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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9일 14시 41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29일 14시 12분 KST

시간을 달리는 박근혜

한겨레

박근혜 대통령의 모친인 육영수 여사님은 1974년 광복절(8월 15일) 기념식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맞으셔서 절명(絶命)하셨다. 암살범 문세광은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노렸으나, 박정희는 연단 밑으로 피했고, 미처 피하지 못하신 육영수 여사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여 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마저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된다(10. 26 사건). 이른바 조실부모(早失父母)한 소녀 가장(家長) 신화의 완성이었고, 부친 시절 이루어진 경제발전과 함께 지금까지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인 새누리당에 대한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을 만들어 낸 사건들이라고 하겠다.

얼마 전 36주년이 되었던 10.26 사건에 대해서는 나름 여러 가지로 조명도 되었고,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필자도 블로그에 한 편의 글을 쓴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이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박근혜 대통령 치하에 살게 된 것에는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10.26 사건에도 원인을 제공하였던 사건인 육영수 여사님 시해(弑害)사건에 대해서는 10.26만큼은 조명이 되지 않은 것 같아 오늘은 그 사건에 대해서 한 번 썰을 풀어 볼까 한다.

그런데 1974년 8월 15일에 일어났던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을 다루면서 필자는 만약 그때 문세광의 총탄이 육영수 여사를 맞히지 못하고 다행히도 육여사님께서 살아나셨다면 그 후 역사의 전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하는 방식으로 다루어 볼까 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의외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 사건이 그 후 우리 현대사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또한 보다 일반적으로는,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원인들 같은 것이겠지만 때로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자그마한 우연이란 것이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 사건을 골라 보았다. 아울러 이제 올바른 역사 교과서는 박근혜 대통령님께서 알아서 써 주실 것이기 때문에(진지), 필자 같은 듣보잡이야 뭐 이런 소일거리 장난이나 하며 지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고른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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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 피격 순간 © 한겨레

1. 박근혜 대통령은 프랑스 유학을 계속하여 학자나 엔지니어가 되고, 결혼도 하지 않았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님께서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셨을 무렵에 프랑스의 그로노블에서 유학 중이었다.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박근혜 대통령은 전공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유학 갔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엄마 육영수 여사님은 큰딸로 하여금 공부를 마치게 한 다음에 결혼을 시킬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육 여사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박근혜 대통령은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퍼스트 레이디의 사망으로 공백이 생겼기에 부친의 뜻에 따라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신하여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부친과 같은 대통령이 될 후계자 수업을 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신하면서부터 시작한 셈이라고나 할까?

아울러 어머니를 잃은 박근혜 대통령을 위로(?)하여 주었다는 수상쩍은 인물 최태민 목사라는 사람과의 인연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박근혜 대통령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무렵인 1975년 3월경에 시작된다. 이 최태민 목사는 박정희 시절에도 이권에 개입하였다는 등의 여러 가지 잡음을 일으켰으며, 나중에 박근혜 대통령이 동생 박근영씨와 육영재단 운영과 관련하여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다시 등장한다. 또한, 최태민 목사의 사위인 정윤회씨는 박근혜 대통령 집권 후에 일어난 이른바 청와대 문고리 권력 논란에서도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엄마인 육영수 여사님이 1974년 8월 15일에 암살되지 않았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학업을 중단할 필요가 없이 계속해서 공부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엄마의 죽음을 기화로 하여 접근하였던 최태민 목사나 나아가 최태민 목사의 사위인 정윤회씨하고도 얽힐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특별한 사정이 없었다면 육영수 여사님의 소망대로 공부를 마치고(학부를 마친 다음에 유학을 간 것이니 석사와 박사과정을 하였을 것이니 최소한 4-5년 정도 걸리지 않았을까?) 아마도 배필을 골라 결혼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계속 퍼스트 레이디 역을 하셨을 터이니 정치에 들어오고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퍼스트 레이디 대행역할을 거쳐 육영재단 이사장, 그리고 IMF 구제금융을 받을 무렵에 정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고, 나중에 대통령까지 된 독신여성 정치인 박근혜와는 사뭇 다른 학자나 엔지니어 박근혜의 인생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2.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만년에 출세길을 달릴 수 있었을까?

육영수 여사님께서 암살 당하지 않으셨다면 일어날 수 있을 법한 또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육 여사님 암살범 문세광을 수사한 검사는 김기춘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박근혜 정부에서 오랫동안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기춘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김기춘은 프랑스 대통령 드골 암살 음모를 다룬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스릴러 소설 [재콜의 날]을 여름 휴가 때 읽었는데, 이는 암살범들의 교과서(응?)라고 할만한 책이라 생각하여, 문세광을 조사하면서 문세광에게 "[재콜의 날]을 읽어 보았는가?"라고 질문하여 그의 자백을 끌어 내었다고 술회한 바 있었다. 어쩌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받았던 절대적인 신임의 배경에는 어머니 암살범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냈던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만약 육영수 여사님이 암살을 피했다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만년의 출세 같은 일도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본 것처럼 어차피 대통령 박근혜가 없었을 터이니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 김기춘도 아예 없었을 수도 있겠다.

3. 청와대 경호실장이 차지철이 아니라 박종규였다면...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5년 후 10.26 사건이 일어나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가 암살되었으니 여전히 박정희 신화가 우리 사회에 강력히 존재했을 것이고, 이러한 박정희 신화는 어느 시점에서는 그의 핏줄인 박근혜 대통령 역시 정계로 소환하지 않았을까 하는 반론(?)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육영수 여사님께서 문세광의 흉탄을 피하셨다면 그 후의 한국 현대사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이 글의 주제는 어차피 술자리 안주거리 정도의 심심풀이 상상의 나래이긴 하다만 이러한 '반론'이 간과하고 있는 작은(?) 사실이 하나 있다.

대통령 영부인이 암살범에 의해 살해된 사건은 중대한 경호 실패 사례였고, 따라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인 박종규는 문책당해 물러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박종규의 뒤를 이어서 경호실장이 된 사람이 바로 차지철이다. 유신 부통령이라고까지 불리며 대통령 박정희의 측근으로 권력을 휘둘렀던 차지철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갈등을 지속하다가 결국 운명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김재규에 의해 살해된다. 즉 차지철은 10. 26 사건의 직접적인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만약 육영수 여사님께서 1974년 8월 15일 암살 당하지 않으셨다면, 경호 실패가 아니라 암살 기도를 저지한 것이기에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인 박종규는 경질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자리를 계속 지켰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지철은 경호실장 자리에 결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피스톨 박이라고 불렸던 박종규는 차지철과 마찬가지로 5.16 때부터 박정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여 왔으며 10.26 후에는 부정축재자로 몰릴 만큼 나름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에 영부인 경호실패 같은 결정적 실책이 없었다면 경호실장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장에서 차지철과 김재규가 서로 언쟁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 전에 청와대 경호실을 장악한 차지철이 중앙정보부의 권한을 침범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와 갈등을 빚는다든지 하는 일 같은 것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차지철은 경호실장으로 오기 전에 당시 여당인 공화당의 4선 국회의원이었는데(이런 중진 국회의원이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오는 기괴한 인사가 박정희 독재정권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글쎄 그렇게 여당 국회의원 자리나 계속 지키고 있으면서 특유의 괄괄한 성격은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과의 육박전(응?) 같은 것으로 풀고 있지나 않았을까?

4. 전두환과 노태우는 쿠데타와 내란을 통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육영수 여사님께서 암살 당하지 않으셔서, 차지철 경호실장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다른 중요한(?) 사람들의 운명들도 달라지고, 그로 인해 한국 현대사의 궤적도 달려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바로 차지철 밑에서 대통령 경호실에서 일했던 두 명의 장군 전두환과 노태우이다. 차지철은 이들을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와 행정차장보로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들 신군부(新軍府)의 두 정치군인은 독재자 박정희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면서 그의 행태를 체화시키며 박정희 사후 12. 12 및 5. 17로 이어지는 2단계 국헌문란 쿠데타 및 내란으로 정권을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이들은 일찍부터 박정희의 귀여움(우웩-) 받아가며 군에서 출세길을 달려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최측근인 청와대 경호실이라는 권부(權府)에 결정적인 순간인 박정희 정권의 말기에 근무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싸움이었던 10. 26 후 대통령 암살 사건의 수사권을 장악하게 되는 보안사령관, 노태우는 실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전방 사단장이라는 요직으로 승진하여 쿠데타를 도모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5. 독재자 박정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울러 육영수 여사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박정희가 아무리 막무가내의 독재자였다고 해도,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여가수와 여대생을 불러 놓고 질펀하게 벌어졌던ㅜㅗㅜ 술자리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었을까? 육영수 여사님은 이른바 청와대 야당으로 불리면서 시중의 여론을 청취해 남편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하며, 암만 그래도 유부남이 마누라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응?) 코앞에서 그런 엽기적인 행각을 벌일 가능성은 낮지 않았을까? 즉 육영수 여사님이 살아 계셨다면 10.26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당일의 술판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재자 박정희는 10.26 사건 때 암살당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여 계속하여 대통령 자리를 지켰을 가능성도 꽤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집안에서부터 육영수 여사님이 나름대로 견제를 하였기에 말기로 갈수록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박정희의 유신 독재 정권도 어쩌면 실제 역사보다는 조금 더 누그러진 형태로 계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전두환과 노태우라는 신군부 세력이 부상할 기회도 없었을지도 모르고. 이 점은 실제 역사보다 더 비관적인 형태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꽤 있을 것 같다.

6. 어쩌면 우리는 1997년 말 외환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육영수 여사님이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바뀌는 역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육 여사님의 암살 직후부터 새로운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당시의 제1야당인 신민당에 대한 정치공작을 하여 왔고, 마침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유진산이 사망한 다음에 열린 총재선거에 개입하여 후보 중에 김의택(누구시더라?)을 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부여당 측의 공공연한 정치공작에 반발한 당시 신민당 대의원들은 전당대회에서 반유신(反維新) 입장을 명확히 한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했다고 한다. 김영삼은 당선 후부터 맹렬히 반독재 투쟁을 전개했으며 이는 나중에 그의 정치적 근거지인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부마항쟁의 하나의 원인도 되었으며, 나중에 김영삼이 대통령까지 지내게 되는 것에도 영향이 없었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육영수 여사님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앞에서 본 것처럼 그 경호실패의 책임으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가 경질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될 가능성도 낮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지철이 야당의 당 총재 선거에 개입해서 무리하게 친여 성향 인사를 당선시키려고 공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김영삼의 당선 가능성이 낮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직을 발판으로 하여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가 나중에 민주화가 된 후에 대통령이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김영삼 치하에서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고 IMF의 구제금융까지 받는 사태도 (그것이 관치금융이나 재벌들의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언젠가는 터질 고름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 박정희 치하의 '좋은 시절'에 대한 향수로 그의 딸이 정계에 호출되는 상황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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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육영수여사 기념관의 좌상 앞에 선 장녀 박근혜.

7. 망상을 정리하자면...

정리하면, 육영수 여사님께서 만약 다행히도 문세광의 흉탄을 피하셨다면, 아마도 독재자 박정희는 10.26 사건 때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되는 운명을 피할 가능성이 높았고, 적어도 1980년대까지 (실제 역사보다는 조금 더 누그러진 독재 형태로) 계속해서 집권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다. 박정희가 암살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고, 전두환과 노태우 같은 신군부의 대두도 없거나 늦어졌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김영삼이 반독재 세력 중에서 중심인물로 부상했을 가능성도 낮아져 그가 나중에 대통령이 되어 외환위기를 초래하여 우리나라가 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되는 상황에까지 몰리지도 않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퍼스트 레이디를 대행하며, 정치에 사실상 입문한 후 외환위기 후에 정계에 호출된 독재자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물론 잘 아시다시피 이상은 올바른 역사 교과서는 이제 박근혜 대통령께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서 이루어 주실 것을 굳게 믿기에(뭐래니?) 필자가 전개하여 본 망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