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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20일 07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5월 20일 14시 12분 KST

청와대를 배회하는 유령?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말 청와대 홍보특보에 김경재 전 의원을 임명하였다. 원래 재선까지 한 야당 인사이다가 지난번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원하면서 새누리당에 입당하였던 김경재 전 의원은 호남 출신이기도 하여 어찌 보면 여론이 영남 출신인 박근혜 대통령 측에 요구하여 왔던 탕평인사에 부합하는 인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김경재 전 의원이 유명해져서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어쩌면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경력이 이른바 [김형욱 회고록]의 집필자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그 집필자가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홍보특보로 모시며 청와대에 들어가게 되었다니 좀 비감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겨레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말 청와대 홍보특보에 김경재 전 의원을 임명하였다. 원래 재선까지 한 야당 인사였다가 지난번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원하면서 새누리당에 입당하였던 김경재 전 의원은 호남 출신이기도 하여 어찌 보면 여론이 영남 출신인 박근혜 대통령 측에 요구하여 왔던 탕평인사에 부합하는 인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김경재 전 의원이 유명해져서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어쩌면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경력이 이른바 [김형욱 회고록]의 집필자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가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모시며 홍보특보로 청와대에 들어가게 되었다니 좀 비감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필과 같은 육사 8기로 다른 육사 8기 동기생들과 함께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한 인사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중퇴생인 김종필이 주로 브레인 노릇을 하며 자신의 부인 고(故) 박영옥 여사의 삼촌인 박정희를 도왔다면, 김형욱은 돈까스(쿨럭;)라는 별명이 보여주듯이 주로 힘을 쓰는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나 그 후의 독재를 도왔던 인물. 특히 1969년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시도하자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당시 비서실장인 이후락과 함께 정치공작에 앞장선다. 이때 김형욱의 더러운 정치공작은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인사들한테도 원한을 샀고, 3선 개헌안이 통과되자 박정희는 여당인 공화당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서 이후락과 김형욱을 경질한다. 그야말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었던 것.

이후락은 박정희의 이런 조치에 복종하였다가 다시금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하여 남북회담을 위해 북한을 다녀오는가 하면, 박정희의 친위쿠데타인 10월 유신을 주도하고, 심지어 일본에서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김대중 대통령님을 납치하는 등의 정치공작을 계속한다. 그러나 김형욱은 이러한 박정희의 갑작스런 경질 조치에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박정희는 그를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공화당의 비례대표 즉 전국구 의원으로 공천하여 주었고 일부에서는 3선 개헌에 앞장선 것에 대한 보은인사라고 보기도 했지만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의 협박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김형욱 입장에서 전국구 의원 자리가 성에 찰 리가 없었다.

박정희가 1972년 10월 17일 영구집권을 위하여 친위쿠데타인 10월 유신을 단행하고 이어질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나마 붙어 있던 전국구 의원 자리마저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 김형욱은 망명을 결심하고 여행을 빙자하여 국외로 나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중앙정보부장 시절 축재한 돈을 가지고 나름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던 김형욱은 자신을 홀대한 박정희에게 복수할 결심을 하게 되고 당시에 남한의 불법적인 대미(對美)로비를 조사하던 미국 하원 프레이저 소위원회에서 박정희 독재의 실상을 폭로하는 증언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전직 정보기관 책임자가 자신이 알고 있고 또 실제로 직접 자행하기도 했던(응?) 박정희 독재정권의 온갖 추악한 정치공작과 부정 및 비리를 남한의 가장 큰 우방인 미국의 의회에서 생생히 증언했던 것은 전세계에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상을 널리 알렸고, 박정희나 그의 주구들에게는 큰 충격을 준 일이었다. 김형욱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는 회고록 집필을 결심하여 다시 한 번 박정희 정권에게 큰 타격을 주려고 하였다.

이때 김형욱이 접촉한 회고록 집필자가 바로 김경재 전 의원이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짐작하셨겠지만 김형욱은 뭐랄까 부드럽게 말하자면, 문(文)에 강한 인사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회고록 정리를 도와줄 집필자를 찾은 것이었다. 김경재 전 의원은 젊은 시절부터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왔고 그 무렵에는 재미(在美)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반정부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 전 의원은 박사월(朴思越)이라는 필명으로 김형욱의 회고록을 집필한다. 필명은 다름 아닌 4월 혁명 즉 4.19 혁명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음을 따와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김경재 전 의원은 서양식으로 하면 이른바 유명인 저서의 유령작가(Ghost Writer)가 된 셈인데 나중에 국회의원에 출마한 김경재 전 의원이 우연히 필자가 살던 동네에 나왔던지라, 김경재 전 의원은 당시 김형욱의 회고록을 집필하게 되는 과정을 만화로 묘사해 유권자들에게 홍보물로 배포한 일이 있었고, 필자는 이를 소싯적에 읽어 볼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회고록 집필을 위하여 김경재 전 의원은 망명 중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여러 차례 인터뷰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의 치부를 감추거나 박정희의 치부를 감추려는 김 부장을 설득하고 때로는 다그치면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독재정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 진실을 캐내려는 자신의 모습을 자못 감동적으로 그려내기도 했었다.

과장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망명지 미국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고 어쨌거나 군사쿠데타의 주역 중의 한 명으로 참여하고 독재정권의 첨병 역할을 하던 사람에게서 그의 삶과 경력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새롭게 거듭나라고 요청하는 역할을 맡았는지라 단순히 유명인의 회고록을 대필하여 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김경재 전 의원은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암만 미국에 있었지만 김경재 전 의원이 이 회고록 집필에 참여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박정희 정권이 서슬 퍼런 시절인지라 한국에 있는 김경재 전 의원의 지인과 친인척이 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박사월이란 필명을 사용한 것이었을 테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평생 독재정권의 주구로 살아 왔던 늙은 김형욱 부장과 반독재 투쟁에 마악 투신했던 젊은 언론인 김경재의 만남을 더욱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김형욱 부장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김형욱 부장의 회고록 출간은 박정희와 그 권부의 핵심인사들에게는 결사적으로 막아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집요하게 김형욱 부장의 선후배 인사들이나 중앙정보부장 시절의 부하 등을 미국으로 보내서 김형욱을 만나서 회고록 출간을 하지 말도록 설득하고 회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작에는 당시의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_-가 앞장을 섰었다. 양측은 김형욱 부장이 회고록 출간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거액의 대가를 받는 협상까지 벌였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그 협상이 드디어 마무리 되었는지 운명의 1979년 10월 어느 날 김형욱 부장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고,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자들"과 호텔에서 나간 후 영영 실종되었다. 그 후 유언비어에 의하면 청와대 지하실로 비밀리에 끌려온 김형욱은 박정희에 의해 총살되었다는 말도 돌았고, 파리 근처의 양계장에서 닭모이로 갈렸다는 으스스한 소문마저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1979년 10월에 김형욱 부장만 사라진 게 아니라 이 공작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는 바람에 아마도 이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죽기 전에 아마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박정희 독재 정권을 타도하겠다는 정의감에 불타던 재미 언론인 김경재는 김형욱 부장이 이렇게 실종된 다음에 드디어 원고를 정리해 김형욱 부장의 회고록을 출판한다. 박정희가 살해된 후 열렸던 서울의 봄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이 김형욱 부장의 회고록을 금서로 지정했으나 독재정권의 치부를 그 내부자가 낱낱이 까발린 이 회고록은 독재정권 하에 신음하던 국민들 사이에 몰래 널리 읽히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민주화가 된 후 용기 있는 투쟁을 하였던 김경재는 드디어 실명을 밝히고 화려하게 정계에 본격 데뷔하여 두 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1997년의 외환위기 후에 독재자 박정희가 경제를 개발했던 "좋은 시절"에 대한 향수가 강력하게 중장년층과 노년층을 통해서 불러 일으켜지고 드디어 그 박정희의 딸이 아빠의 강력한 후광 덕분에 국민의 선택을 받아(비록 아버지가 창설했던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기관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소한' 문제가 계속 그녀를 괴롭히고 있으나)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늙어서 어쩌면 젊은 시절의 정의감과 패기는 찾아 보기 힘들어진 김경재 전 의원, 젊은 시절 한때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린 제2공화국을 낳은 4월혁명을 기리겠다며 박사월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던 그가 그 독재자의 딸을 특별히 보좌하며 그 치적을 홍보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니 새삼 인생무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한때 그 청와대 지하실로 끌려와 비명횡사하였다는 유언비어(김대중 전 대통령님 같은 정적을 납치하여 수장시키려고 했던 일을 실제로 저질렀던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인지라 이런 유언비어조차도 그럴 듯하다고 독재정권 시절에는 횡행하였다)마저 돌았던 김형욱 전 부장은 지하에서 아무도 관심 없었을 자신의 이야기를 써 주겠다던 자기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친구인, 파릇파릇한 용기 있는 젊은 언론인이 이제 여왕마마를 공손히 모시는 늙은 신하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어쩌면 대통령께서 김경재 전 의원을 거두어서 자신의 홍보를 맡긴 것은 아빠에게 반항하여 대통령 입장에서는 배신자로 보실 수밖에 없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달콤한 복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김경재 청와대 홍보특보에게는 전혀 들지 않았을까?

비록 민주주의를 짓밟은 군사쿠데타에 가담했고 독재자의 주구로서 정치공작을 저질렀지만 만년에 회개하여 역사와 국민 앞에 진실하고자 하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비극적인 실종 사건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황천길 마지막 말동무였던 김경재 전 의원의 변신을 지켜보며 지하에서 가슴아파할지도 모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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