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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20일 10시 46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3월 22일 14시 12분 KST

국가원수 방미 중에 귀국해야 했던 어느 수행원 이야기

재작년(!)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첫번째 미국 방문 중에 웃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으로 창중간 아니 창졸간에 귀국했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근황이 최근 그의 형사 사건을 변호하고 있는 변호사를 통해서 알려졌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가원수의 미국 순방 중에 수행원이 중도에 귀국한 사례로는 이 사건 외에도 1961년 11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헥헥;)이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던 무렵에 비공식 수행원인 기자단의 일원이었던 당시 합동통신 리영희(李泳禧,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이른바 남한 민주개혁/진보진영에게 '사상의 스승'이라고도 불렸던 그 리영희 교수 맞다) 기자 사건이 있는데 아래에서 그 사건에 관하여 한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재작년(!)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첫번째 미국 방문 중에 웃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으로 창중간 아니 창졸간에 귀국했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근황이 최근 그의 형사 사건을 변호하고 있는 변호사를 통해서 알려졌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가원수의 미국 순방 중에 수행원이 중도에 귀국한 사례로는 이 사건 외에도 1961년 11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헥헥;)이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던 무렵에 비공식 수행원인 기자단의 일원이었던 당시 합동통신 리영희(李泳禧,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이른바 남한 민주개혁/진보진영에게 '사상의 스승'이라고도 불렸던 그 리영희 교수 맞다) 기자 사건이 있는데 아래에서 그 사건에 관하여 한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모처(?)에 리영희 교수에 관한 글(들)을 써보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지만 딴장을 치느라 미뤄왔었는데 (몇 편을 더 쓰게 될지는 기약도 없지만) 이 글은 그 첫 글이 되겠다. 참고로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지난 약 30년간 필자의 리영희 교수에 대한 생각은 계속 바뀌어 왔는데 현재 필자는 기본적으로 리영희 교수의 여러 입장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이하의 내용은 리영희 교수의 자서전 [역정: 나의 청년 시대]에 나온 것에 주로 바탕한 것이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과 박정희의 정상회담은 5.16쿠데타(물론 당시 어용어론들은 이를 5.16 군사혁명이라고 불렀다)를 미국이 추인하는 것이고 박정희 정권이 막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당시 어용언론들은 대서특필했고 국빈 오찬에 나온 식단까지 시시콜콜 '보도' 중이었다. 이들은 방미 수행단 기자가 박정희 일행을 따라다니며 기사를 쓰는 한편 기존에 미국에 있던 특파원이 박정희 일행이 방문할 예정지를 미리 가서 스케치 기사를 쓰는 방식으로 '입체취재'해서 언론사의 재정이 어려워 리영희 기자 한 명만 겨우 보낸 합동통신사를 압도했다고 한다.

4.19 때 시위에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참여했던 당대의 깨어 있는 시민(웃음) 리영희 기자는 이런 찬양일색의 보도가 뭔가 이상해서 이승만 정권 시절 그가 익명으로 기고를 하며 관계를 쌓아왔던 워싱턴 포스트지 편집국을 통해서 케네디 행정부 고위관계자와의 백그라운드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어 내었다. (참고로 리영희 기자와 워싱턴 포스트지의 관계는 그가 이승만 정권 시절 독재정권의 민주주의 유린에 관한 내용에 관한 내용들을 영문 기사로 작성한 것을 -이승만 독재정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공항에서 미국으로 귀국하는 미군 장교 등을 통해 어렵게 전달한 것을 워싱턴 포스트지가 실어 주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리영희 기자의 영어 실력은 그가 6.25를 포함하여 7년간 미군 통역장교를 하여서-나중에 미 8군 사령관인 밴플리트 장군의 통역까지 맡았음- 갈고 닦여진 것이었고, 통신사의 외신 기자를 하면서 더욱 빛을 보게 된다. 필자는 리영희 기자가 정말 워싱턴 포스트지에 기고를 했는지, 이게 구라가 아닌가 싶어-쿨럭;- 워싱턴 포스트지의 온라인 아카이브까지 뒤져 보았는데 모두 사실로 확인한 바 있다-_-;)

그렇게 해서 밝혀진 케네디-박정희 회담의 이면은 충격적이었다. 당시의 어용 언론의 보도와 같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해서 미국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내용은 개뿔;이고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에게 농업이나 소비재산업 육성을 권하고 자금지원은 미국에 기대지 말고 일본이랑 국교정상화해 받으라 했다는 취지였다.

이렇게 박정희가 업적으로 선전하던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을 까는 기사를 합동통신 서울 본사에 송고한 후 대통령 비공식 수행원인 리영희 기자는 조마조마해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여기까지 와서(그 무렵 해외여행은 큰 특전) 이상한(?) 기사 쓰는 이는 재미없다고 으름장 놓더니만 리영희는 박정희의 미국 방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국하라는 지시를 갑자기 본사로부터 받게 된다.

국가원수의 미국 공식방문을 수행하다가 졸지에 중도귀국 당하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리영희는 꼼꼼하게^^ 기자정신을 발휘해서 당시 하와이에 망명 중이던 독재자 이승만과 그 부인 프란체스카여사한테 들러서 이승만의 근황을 파악한 다음에 이를 전하는 기사까지 서울에 송고하고 귀국하였다.

국가원수 방미 수행 중에 중도귀국까지 당했으니 공항에 도착하면 체포될 줄 알았던ㄷㄷㄷ 리영희 기자를 기다린 것은 의외로 경찰이나 기관원이 아닌 그의 직장인 합동통신사의 간부였다. 출영 나온 이 직장 간부에게 리영희 기자는 비로소 저간의 사정을 듣게 된다(물론 인터넷이 없던 60년대 초의 이야기이다).

그 간부에 의하면 리영희 기자의 한미정상회담 이면을 파헤친 기사가 송고되자 합동통신 편집부에서는 게재 여부를 놓고 격론이 진행됐다고 한다. 게재를 결정한 이는 결국 사주(社主)인 박두병 사장(두산그룹의 사실상 창업자). 박두병 사장은 "특파원 보낸 비용은 뽑고도 남았으니 열심히 취재한 리영희 기자 성의를 봐서라도 실으라"고 했다고 한다. 대신에 박두병 사장은 정부체면도 있으니 리영희 특파원을 조기 귀국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리영희 교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런 박두병 회장의 대사업가다운 결단에 감탄한다("사장님 힘내세요"는 이런 때에, 쿨럭;). (그나저나 두산그룹이 1980년대까지 OB맥주 같은 소비재에 주력한 것이 혹시 이런 이유-응?-인가?)

하여간 어용언론조차도 이런 합동통신의 특종 기사를 받아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당시 깨어 있는 시민들(웃음)은 5.16쿠데타 이후 숨을 죽이고 있다가 미국이 여전히 박정희를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서 속이 후련했다고 하며, 언론도 논설이나 대담으로 이 내용을 재론삼론했다고 한다. 합동통신사는 박정희의 방미성과에 찬물을 끼얹은 중도귀국형 수행원^^ 리영희 기자의 단독^^ 보도를 낙종 후 무단인용한 다수의 어용언론사들을 제소하여 무단인용사실을 인정받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중도귀국형 수행원 리영희 기자에게 좀 치졸하게 깨알 같은 복수를 했는데 귀국 후에 방미 수행단^^을 초청해서 가진 위로 파티에 중도귀국형 수행원^^ 리영희 기자만 초대하지 않은 것이다. 리영희 기자는 자신의 자서전 [역정]에서 그 자리에 불러서 어깨라도 쳐주며 그렇게까지 기사 썼던 것은 좀 너무하지 않았냐며 너털웃음이라도 지었다면 소심한 기자는 더 감복하지 않았겠냐며 박정희의 협량(狹量)함을 개탄한다. (그나저나 당초에 리영희 기자가 방미 수행원에 뽑힌 건 청렴도 기준으로 수행기자를 선발했는데 리영희 기자는 외국 언론 기사를 번역하여 보도하는 내근만 하는 외신기자라 부패할 기회가 없었던(쿨럭;) 탓이라고 한다.)

뭐랄까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년 리영희 기자는 나름대로의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고, 그것이 부패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든 또는 개인의 윤리적 결단이든지 간에 청렴한 기자였으며, 또한 (워싱턴 포스트지 같은 미국의 고급 언론사의 편집진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영어 실력(물론 그 영어 실력이 어떻게 하여 갈고 닦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의 장래의 행적에 비추어 보면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다)을 비롯해 기자로서의 능력도 빼어났다는 점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글들 중에 지금도 적실성을 갖는 것은 그가 기자협회보에 먼저 실었고, 나중에 [전환시대의 논리]에 수록한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투철한 직업의식과 청렴성으로 무장되지 못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기자들을 비판했던 "기자풍토종횡기"가 아닌가 싶다. 기회가 닿는 대로 (내가 보기에는) 적실성이 크게 떨어지는 리영희 교수의 다른 글들에 대한 비판도 준비해 보기를 기약하며 이만 글을 맺는다.

리영희 교수는 1959~60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신문학 연수를 받았다. 사진은 당시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을 방문해 찍은 것이다. (사진 출처 : 리영희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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