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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02일 06시 1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5월 02일 14시 12분 KST

김정은 방러 포기의 진짜 이유?

연합뉴스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이 5월 9일에 러시아에서 열릴 제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 행사에 참석할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다가 최종적으로 불참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러시아측 설명에 의하면 '북한 내부 사정' 때문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해서 남북화해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취지로 이른바 진보진영 인사들이 주장해 왔는데 아예 김정은도 가지 않기로 했다는 이번 보도로 그 분들이 머쓱해진 것 같아 솔직히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 및 동부 우크라이나 내전에의 개입을 비판하며 미국과 유럽연합 심지어 일본마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시행하고 있으며, 이번 제2차 세계 대전 전승 기념 행사에도 각국 정상들이 불참하고 있는 판에 그런 국제적 흐름을 무시하고 무조건 우리 대통령더러 독재자 김정은을 만나라며 막무가내식 남북화해만 주장하는 이 분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외교가 중국과 미국 사이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느냐고 주장해 온 이런 행태는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티눈 걱정을 하는 행태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국내 정치에는 잘도 개입하여 지난 대선에서의 불법 개입 책임 때문에 당시 국정원장이 구속되어 있는 처지에 있는 국정원이 이번에는 하루 전에 국회에서 보고하며 김정은이 틀림없이 러시아에 간다고 한 것도 어이 없는 일이었고.

그나저나 김정은이 왜 러시아 방문을 하지 않기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추측만 난무한 것 같은데, 엉뚱하게도 내 관심을 끈 것은 바로 그 '북한 내부 사정'이라는 말이었다. 다음 단락에서부터 이야기해 볼 김정은의 할아비인 독재자 김일성 시절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이 남북한의 수반이 된 다음에는 두 사람이 각각 2세 및 3세 정치인인 때문인지 이렇게 두 사람의 선대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 보는 것이 두 사람의 행태를 이해하는 것에 나름 도움이 되는 일이 많지 않은가 싶은데(예컨대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 숙청이나 박근혜 대통령과 이른바 문고리 권력 문제나 국무총리를 둘러 싼 논란 또는 홍보 특보에 김경재님을 임명한 건 등) 사실 이렇게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예전 일들을 자주 상고하게 되어야 하는 상황인 것은 무척 짜증나는 일이기도 하다.

앞머리의 잡소리가 길었는데, 내게 떠오른 김정은의 할아비 독재자 김일성 시절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란 바로 1956년 8월에 있었던 8월 종파(宗派) 사건이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과 동구권을 그 해 6월부터 7월 경까지 방문하고 있었는데, 북한의 독재자가 이렇게 평양을 비운 사이에 북한에서는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일성을 몰아 내려는 반역 모의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북한이 오늘날과 같은 3대 세습 독재 국가로 굴러 떨어지지 않을 마지막 기회였을 이 사건의 경과를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자.

1956년은 냉전시기 공산권에서 대격변이 일어난 해이다. 소련에서 독재자 스탈린이 죽은 후 말렌코프의 짧은 치세를 거쳐 집권한 흐루시쵸프는 그 해 2월 25일 스탈린을 격하하는 비밀연설을 소련 공산당원들을 상대로 한다. 그 이듬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쏜 자신감이 넘치던 체제를 이끌던 흐루시쵸프이기에 그의 스탈린 시대의 과오에 대한 반성은 솔직하고 통렬했다. 아무리 비밀연설로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공산권에서 반인반신;의 존재 이상으로 떠받들려지던 스탈린에 대한 이런 격하연설을 후임자가 했다는 것은 다른 공산권 국가에서 대단한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제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나라는 물론 중국이었고 이는 중소분쟁으로 실제 국경에서의 충돌로까지 이어졌으며 헝가리에서는 반공의거가 일어났고 소련군의 개입마저 불러왔다.

북한에서 이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로 인한 분위기를 틈타 일어난 것이 1956년 8월의 소위 8월 종파 사건인데, 북한정권을 구성하던 세력 중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계를 숙청한 다음에도 남아 있던 연안파와 소련파가 합세하여서 김일성 실각을 노렸던 사건이다. 연안파는 중국 공산당의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시 근거지인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투쟁하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들로 김두봉, 무정, 최창익 등이 주요 인물이다. 그 중 장군 무정은 6.25 중에 숙청됐고 8월 종파 사건의 주모자는 당시 북한 정권의 부수상이던 최창익.

소련파는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재소(在蘇) 한인 2세 공산주의자들로 허가이, 박창옥 같은 이들. 이들 중 공산주의 이론에 밝아 당박사라고까지 불리웠던 허가이는 김일성이 사주한 암살로 의심되는 의문사-_-;를 했고 나머지 인사들은 연안파와 손을 잡고 김일성이 소련 및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순방하느라 1956년 6월부터 7월까지 평양을 비운 틈을 타서 김일성을 몰아내는 정변을 모의하였다. 이들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관과도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1956년 8월 하순에 열린 북한의 집권당인 조선노동당 당 대회에서 김일성이 소련 및 동유럽 방문 성과를 보고한 다음에 이 음모자들 중 한 사람인 윤공흠이 예정에 없었던 발언권을 얻어서 김일성의 실정 및 개인숭배 경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선노동당 당 대회에서 김씨 일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음모자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김일성은 해외 순방을 떠났지만 북한 내에 남겨 둔 심복들을 토대로 하여 이들의 음모를 미리 간파하고 있었으며 최창익, 박창옥 등이 당 대회에서 김일성을 몰아 내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김일성 일파에 의하여 당과 정부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이른바 8월 종파 사건에서 제일 극적인 것은 김일성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들 연안파와 소련파 잔존세력들이 당 대회에서 이렇게 김일성에게 무모한 공격을 하는 일방, 중국에 음모자들 중 일부를 보내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급히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음모자들 중 윤공흠, 서휘 등은 중국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했고, 마침 그 무렵 중국에 소련을 대표한 사절단으로 와 있던 소련의 고위 간부 미코얀과 팽덕회(6.25 때 중공군을 거느리고 북한을 도왔던 이다)가 북한에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도착한다.

여기서 반전이 이루어져서 결국 김일성은 이러한 중국과 소련의 압력에 굴복해서 1956년 9월 최창익과 박창옥 등을 숙청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들을 복직, 복당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팽덕회와 미코얀이 돌아간 다음 1956년 10월에 헝가리에서 반공 폭동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한 소련의 흐루시쵸프가 다른 공산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자 김일성은 최창익 등을 바로 숙청한다. 일제시대 이래로 독립투사이자 공산주의자로 맹활약했던 최창익은 숙청 후 돼지농장의 관리인이 되었고, 부인 박정애마저 그를 비판해야만 했다고 하며 이것이 실패한 쿠데타인 8월 종파 사건의 전말이다.

혹시 헤어스타일부터(쿨럭;) 장성택 숙청에 이르기까지 할아비 김일성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 김정은은 이렇게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하기 위해서 자리를 비웠을 때 그의 독재체제에 대한 가장 심각한 도전인 8월 종파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고 고심 끝에(응?) 러시아 방문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모부 장성택을 숙청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권력 기반이 북한을 안심하고 비워도 될 정도로 공고하지는 않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베일에 싸인 그 '내부 사정'이야 알 길은 없지만 이렇게 그 기회에 다시 상고해 본, 북한이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세습 독재 국가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을 8월 종파가 실패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