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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06일 05시 37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4월 08일 14시 12분 KST

역사를 바꾼 어느 제1야당의 당 대표 선거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드디어 30% 아래로 내려갔으나 박근혜 대통령의 새누리당 정권의 대안세력이 되어야 할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 선거는 좀처럼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새누리당의 원내대표로 이른바 박심(朴心)이 뒤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주영 의원이 떨어지고 유승민 의원이 당선된 것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 같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 당권주자들 간의 토론회에서의 난장판은 빈축을 샀고, 특히 투표 개시일을 하루 앞두고 경선 규칙이 바뀐 것이 아니냐는 논란까지 벌어진 형편이다. 이렇게 무관심과 비웃음 속에서 진행되는 제1야당의 당 대표 선거를 보다 보니까 국민들의 열광적인 관심 속에 진행되었던 박근혜 대통령 부친 시절의 마지막 제1야당 당 대표 선거 이야기가 떠올라서 안타까운 마음에 한 번 끄적여 보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드디어 30% 아래로 내려갔으나 박근혜 대통령의 새누리당 정권의 대안세력이 되어야 할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 선거는 좀처럼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새누리당의 원내대표로 이른바 박심(朴心)이 뒤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주영 의원이 떨어지고 유승민 의원이 당선된 것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 같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 당권주자들 간의 토론회에서의 난장판은 빈축을 샀고, 특히 투표 개시일을 하루 앞두고 경선 규칙이 바뀐 것이 아니냐는 논란까지 벌어진 형편이다. 이렇게 무관심과 비웃음 속에서 진행되는 제1야당의 당 대표 선거를 보다 보니까 국민들의 열광적인 관심 속에 진행되었던 박근혜 대통령 부친 시절의 마지막 제1야당 당 대표 선거 이야기가 떠올라서 안타까운 마음에 한 번 끄적여 보았다.

1979년 5월 30일에 유신 독재시절 제1야당인 신민당 총재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가 있었다. 3년 전인가에 각목 전당대회로 불린 깡패;가 동원된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잡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웠던 당시 신민당의 당수(대표최고위원) 이철승은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제대로 날을 못 세우고 있어서 관제 야당이란 뜻인 사꾸라라는 비난을 받았다. 한편 이런 이철승에 도전한 이는 선명야당 기치를 든 김영삼. 그는 "마누라 없는 청와대가 절간 같다"던 박정희 눈물에 속아서 뜨듯미지근한 대여투쟁을 벌이다(쿨럭;) 위 전당대회에서 이철승한테 당권을 잃었다가 절치부심 후 재도전 중이었다.

전당대회 전에 당권파와 비당권파는 각각 세를 과시하고 표단속을 하기 위해서 대의원들을 위한 저녁모임을 공지했는데, 기이하게도 비당권파가 공고한 저녁모임 자리에 당시에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하여 가택연금 중이시던 1971년 유신독재가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 오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 대의원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나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볼 수 있나 싶은 생각에 비당권파 주최의 저녁모임에 갔다고 하는데(그러니 당연히 아마도 아직 누구를 찍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대의원들도 다수 참석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가택연금 중이시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 나타나셔서, 김영삼 지지 연설을 하시며 이번 선거는 야당 내 친유신세력과 반유신세력의 대결이라고 대의원들에게 명분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한다. (이 날 갑자기 가택연금이 느슨해진 것은 당시 청와대 문고리 권력이었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국정원의 전신) 김재규 간의 암투가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운명의 날인 1979년 5월 30일의 당 대표 경선은 오후에 열릴 예정이었고 오전에는 당헌 개정안이 논의될 예정이었다. 당일 오전 당헌 개정안을 들고 나와서 설명한 이가 4.19세대인 부산 지역구 출신 이기택이었다. 40대 초였을 패기 넘치는 그의 연설은 신민당의 대의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 같다. 이는 오후에 열린 총재선거(당권파와 비당권파의 대립이 팽팽한 상황이라 아무도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에서 이기택이 이철승과 김영삼에 이어 (표차는 많이 나지만) 92표를 얻어 3등을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낸 당시 민주당의 광주 경선 같은 분위기였을까? 박정희 18년 독재에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제1야당 신민당의 전당대회에서는 어제 저녁의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연설에 이어서 뭔가 부글부글 끓는듯한 흥분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기택 역시 정치데뷔 후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지라 흥분된 상태였다. 그의 참모들은 곧 있을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을 지지하자는 의견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 낡은 체제의 힘은 강고했는지 이철승의 주류측이 이기택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와 이기택은 이철승과 먼저 면담하게 된다. 뭐에 씌였던 것일까? 이기택 면담 전 자신의 참모로부터 "부총재든 뭐든 원하는 걸 다 주십시오. 이 사람을 잡아야 이기십니다"란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던 이철승이지만 막상 새까만 고대 후배(응?)인 이기택을 만나서는 그저 "나를 믿고 따라오라"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주단 깔린 총재실을 나온 이기택을 이번에 납치하다시피해 끌고 간 이들은 김영삼측이다. 비당권파인 김영삼에게 방 따위가 있을 리가 없으니 둘이 얘기를 나눈 건 당사의 계단. 솔까말 김영삼도 뭔가 뾰족한 말을 할 주변도 없는 이라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순간(나중에 80년대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김영삼이 양김 회동을 하면 기자들이 착착 정리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 말씀에 비해 너무 알맹이 없는 김영삼 얘기를 말이 되게 만드느라 고생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음) 신민당 당사 주변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박정희 독재에 대한 불만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제1야당에 실망했던 국민들이 전당대회도 요식행위겠거니 또 다시 2위에 안주하는 만년 야당질을 하는 이를 뽑겠거니(당시 유신체제 하에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박정희가 사실상 임명하는 유신정우회였고;; 나머지 3분지 2는 1구 2인제로 뽑았으니 야당이 전 지역구에서 2인씩 후보를 내야 의회권력 교체라도 가능할 텐데 유신체제의 신민당은 한 지역구에 1인만 후보를 내며 항구적 소수파 지위에 안주하였음)하고 실망하다가 라디오에서 2차투표까지 갔다는 의외의 소식을 듣고 (요샛말로 하자면) 깨어 있는 시민들(웃음)과 대학생들이 신민당사로 몰려간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 층계참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김영삼과 이기택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조직적으로 선창한 것도 아닐텐데 그들의 입에서 갑자기 "김영삼, 이기택"을 연호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 질식할 것 같은 유신독재, 긴급조치 독재 좀 제발 끝내달라고, 독재자 박정희한테 맞서서 좀 대차게 싸워달라는 시민들과 대학생들의 열망은 이제 신민당사를 둘러싼 거대한 함성으로 변해갔다. "김영삼, 이기택!"

이기택은 4.19세대로 그 감격과 흥분을 자양분 삼아서 정치에 입문한 이였다. 생애 최고의 리즈 시절인 그 날, 비록 고단한 코스라는 걱정도 들었겠지만 이런 국민들의 열망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던 모양이다. 2차 투표가 시작되기 직전 김영삼과 이기택은 굳게 손을 잡고 단상에 같이 올라가 번쩍 손을 같이 들어 둘이 연대^^했음을 알렸다. 이 역사적인 1979년 5월 30일 전당대회의 승패는 이것으로써 사실상 판가름이 났다.

이철승은 1차투표에서 87표를 얻어 4위를 했던 신도환과 한참을 귓속말을 하고 나서 3분지 1정도 투표가 진행되고 난 뒤 비로소 엉거주춤 같이 단상에 올라가 손을 함께 들어 힘을 합치기로 했다는 것을 알렸으나 이미 만사휴의(萬事休矣)였다. 그 날 김영삼은 불과 11표 차이로 이철승을 꺾고 신민당총재에 당선되었다(이상은 80년대 좌빨잡지 월간조선-_-;에 조세형대사님께서 기고하신 글에 바탕을 두었다. 조세형 대사님은 당시 재야 입당 케이스로 언론계에서 정계로 투신했고 이철승계였다가 79년말에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제1야당 당권 경쟁에서 김영삼은 박정희의 유신 정권에 대해 비판의 수위를 높였고, YH여공들이 신민당사에 와서 농성하다가 투신하는 YH사건,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회견을 이유로 한 의원직 제명 사건, 이에 반발한 부산과 마산의 민중항쟁인 부마항쟁(釜馬抗爭), 그리고 그 부마항쟁의 진압 방식을 둘러싼, 궁정동 최후의 만찬에서의 다툼 끝에 벌어진 10.26 사건까지는 정말 숨가쁘게 이어져서 결국 박정희의 유신 독재 정권은 종식되고 말았다.

2월 8일에 있을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가 이러한 1979년 5월 30일의 신민당의 전당대회와 같은 감동을 국민들에게 주면서 국민들의 절실한 열망을 담아 낸 당 대표를 뽑을 수 있을지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비록 이번 당 대표 선거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새정치민주연합이 최소한 다음 번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현 정권의 대안세력으로서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하여 보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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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5월31일 서울 노량진 본등약국에서 신민당 새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오른쪽)씨와 김대중씨가 환담하고 있다. 한겨레/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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