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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25일 10시 21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8월 25일 14시 12분 KST

어느 영웅의 불행한 말년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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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齊)나라(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위치)의 환공(桓公)은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제후(諸侯)이다. 제 환공은 이른바 춘추오패(春秋五覇)라 불리는, "중원에서 사슴을 좇은 이" 즉 다른 제후들을 제압하고, 중국을 호령한 다섯 명의 패자(覇者) 중 첫번째 패자가 된 이로 유명하다.

춘추시대는 고대 중국 왕조인 주(周)나라의 유왕(幽王)이, 절대로 웃지 않았다는 그의 후궁인 포사가, 유왕이 이민족이 쳐들어왔다고 제후들을 거짓으로 소집했다가 해산하여 제후들이 허둥지둥 대는 모습을 보면 이때에만 유일하게 웃는 것을 보고, 그녀를 웃기기 위하여(응?) 계속해서 제후들을 거짓으로 소집하였다가 해산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벌이다가, 정작 야만족 서융(西戎)이 진짜로 쳐들어왔을 때는 제후들을 소집했으나 그들이 이번에도 거짓말인 줄 알고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은 일(즉 이솝우화의 늑대와 양치기 이야기와 같은 구조의 이야기이다) 때문에 크게 흔들려서 수도 호경(지금의 서안(西安))을 버리고 동쪽의 낙양으로 천도(천도한 기원전 770년 전을 동주(東周), 천도한 이후를 서주(西周)로 부름)한 때로부터 시작된 시대이다. 즉 주왕실의 권위가 이렇게 흔들린 다음 원래 주왕실을 모시던 각지의 제후들이 사실상 독립하여 서로 다투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춘추시대라는 명칭은 이 시기의 역사를 기술한 공자님의 저서 [춘추(春秋)]에서 유래하였다.)

이 혼란한 춘추시대는 주왕실을 존중하고(尊王)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다(攘夷)는 즉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대의를 내세운 다섯 명의 패권을 쥔 제후(춘추오패)들이 나서면서 그나마 가닥을 잡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그 중 첫번째 패자가 바로 제나라의 환공이다.

공자님께서도 제 환공에 대해 평하시면서 "환공이 없었다면 우리(중국의 한족(漢族)들)는 야만족의 지배를 받았을지 모른다"는 취지로 말씀하셨을 정도로 제 환공의 공적은 지대했다. 사실 위와 같이 주 왕실이 어리석은 임금에 의해 그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그저 강한 제후국이 약한 제후국을 공격해서 병합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을 터인데 환공은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허수아비가 된 셈인 주왕실의 권위를 존중하여 주고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가 하면 약한 제후국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병탄(倂呑)하지 않았으니 결국 많은 제후들이 모여서(회맹(會盟)) 그를 으뜸가는 제후인 패자(覇者)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고대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史記)]의 제후 등의 행적을 다룬 "세가(世家)" 중 제나라 역사를 다룬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있는 환공 부분을 살펴보면, 예컨대 제 환공은 이웃 노(魯)나라와 싸운 후에 그 영토를 빼앗았으나 노나라 제후와의 강화조약 협상장에서 노나라의 신하 하나가 갑자기 그를 칼로 위협하며 노나라 땅을 내놓으라고 하자 이를 돌려 주겠다고 일단 약속한다. 그 후 환공은 신체적 위협에서 벗어나고 난 다음에도 (이때는 충분히 이런 약속을 깨어 버려도 무방할 텐데) 이런 노나라 신하를 괘씸하게 여기지 않고 노나라 땅을 처음 약속대로 돌려주었다. (환공이 이런 신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은 뒤에 얘기하는 그의 재상인 관중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 환공은 제나라 북쪽의 연(燕)나라를 도와서 이민족의 침입을 물리쳐 주고 나서 연나라 제후가 환공의 도움에 감사하여 제나라 경내에까지 나와서 환공을 배웅하자 "같은 제후끼리 상대방 나라까지 따라와서 배웅하는 법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연나라 제후가 따라나온 제나라 땅까지를 연나라 제후에게 선사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제 환공은 거의 명목상으로만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주 왕실을 계속하여 떠받들고 심지어 주왕실에서 보낸 사자가 주나라 왕이 하사한 물품들을 환공이 자리에 앉아서 받아도 좋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여 그 물품들을 받는 등 그야말로 존왕(尊王)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제 환공이 춘추시대 제후들 중 으뜸인 패자가 되게 한 재상이 바로 관중(管仲)이다. 관중은 제 환공이 제나라 제후 자리를 놓고서 형과 경쟁했을 때 환공의 형을 지지했던 이. 그에 그치지 않고 관중은 아예 제 환공을 겨누어 활을 쏘아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었다. 제 환공은 관중이 쏜 화살에 맞아 실제로 죽을 뻔하기까지 하였다.

제 환공은 이런 관중을 거두어 자신의 재상으로 임명했으니 환공의 도량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이렇게 관중이 등용된 데는 관중을 환공에게 적극 추천한 관중의 절친 포숙아(鮑叔牙)의 공이 크기는 했지만(관포지교(管鮑之交)), 암만 그래도 자신의 반대편에 서서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의 재주를 크게 사서 중책을 맡겼다는 것에서 제 환공이 과연 중원의 첫 패자가 될만한 그릇이었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또한 관중도 이렇게 자신을 믿고 써준 환공에 보답하여 앞에서 얘기한 존왕양이,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책을 제 환공이 펼치게 도와 천하의 인심을 얻어 제 환공이 첫 패자가 되는 것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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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박물관에 전시된 춘추시대 의자 장식 유물.

그렇다면 이 제 환공의 최후는 어땠을까? 제 환공의 긍정적인 면들만 이렇게 서술하기는 하였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대가 기원 전 7세기인 고대였는지라 그 시대 군주에게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와 같은 인권과 도덕 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실제 제 환공 역시 정식 부인만 셋을 두었고ㄷㄷㄷ 그들 중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그와 별도로 후궁을 여섯이나 두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제 환공은 그들 중에서 누구를 후계자로 정할지를 흐릿하게 하여 두었고, 결국 환공이 죽은 다음에는 제나라는 후계 경쟁으로 날이 지새 환공의 장례조차 제대로 못 치루었다고 한다. 공자님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고대 중국인들을 이민족의 침입에서 구출하였고, 중원을 호령했던 대단한 영웅 호걸인 이 제 환공의 시신에서는 결국 심지어 구더기까지 들끓었고, 그가 죽은 지 몇 달이 지나, 후계 경쟁이 완전히 마무리 된 다음에야 겨우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인생무상이요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을 읊조리지 않을 수 없는 영웅의 불행한 말년과 죽음이었다고나 할까. 어디 제 환공뿐이겠는가.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이는 "이름만 바꾸면 당신 이야기"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