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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06일 06시 40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06일 14시 12분 KST

79년 전의 중국 국공(國共)회담(?)

중국 본토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대만에 있는 중화민국의 마잉주 총통이 이번 토요일(11월 7일) 싱가포르에서 회담을 갖는다고 한다. 두 사람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중국과 대만의 최고 정치지도자일뿐만 아니라 또한 근현대 동아시아에서 제일 오래된 정당인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을 현재 각각 대표하는 정치인들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국공(國共) 양당의 수뇌가 만났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5년에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과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이 회담한 것이라고 하니, 두 사람의 만남은 중국과 대만 사이의 관계를 일컫는 양안(兩岸)관계뿐만 아니라 근 90년 가까이 애증(愛憎)이 교차했던 국공 양당 관계에도 새로운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원래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중국 국민당 정부가 이렇게 대만으로 쫓겨가고, 반면에 중국 서북부 내륙의 연안(延安)에 웅크리고 있던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79년 전에 있었던 양당 지도자들의 극적인 조우(?)에서 비롯된 것인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 번 풀어 볼까 한다.

wikipedia

1945년 8월 28일부터 중국 중경(충칭)에서 열린 협상에 참석한 모택동(앞줄 오른쪽부터), 장개석, 미국 특사 패트릭 헐리.

1936년 12월 12일, 중국 국민정부의 총통 장개석은 권력과 영광의 절정에 있었다고 할 만했다. 현대 중국의 국부(國父)로, 중국 국민당의 터전을 닦은 손문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북벌을 단행한 장개석은 당시 중국인들을 도탄에 빠트렸던 군벌들을 몰아 내고 중화민국의 기치 하에 중국을 사실상 통일했다(1929년). 이러한 장개석의 앞길을 방해하는 세력으로는 중국 내부에서는 공산당이 있었으나 장개석은 공산당과의 합작을 깨어 버린 후(1927년 4월 12일), 독일 군사고문의 도움으로 꼼꼼하게 공산당을 솎아 냈으니(초공전(剿共戰)) 견디다 못한 이들 "공산비적(共産匪賊) 즉 공비"들은 그들의 근거지인 강서성 서금을 버리고 몇 만리를 도망쳐 중국 서북부의 연안에 겨우 둥지를 다시 꾸린다(대장정(大長征)). 이제 이 공산당 것들에게 마지막 일격만 가하여 숨통을 끊어 놓으면 100%의 국민통합(응?)이 달성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이런 장개석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하게 그를 골치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중국 동북부를 이미 집어 삼키고 화북 지방으로 야금야금 세력을 뻗치고 있던 일본이었다. 이런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당시 중국의 학생과 지식인들은 장개석에게 내전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힘을 합쳐 일본에 맞서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으나, 장개석은 우선 내부의 적인 공산당을 정리하고 난 후에 일본에 맞서겠다는 방침(안내양외(安內攘外)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공산당은 이런 여론에 기대어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고 선전전에 힘썼으나, 칼자루를 쥔 장개석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장개석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데 막판에 몰린 중국 공산당 군대인 홍군(紅軍)을 토벌하는 임무를 만주(동북3성)의 군벌인 장학량에게 맡긴 것. 장학량은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의 아들. 요새말로 하자면 대표적인 금수저(응?)인 셈인데 이 도련님이 문제적인 인물인 것이 나름 이상주의에 불타고 있었던 것. 그 이상주의란 것이 파시즘의 시대인 당시(1930년대)에 유럽을 방문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은 "지도자(필자주(註):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두고 한 말이다)가 훌륭해서 나라가 잘 되고 있다" 뭐 그런 취지의 평가를 하는 수준이었으나, 반면에 자신이 아빠한테 물려 받은 만주를 일본이 집어 삼킨 것에 대해서는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었던 조금 기괴한 느낌적 느낌이 드는 상태였던 것.

이렇게 자신 안에 있는 기이한 열정에 일본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이 뒤범벅이 된 혈기왕성한 젊은 장군 장학량에게 장개석은 일단은 공산당을 쳐서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니 일본과 싸울 생각은 접으라고 하였으니 장학량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 거기다가 동북3성에서 쫓겨난 장학량과 그 휘하의 부대를 고향에서도 멀리 떨어진 중국 서북부의 공산군 토벌전에 투입했으니 낯설고 물설은 곳에서 원하지 않은 임무를 맡은 젊은 장군과 그 휘하의 병력은 말하자면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이런 공비 토벌군(뭐래니?) 내부의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한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 젊은 장군과 그 휘하 부대를 "사상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맹렬한 비밀 공작을 전개한다. 즉 "고향인 동북 3성을 떠나서 머나먼 서북까지 와서 이게 지금 무슨 헛고생인가. 부모, 형제자매와 처자식은 지금 동북에서 일본군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데 거기에 복수하기는커녕 서북에서 동족인 같은 중국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니 이게 웬 말인가!" 뭐 이런 식으로 동북군과 그 수장인 장학량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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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량 © wikipedia

장학량의 공비토벌전이 이런 사정들이 겹쳐 진전이 없자 장개석은 당시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남경에서 전선과 가까운 서안까지 독려하기 위해서 나온다. 그러나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은 오히려 장개석을 감금ㄷㄷㄷ하고 장개석에게 일본에 대한 무저항 주의를 폐기하고, 공산당과 손을 잡고 항일연합전선을 만들라고 위협(병간(兵諫))하기에 이른다.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던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청년 장군 장학량의 객기 덕분에 완전히 상황이 180도 달라져서 적의 수장을 사로잡거나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라고 하겠다. 한편 총통이 붙잡힌 남경에서는 난리가 나서 강경파들은 총통이 죽든 말든 서안을 폭격하여 하극상(下剋上)을 자행한 장학량 일당을 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까지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서안사변(西安事變)).

무력 충돌로 이어지고 장개석, 장학량, 그리고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인 모택동, 주은래 등의 희생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이 서안사변은 그러나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극적으로 해결된다. 송미령은 송씨왕조라고까지 불렸던 대부호 집안의 딸로 그녀의 자매들은 중국의 부를 주물렀던 공상희에게 시집갔고(송애령), 아빠의 친구인 손문과 결혼했다가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까지 지낼 정도(송경령)로 시대를 풍미한 여걸들이었는데 송미령도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임. 특히나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송미령은 장학량과도 요새말로 하면 남사친/여사친 관계였던 것 같고, 송미령의 작용 덕분인지 당장이라도 장개석을 죽일 기세였던 장학량은 장개석을 풀어주는 것에 합의한다.

합의 내용은 그때까지 내전을 계속 중이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통일전선을 만드는 대신에 장개석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이 서안사변의 관련자들은 진실로 대륙의 대인 같은 풍모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담판이 이루어진 후에 아무런 조건 없이 장개석은 풀려 나서 부인과 함께 남경으로 돌아왔고, 심지어 장학량은 윗사람을 감금했다는 책임을 지겠다며 장개석을 따라 나서기까지 한다. 그쯤 되었으면 공산당의 사주로 겁박당해서 이룬 합의 따위 무시하겠다고 할 수도 있을 법한데 장개석은 약속한 대로 공산당과의 항일 통일전선을 이행하고 공산당에 대한 토벌전을 중단했으며, 공산당의 군대를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하여 자신의 중국 국부군의 일부에 편입시킨다. [삼국지연의]를 빰치는 극적인 드라마가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항일 통일전선은 덜컹거리기는 했으나 국난을 맞아 정파의 이익을 챙기는 것보다는 국익을 앞세워 당시 중국 지도자들이 대국적으로 정치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예가 아닐까 싶다.

물론 장개석은 이렇게 서안사변으로 중국 공산당을 되살려 주는 것도 원인이 되어, 나중에 일본이 물러 간 다음,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해, 중국 대륙을 잃고 대만으로 쫓겨 갔다고 볼 여지도 있겠다. 그래도 중국과 대만은 분단이 되고 나서도 1980년대 중반부터 서로 삼통(三通) 즉 통상(通商), 통우(通郵), 통항(通航)을 하며 교류하고 있는 것에 더해 이제 70년 만에 양국 정상들이 회담까지 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니, 몇십 년 만에 겨우 며칠 상봉한 이산가족들도 생이별을 하여야 하고,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현재 여야 관계도 참담한 지경인 우리 입장에서는 일단은 부럽기만 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참 사족(蛇足)으로 청년 장군 장학량의 운명에 대해서만 끄적끄적. 장개석은 서안사변에서 한 항일통일전선의 약속은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도 지켰으나 자신을 당초에 감금했던 장학량에 대해서만은 깨알같이 복수했다고. 장개석은 장학량을 감금했고, 심지어 대만으로 쫓겨 가면서도 장학량은 계속해서 연금상태에 놓아 두었던 모양. 장개석이 죽고 대만이 민주화가 되어서야 장학량은 겨우 풀려났고 그가 죽었을 때 미국에 살고 있던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이 애도하였다고 하니 중국 대륙의 운명을 바꾼 대사건을 일으킨 장군이었다가 평생을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내다시피 한 장학량에게 그녀의 애도가 위안이 되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