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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01일 06시 32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01일 14시 12분 KST

어느 정치 철새를 추락시킨 공주님의 진실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당")이 선거대책위원장으로 김종인씨를 영입했다. 김종인씨의 영입을 더민당 측에서는 김씨가 입안했다고 주장하는 헌법 제119조 제2항의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을 들어 "경제민주화님의 입당"이라고까지 선전하고 있다. 또한 김종인씨는 지난 대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며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면 이른바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어 여당이 중도층의 표심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정작 박근혜 대통령 당선 후에는 소위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김종인씨의 더민당 영입은 이번 4월 13일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더민당으로 하여금 경제민주화 의제를 선점하게끔 하여 더민당이 국민의당과의 제1야당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하였다는 관측들이 보인다.

그러나 김종인씨는 실은 광주학살을 자행한 직후에 독재자 전두환이 만든 초헌법적, 초법적 기구인 소위 국보위에 가담하는가 하면, 신군부의 5공 및 6공 정권에서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며 독재정권에 부역하여 왔다. 또한 김씨는 김영삼 정부 때는 동화은행 사건과 관련하여 2억원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가 하면, 1996년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부패 및 비리 전력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인씨는 진영을 바꾸어 반(反)노무현계 야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 및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는가 하면, 한때는 안철수 의원의 멘토로 불리기도 했고, 앞에서 보았듯이 박근혜 정권 탄생에 기여를 하였고, 이번에는 또 다시 진영을 넘어 더민당에 가담했다.

필자는 헌정질서를 깡그리 부정한 신군부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으며, 부패와 비리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야가 다투어 찾으며, 보수와 진보를 넘나든 김종인씨의 이런 화려한 정치 경력을 살펴 보면서 역시 정치적으로 해방 후 우리나라 못지 않은 극심한 혼란과 부침을 겪었던 프랑스 대혁명기 무렵 맹활약한 프랑스 정치인 푸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어찌 보면 데칼코마니처럼 김종인씨와 닮은 푸셰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김종인씨는 이번에 비례대표를 더민당 대표라는 문재인씨에게서 보장받아서 임기를 마치면 81세(!)가 된다는데 그와 평행이론이라 할 만한 정치역정을 지냈던 푸셰는 어떤 말로를 보였을까? 그것이 오늘의 주제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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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월 3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참배를 앞두고 5·18 정신실천연합 회원들로부터 과거 국보위 전력을 비난받고 있다.

1. 수도원 부설 학교 교사에서 온건파 정치인으로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나폴레옹 시대, 다시 왕정복고가 된 격변의 시대를 산 조지프 푸셰는 원래는 가톨릭 수도원에 부설된 학교의 교사로서 사회 경력을 시작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가 미국의 독립전쟁을 후원한 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 재정이 어려워져서 170여년 만에 국민들로부터 과세협찬을 받기 위하여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하였으나 구체제(앙샹 레짐) 하에서 신음하여 오던 당시 프랑스인들은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여 삼부회는 국민의회로 바뀌고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며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래 보수적인 배경에서 출발한 푸셰여서 그런지 푸셰는 국민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면서도 온건파 정당인 지롱드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2. 국왕 시해자에서 리옹의 도살자이자 빨갱이로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은 초반의 계급 협조적인 분위기에서 특권을 놓치기 싫은 국왕과 귀족들이 외국에 간섭을 요청하고 국왕 가족들이 바렌느 도피 사건까지 일으킨 것이 폭로되자 점차 과격화된다. 결국 혁명세력은 루이 16세의 목을 단두대에서 치자는 논의까지 하기에 이르는데 당시의 혁명의회인 국민공회에서 국왕을 사형시킬 것인지 여부를 놓고 표결이 벌어진다. 푸셰는 온건파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반대표를 던질 것으로 예측되었었다. 그러나 뒤에도 밝혀지듯이 푸셰는 정계의 풍향을 읽는데 무척 예민했기 때문에 과격화되는 혁명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자 그는 재빨리 당파를 바꾸어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다.

"개종한 사람보다 더 열렬한 신앙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말에 어찌 보면 딱 맞는 예가 푸셰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국왕시해(弑害)에 찬성하며 프랑스 대혁명기의 과격파에 가담한 푸셰는 이제 극좌파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는 당시 로베스피에르 독재의 집행기구였던 공안위원회의 명령을 받아 리옹에 파견되자 동료인 콜로 데르부와와 함께 교회를 약탈하고 보수적인 반혁명 세력들을 처형하는 일에 앞장선다. 당시에 푸셰가 반혁명세력들의 재산을 압수하며 발표하였던 포고문들을 두고 푸셰의 전기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세계 최초의 공산당선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수도원 부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온건파 정당 출신 의회 의원이었던 자의 극적인 정치적 입장 변경이었다.

3. 다시 반동(反動)의 앞잡이가 되는 푸셰

그런데 푸셰의 말 갈아타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푸셰가 이렇게 물불 가리지 않고 과격한 재산 압수와 반(反) 종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시 집권당인 자코뱅당의 독재를 주도하고 있던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를 불편하게 하였고, 푸셰는 이번에는 로베스피에르에 맞서는 입장이 된다. 보수와 진보를 오갔던 푸셰의 불분명한 입장은 로베스피에르의 입맛에 딱맞는 공격 소재였으나 푸셰는 카멜레온 같은 변신을 해왔고 또 앞으로도 할 정치인답게 막후에서 권모술수를 부려 로베스피에르를 실각시키는 테르미도르 반동을 꾸며낸다.

푸셰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들어서게 된 총재정부에서는 어쩌면 자신의 기질에 딱 맞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건 바로 경찰 총수라는 직책이었다. 왼쪽에서의 과격파인 자코뱅파의 봉기와 오른쪽에서의 과격파인 왕당파의 음모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며 겨우 연명하여 오던 총재정부에서 좌우를 골고루 거쳐서 양쪽 모두에 발이 넓고 권모술수가 무궁무진한 푸셰야말로 경찰 총수 적임자였다. 심지어 푸셰는 이때 뒷날 나폴레옹의 황후가 되는 죠세핀마저 정보원으로 활용했을 정도라고 한다.

4. 나폴레옹 황제를 모시는 신하가 된 푸셰

하지만 푸셰가 누구이던가! 이미 수도원 교사에서 온건파 정치인을 거쳐, 후대에 살았으면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행태를 보이다가도 과격파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에 보내는데 가담하였던 희한불금의 정치 역정을 보였던 이였기에 그깟 총재정부 정도를 배신하는 것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울 수 있는 것이 푸셰이기도 했다. 푸셰는 이번에는 당시 이탈리아에서의 승전으로 인기가 높았던 장군 나폴레옹과 총재 정부에서 가장 부패했던 바라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초기에 활약하였던 시예스 신부가 조직한 쿠데타 음모를 사전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눈감아 주었고 이 쿠데타(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는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 및 제정(帝政)에 가담하여 여전히 경찰 총수의 지위를 차지하는 희한불금의 처세술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황후마저 과거에 정보원으로 썼었던 음모와 배신의 화신 푸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푸셰를 제거하려고 하다가 거꾸로 역습을 당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예를 잘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푸셰를 조심스럽게 다루었고 이제 자신이 황제가 되어 국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경무대신이 필요하지 않다는(즉 푸셰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경찰을 담당하는 대신 장관 자리 자체를 없애 버리는 방법으로^^) 푸셰를 은퇴시킨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실패로 궁지에 몰린 다음에도 푸셰가 자신에 대항하는 음모에 가담할 것을 염려하여 중요하지 않은 외국의 대사 같은 자리들로 빙빙 돌리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망하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복위하는 왕정복고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모사꾼 푸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wikimedia

Joseph Fouché (1759-1829) © commons.wikimedia.org

5. 부르봉 왕가의 신하가 된 푸셰

푸셰는 자신이 한껏 음모를 펼칠 수 있던 기회를 놓쳐 버리고 이렇게 정치무대에서 퇴장하는가 했는데, 몰락한 줄만 알았던 나폴레옹이 유배지인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다시 프랑스의 황제가 되는 이른바 백일천하라는 무대가 열리자 푸셰는 극적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 프랑스의 제1통령 및 황제로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이었으나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라이프치히에서 유럽 각국의 군대에 패하고 나서 쫓겨난 다음에는 비록 다시 황제의 자리에 복귀하기는 했으나 인재를 영입(웃음)하고 다시금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를 불러 모으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푸셰는 이때 다시 나타났고, 나폴레옹은 악마와 손을 잡는다는 생각이었겠지만 다시금 그래도 정부를 제대로 굴러가게 할 사람은 푸셰 같은 경험과 실력을 가진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에 푸셰를 다시금 기용한다.

그러나 푸셰는 언제나 자신이 모시겠다고 한 주군(主君)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앞에 둔 이였기 때문에, 복귀한 황제 나폴레옹을 모시는 척하면서도 뒤로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유럽 구체제의 군주들 및 재상들과 거래를 계속하였다. 결국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퇴하자 푸셰는 나폴레옹을 쫓아내고 부르봉왕가의 루이 18세의 복귀를 가능하게끔 한다. 루이 18세의 형인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동하였던 이가 푸셰였음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역사의 희비극이 아니었나 싶다. 루이 18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인과 사별한 후 다시 처녀 장가를 간 푸셰를 위한 결혼식 증인이 되어주기까지 하였으니 변화무쌍한 프랑스 혁명기, 나폴레옹 시대, 왕정복고기를 잘 헤쳐나온 푸셰의 만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나 싶었다.

6. 푸셰의 몰락을 가져 온 어느 소녀의 기억

그런데 푸셰가 사형을 찬성했던 루이 16세의 가족들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으니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사이에서 난 딸인 앙굴렘 공작부인이었다. 앙굴렘 공작부인은 아빠와 엄마가 모두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남자 형제가 실종된 이 불행한 가족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녀는 아빠와 엄마가 단두대에 끌려가고, 엄마의 친구였던 랑발 공녀의 목을 꼬챙이에 꽂아 성난 군중들이 몰려오던 모습, 엄마가 그녀와 남매 간인 어린 루이 17세를 강간했다는 끔찍한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모습들을 모두 소녀 시절 똑똑히 목격하였었다. 그리고 그런 국왕시해파들 중에 선두에 섰던 푸셰가 이제 자신의 삼촌의 축복 속에 새장가를 들어 잘 나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앙굴렘 공작부인은 비열한 푸셰가 이렇게 뻔뻔스럽게 잘 나가는 상황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녀는 푸셰가 참석하는 행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파티가 되었건, 국왕이 주최하는 행사가 되었건 국왕 루이 18세의 조카딸인 앙굴렘 공작부인은 푸셰에게 초청장이 갔는지, 푸셰가 오는지 확인해 보고 푸셰의 참석이 확인되면 참석을 거부했다. 부모와 남자 형제를 잃고 혹독한 망명생활 끝에 돌아 온 앙굴렘 공작부인의 이런 태도는 곧 널리 알려졌다. 그러자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앙굴렘 공작부인을 따라 푸셰가 나타나는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푸셰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국왕 루이 18세마저 조카딸의 이런 뜻을 받아 들여 푸셰가 오는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고, 푸셰의 인사를 받기도 거절하기 시작한다.

푸셰는 몰락했다.

루이 16세의 신하로 출발하였으나 그의 목을 치자는 것에 찬성하였고, 교회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고 반혁명파를 처단하는데 앞장섰다가, 재빨리 편을 바꾸어 과격파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를 치는가 하면, 다시 총재정부의 경찰 총수를 거쳤으나, 정권을 훔치는 도둑질을 한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눈감아 주었으며, 다시금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자신이 죽였던 루이 16세의 동생의 축복을 받으며 새 장가를 가기까지 했던 처세의 달인 푸셰였는데 한.소.녀.의. 기.억.이. 그.를. 몰.락.시.킨. 것.이.다.

이렇게 쫓겨난 푸셰는 망명했고, 비참한 생을 영위하다가 죽었다. 루이 16세도, 로베스피에르도, 나폴레옹도, 루이 18세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소녀의 기억이 이루어낸 것이다.

7. 그렇다면 김종인씨는?

꿋꿋하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계속하여 지키기 보다는, "정치인에게 이념이 무슨 소용이냐, 한자리 하겠다는 일념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누군가의 말에 충실하게 살았던 푸셰는 다행히 진실한 사람들이 공주님을 응원하여 주어(응?) 위와 같이 몰락하였으나, 필자가 그러한 푸셰에 견준 김종인씨는 더민당 선대위원장에 이어 비대위원장 자리까지 꿰차고 아직까지는 잘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씨를 두고, 독재정권에 충성을 다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냐는 볼멘 목소리가 없지가 않지만, 왕정복고기의 주권자인 국왕이 조카딸인 앙굴렘 공작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푸셰를 찍어냈듯이, 김종인씨의 운명도 결국 이번 총선거에서 주권자인 국민들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