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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08일 08시 39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2월 09일 14시 12분 KST

마블과 DC가 아닌 미국의 코믹스

〈사가〉 브라이언 K. 본 글/ 피오나 스테이플스 그림

미국의 코믹스라면 누구나 슈퍼맨과 배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 슈퍼히어로 만화를 떠올린다. 영화로도 대성공을 거두었고, DC와 마블은 미국 만화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슈퍼히어로 아닌 만화들도 대단히 많다. 그동안 국내에 들어온 슈퍼히어로 이외의 미국 만화라면 아트 슈피겔먼의 〈쥐〉, 로버트 크럼의 〈아메리카〉, 대니얼 클로우즈의 〈고스트 월드〉 등 대체로 예술성이 짙거나 풍자적인 작품들이었다. 슈퍼히어로 만화가 아니면서도 대중적인 코믹스라면 드라마로 대인기를 끈 〈워킹 데드〉를 들 수 있다.

〈워킹 데드〉는 DC와 마블이 아닌 이미지 코믹스의 작품이다. 캐릭터와 스토리의 모든 판권을 회사가 소유하는 시스템에 불만을 품은 작가들이 DC와 마블에 대항할 회사들을 많이 설립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비평과 판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는 〈사가〉도 이미지 코믹스의 작품이다. 이미지 코믹스는 〈워킹 데드〉와 〈사가〉의 성공으로 미국 시장에서 3위의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면서, 기존의 DC와 마블과는 또 다른 분위기와 질감의 코믹스를 선보이고 있다.

DC와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은 길게는 70, 80년을 이어지며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변화하고 성장해왔다. 이미 존재하는 캐릭터를 변주하거나 자신의 스타일로 재창조하는 작업도 매력적이고 가치가 있지만, 작가 스스로 머릿속에서 온전히 끄집어낸 캐릭터와 이야기를 광활하게 펼쳐나가는 것은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만화에서도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인 조지 R.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같은 대하 판타지, 스페이스 오페라, 범죄 서사극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Y:더 라스트 맨〉과 〈엑스 마키나〉의 작가인 브라이언 K. 본이 쓰고 피오나 스테이플스가 그린 〈사가〉는 2012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후 아이즈너상 '최우수 연재 만화' 부문 3년 연속, 하비상 '최우수 연재 만화' 부문 4년 연속으로 상을 받았다. 최고의 SF에게 수여되는 휴고상에서는 2013년 '최우수 그래픽 스토리상'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3년간 단행본 기준으로 미국에서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브라이언 K. 본이 〈사가〉를 탄생하게 된 계기는 〈스타워즈〉다. 어린 시절 〈스타워즈〉에 빠졌고,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일찌감치 구상하며 오랜 시간 숙성시켜온 작품이 바로 〈사가〉다. 가족을 가지면서 느꼈던 가족에 대한 사랑도 더해졌다. 작가가 밝힌 대로 〈사가〉는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다. 수많은 행성과 다양한 종류의 외계인이 등장한다. 〈스타워즈〉는 영화의 특성상 아이들도 볼 수 있는 가족용 스페이스 오페라이지만 〈사가〉는 어른들을 위한 코믹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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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평등한 우주의 존재들

랜드폴과 리스. 우주에서 가장 큰 행성 그리고 달이다. 이웃해 있으니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지 않다. 게다가 외양도 서로 다르다. 랜드폴에 사는 종족은 날개가 있고, 로봇 왕족의 지배를 받고 있다. 리스 사람들은 뿔이 달려 있고, 마법을 쓴다. 서로 다른 외양과 생활의 기반, 사고방식이 다른 랜드폴과 리스는 철천지원수처럼 싸우고 우주의 모든 행성을 둘로 갈라놓는다. 랜드폴의 편인지, 리스의 편인지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미워한다면 한쪽을 절멸시키는 것으로 싸움의 막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랜드폴이나 리스 어느 하나가 완전히 파괴된다면 다른 한쪽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그것도 불가능하다.

랜드폴의 여성인 알라나는 군대에서 감옥을 지키는 일을 맡게 된다. 그리고 포로인 리스에서 온 남자 마르코와 사랑에 빠진다. 탈옥, 탈영을 한 알라나와 마르코는 사랑에 빠지고, 도망을 치고, 아이를 낳는다. 랜드폴이건, 리스이건 그들의 사랑을 용납할 수 없다. 괴물, 짐승이라고 부르는 상대와 사랑에 빠져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다니. 그 아이는 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 아이는 대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알라나와 마르코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랜드폴과 리스 모두 그들을 죽이려 한다. 하지만 랜드폴과 리스의 싸움 사이에서 그들은 공존의 유일한 희망이자 믿음이 될 수 있다. 전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지속된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를 완전히 절멸시키지 않는다면 그릇된 믿음을 버리는 것뿐이다. 평화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알라나와 마르코는 일종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서로 적대하는 종족이지만 사랑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남녀. 가문이 아니고, 종족도 아니고, 괴물과 인간이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할 때 세상은, 우주는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가〉의 매력은 완벽하게 평등한 존재들에 있다. 알라나와 마르코의 외양은 다르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하나는 천사처럼 날개가 있고, 하나는 악마처럼 뿔이 달려 있다. 그들을 쫓는 킬러들, 프리랜서라 불리는 이들은 저마다 모습이 다르다. 윌은 우리 인간과 똑같아 보이고, 그가 사랑하는 스토크는 눈과 팔다리가 몇 개인지 한참 세 봐야 한다. 별 하나가 하나의 존재이기도 하고, 죽어 있는 존재들도 살아있는 이들과 대화를 하고 영적인 관계를 맺기도 한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혐오하는 것은, 당장 싸우고 있는 랜드폴과 리스뿐이다. 〈사가〉는 남자와 여자, 산 것과 죽은 것, 인간과 동물, 외계인 등 모든 존재를 같은 위치에 놓는다.

스페이스 오페라, 상상력의 절정

〈사가〉는 광대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우주의 모든 것,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의 모든 것을 상상하여 마음껏 캐릭터를 놀게 한다. 가상 세계의 판타지와 다르지 않다. 우주의 법칙 안에서, 우리가 모르는 마법의 원리까지도 포함하여 그들은 자유롭게 뛰어논다. 그 유려한 상상력을 즐기는 것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보는 즐거움이다.

또한 '스타워즈' 시리즈가 그랬듯이, 〈반지의 제왕〉이 그랬듯이 단지 이야기를 글로 읽는 것과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는 것은 다르다. 〈반지의 제왕〉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과거에 판타지를 전혀 읽지 않았던 많은 이들도 판타지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사가〉를 글로 읽는다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가〉는 만화이고, 그래픽 노블이다. 피오나 스테이플스의 그림은 선명하고 활기차다. 온갖 종류의 종족들을 저마다 특징을 잡아내 생생하게 움직이게 한다. 액션 장면도 잘 꾸며져 있다. 알라나와 마르코가 탄 우주선이 위험에 처하고, 윌의 우주선이 파괴되었을 때의 긴박한 상황을 그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손에 땀이 난다. 장면마다 긴박감, 운동감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섹스 장면 역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들의 섹스를 보는 것은 약간 괴이하면서도 짜릿하다.

브라이언 K. 본의 이야기와 함께 대사도 최상급이다. 농담과 진담이 곳곳에서 절묘하게 결합한다. 알라나가 누구인지, 마르코가 누구인지 그들의 말만으로도 느껴진다. 대담하고 순진한 마르코와 열정적인 몽상가 알라나의 조화는 어떤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활기차고 유머가 넘치면서도 뜨겁다.

아직까지 〈사가〉를 보지 않았다면, 스페이스 오페라의 재미를 아직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면 일단 집어들 것을 권한다. 당신이 어른이라면, 어른들의 휘황찬란한 판타지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사가〉를 영화로, 혹은 드라마로 보기를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