 믿는다. 혹은 영화 < Hunger >에서처럼 뱀파이어로 영원한 삶을 살다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던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작가나 감독, 배우, 뮤지션이 세상을 뜰 때마다 순간들이 떠오른다. 대개는 선명하게 그들의 작품이 읽히거나 들리던 순간. 데이비드 보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게 정말인가 아연하던 그 시간에 내 기억은 과거로 달려갔다. 좋아하는 노래들인 < Wild is The Wind >, < The Man Who Sold the World >, < Heroes >, < Velvet Goldmine > 등이 머릿속에 마구 흐르고 있었지만 무엇인가 아쉬웠다. 아마도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을, 발표하는 순간 바로 구입한 것은 < Let's Dance >(1983)가 처음이었다. 그의 명반들은 모두 발표된 후 몇 년 뒤 알게 되고, 뒤늦게 사서 들었다. 물론 비틀즈도, 레드 제플린도, 도어즈도 다 그랬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로 이어지던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하기에는 너무 어렸으니까. 아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년 말, 지인인 음악평론가를 만났다. 그는 시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많은 음악을 듣고, 수많은 정보를 집적해도 당대에 그 음악을 함께 들은 사람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비틀즈의 음반들이 나올 때, 바로 그 노래를 들으며 당대의 공기, 아우라를 함께 했던 이들은 단지 기억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이 대하드라마처럼 유장하게 기록되어 있고, 필요할 때 각각 재생된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들국화의 <행진>과 김현식의 <사랑했어요>를 처음 들을 때의 기억이 있다. 혹은 산울림이 막 데뷔했을 때, 문화체육관에 가서 공연을 봤던 기억 같은 것. 그 순간의 공감각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걸작이 된 영화나 노래를 보고 들으며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상상한다 해도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래 산 이들이 무조건 우월하고 깊이가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각자에게는 각자의 시대가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을 때, 그들에게 열광하며 한 시대를 보낸 이들에게는 다른 세대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 있다. 누구나 그렇다. 살아가면서 퀴퀴한 극장에서 과거의 영화를 보며 빠져든 경험이 모든 것인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당대의 문화예술에 매혹되며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고 살아왔다. 그 순간을 되살리는 것은 너무나도 아찔하고 즐겁다.

영화로 따진다면, 나에게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와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를 극장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영웅본색>을 보고,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굳이 사 입고 성냥개비를 물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으니 모른다, 가 아니라 그 시절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영화 이상의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젊음이 지나간 후에 경험한 것들은,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사춘기 시절, 젊었을 때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이해하고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의 두 세배, 아니 열배 이상의 강도라고. 같은 시대를 살아도 다를 수밖에는 없다. 카라의 <미스터>를 처음 동영상으로 보고 느꼈던 쾌감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나의 시대는 아니다. 다만 이 시대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함께 하는 것이 즐거울 뿐.

시대를 견디고 살아남으면 걸작이 되고, 거장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거장이 평생 위대한 걸작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 보위 역시 80년대가 지나면서는 수그러들었다. 여전히 좋은 음악이지만 그의 전성기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데이비드 보위의 죽음을 보면서, 아니 계속해서 세상을 뜨는 70년대와 80년대 전성기였던 작가와 감독과 뮤지션 등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순간의 시대정신은 어디에 있을까. 훗날 우리는 지금의 어떤 작가와 감독과 뮤지션을 기억하고 추모하게 될까. 그 시절에 나의 모든 것을 현혹시켰던,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도 있을 것 같았던 위대한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 결국은 당대를 살아가는 자들의 몫이고 결실이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부딪치며 즐기는 자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흔적들. 그 흔적을 미래에 되살려내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