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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01일 07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3월 03일 14시 12분 KST

징병제만이 강군을 만들고 민주주의에 부합할까?

역사를 살펴 보아도 징병제라는 것이 모병제(募兵制)에 비하여 반드시 군의 전력 강화라든지 사회통합,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군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이 시점은 어찌 보면 우리 사회도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징병제를 다른 나라와 시대처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순간이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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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 병영에서 터진 각종 끔찍한 사고들은 그 원인을 찾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당연한 여론을 불러 일으킨 것에 이어(문제는 현 정부 수준이 그런 최소한의 요구조차 제대로 반영할지 의심스럽다는 참담함이겠지만) 어쩌면 보다 근본적으로 징병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냐 하는 논의마저 다시 일어나게 한 듯하다. 이 글에서는 모처로부터의 권유에 따라 내 트위터에 올렸던 글들을 정리하여 일정한 나이에 도달한 성인 남성(이스라엘과 같이 여성도 포함인 경우도 있음)이 원칙적으로 일정 기간 군대를 가야하는 (현재 우리나라가 유지하고 있는) 징병제(徵兵制)와 직업군인들만으로 군대를 구성하는 (현재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방식인) 모병제(募兵制)의 장단점을 서양사의 맥락에서 한번 살펴 보기로 한다.

징병제의 기원이라면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제(重裝步兵制)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것 같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폴리스)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부담으로 무기와 갑옷을 마련했다. 이들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던 평범한 농부였으나, 외적이 쳐들어 오면 중장보병으로 변신해서 자신들의 집과 가족, 고향을 지켰다. 이렇게 전사와 농민을 겸한 이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밀집방진(密集方陣)을 이루어 적과 싸웠는데 내가 싸우다 무너지면 내 곁에서 싸우는 내 동료, 내 이웃도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상황에 대한 인식은 이들을 끈끈하게 전우애로 뭉치게 했고 나아가 내가 내 힘으로, 내 돈으로 마련한 장비로 내 고장을 지킨다는 자부심은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꽃피게 되는 토양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전제군주가 다스리는 페르시아제국과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용병들로 이루어진 페르시아제국군을 마라톤과 플라타이아의 육전에서 물리침으로써 이런 (고대) 시민군의 우수성에 대한 신화가 퍼져 나가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중장보병의 장비를 갖추기 위한 적지 않은 비용이 결국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자작농 수준에서 고대 민주주의의 기반을 제한하였었는데 역시 페르시아 전쟁 중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좀 더 가난한 시민들까지 수병(水兵)으로 참전하게 되고 이들을 위한 국가의 보조금의 지급까지 이루어지자 이제 고대 그리스, 그 중에서도 가장 번영했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모든 성년 남성 시민들(안타깝게도 고대 민주주의에서는 여성, 미성년자, 외국인은 투표권이 없었다)이 함께 무기를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응?) 같이 민주주의를 가꿔 나가는 고대 그리스의 최전성기가 꽃피게 되었다(기원 전 5세기 중엽).

자율적인 시민들이 모두 평등하게 군대를 가고 그들은 평소에는 농사짓고 일하다가 자유와 내 고장을 지키기 위해 같이 무기를 들었으며 이런 중장보병/수병들은 강제로 끌려오거나 돈에 팔려온 전제 국가의 군대나 용병보다 암만 숫자상으로는 딸린다 하더라도 투지와 동기부여에서 앞설 수밖에 없으니 전쟁을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시민군의 정당화근거였고 나아가 근대로 와서도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징병제의 이론적 바탕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중장보병, 시민군 무패의 신화는 고대 그리스에서조차 역사적으로 항상 타당성이 입증된 것이었나? 이런 자율적 시민군의 용병에 대한 우월성의 근거로 들어지는 이 페르시아 전쟁의 신화는 그 후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전쟁인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가장 민주적이던 아테네는 군국주의 스파르타한테 패하고 만다. (얼마 전 트위터스피어에서 어느 보수적인 트위터리안이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중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한 이 아테네가 당연히 군국주의적 정치 체제를 가졌던 스파르타를 이겼으리라고 착각했다가 대망신을 당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스파르타도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에게 패하여 패권은 테베로 넘어 갔다가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왕국의 전제군주 필립포스왕에 의해 그리스 도시국가 전체가 정복되고 만다. 자율시민군과 민주주의가 용병과 전제주의를 반드시 이긴다는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서만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고, 싸움은 그냥 싸움 잘하는 군대가 이기는 것이었음이 페르시아 전쟁 직후의 그리스의 사정이 생생히 보여 준 셈이라고나 할까. 심지어 그리스군 중 일부는 페르시아 제국 내의 내전에 용병으로 가담해서 불과 1만명의 군대로 페르시아 전역을 짓밟고서 나름 유유히 빠져 나온 일도 있었으니(크세노폰) 용병보다는 시민군이 좋다는 것도 고대 그리스의 이런 사정을 살펴 보면 글쎄 예전의 유행어처럼 "그때 그때 달라요"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군 옹호론자들이 고대 그리스의 몰락에서 물러날 이들이었으면 오늘날까지 징병제가 이어 지게끔하는 신화가 안 만들어졌을 것이다. 시민군, 중무장 보병의 신화는 고전 고대에서 또 하나의 강력한 역사적 지지 근거를 찾으니 이는 물론 고대 로마 공화정이다. 기원전 6세기 초부터 시작했다는 고대 로마 공화정 역시 자작농 기반의 중장보병 시민군들에 크게 의지를 했고 고대 로마 공화정이 이탈리아 반도를 한땀 한땀 통일해 가는 과정과 그 로마군을 이룬 평민들이 귀족들과 계급투쟁을 해가며 공화정을 더욱 평등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은 거의 겹쳤으니 고대 그리스와 거의 동시대에 진행된 이러한 고대 로마공화정의 사례는 마키아벨리나 프랑스대혁명기 혁명가 등 후대의 국민개병제 옹호론자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대 로마공화정의 이들 중장보병 시민군은 기원 전 3세기부터 기원 전 2세기까지 세 차례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포에니전쟁에서 절정의 모습을 보여 준다. 강력한 해군국인 카르타고를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육전 같이 선상에서 싸울 수 있게 한 까마귀란 도구를 이용하고 또 전함들이 격침되어 갈 때 (우리로 치면 꼭 예전에 노사모가 돼지 저금통 모금하듯이) 시민들이 전함 건조비를 모아서 이겼었던 로마인들이라니 마키아벨리부터 시오노 나나미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위인, 작가들이 고대 로마에 끊임없이 감동할 만한 이유가 바로 이 포에니전쟁이라고 할만하다. 또한 한니발이란 걸출한 명장을 그야말로 갖바치 세 명이 모여도 제갈량보다 낫다는 정신으로 뭉친 로마군들이 물리친 제2차 포에니전쟁도 길이길이 시민군/징병제 옹호론자들이 인용할만한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의 승리 후 로마는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세계를 제패했으나 바로 그 성공이 그 후의 백여년 간 계속된 공화정 말기 대혼란의 원인이 되었고 그 와중에 징병제 옹호론자들은 그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역사적 증거를 찾았다고 보여진다. 즉 포에니전쟁의 결과 로마 귀족들의 토지겸병(土地兼倂)이 진행되고 로마가 정복한 영토들로부터 쏟아져 들어 온 노예 노동력을 활용한 대규모 농장들과의 경쟁에서 자작농(自作農)들이 밀려나면서, 그 자작농에 기반을 둔 시민군/중장보병제에도 위기가 닥치면서 고대 로마 공화정 자체도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아울러 그 해법으로 나온 마리우스 이래의 모병제 스타일의 군대는 결국 이렇게 군대를 모집해 먹이고 장비를 갖춰줄 수 있는 몇몇 유력자들의 손에 로마 공화정의 운명이 맡겨지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유력자들(마리우스, 술라, 크랏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간 지긋지긋한 100여년 간의 내전 끝에 결국 공화정이 무너지고 내전의 최종승자인.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제정(帝政) 즉 로마 제국의 문을 열게 된다. 즉 거칠게 말해서 징병제의 붕괴는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가져 왔고 1인 독재에 세습제가 결합된 제정으로 이어지고 말았으니 징병제 옹호론자들은 지금도 징병제가 공화정과 민주주의를 지키고 공동체 시민들 간의 평등을 촉진한다는 강력한 역사적인 징병제 지지 근거를 로마공화정이 제정으로 변질되어 가는 전개 과정에서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역시 시민군이 용병보다 더 우수하다는 류의 주장은 로마가 제국으로 바뀐 후에도 팍스 로마나 즉 로마제국 하의 평화가 로마군의 힘에 의해 200여년 간 유지된 것을 보면 근거가 그렇게 튼튼하지 못함이 고대 그리스의 사례에 이어 고대 로마의 사례에서도 다시금 확인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도 로마제국이 가장 번영했다고 기술한 이른바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즉 오현제(五賢帝) 시대가 서기 1세기 후반부터 2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이때 비록 공화정은 무너졌고, 시민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로마제국은 직업군인제로 유럽에서는 영국에서부터 라인강에서 다뉴브강으로 이어진 기나긴 방어선 및 아시아에서는 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유프라테스강까지 미치는 대제국을 유지하였다.

서양사에서 징병제/모병제 간의 논란은 로마제국이 게르만족 대이동으로 망하고 중세. 천년의 이른바 암흑시대(정말 그랬느냐는 호이징가 같은 학자의 주장대로 논란이 있지만)를 거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기에 고전 고대 부활의 움직임이 일어나며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 중심에는 시민군 옹호론자인 이탈리아 도시국가 피렌체의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통속적으로 이해된 소위 마키아벨리즘으로 500년 넘게 이어지는 악명을 얻었지만 그의 사상은 정치와 도덕을 분리해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하게 하였다는 것에 그 근대적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의 사상 중 주로 시대상-15세기말, 16세기초의 이태리 르네상스기-을 반영한 부분 중의 하나는 시민군 양성론 겸 용병 혐오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어찌 보면 고대 그리스와 비슷하게 도시국가들(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등) 간의 쟁패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용병대장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고서는 이들 도시국가들 간의 싸움을 대신 해주고 있었음. 예컨대 피렌체가 자신의 속국인 피사가 반란을 일으켰다 싶으면 꼭 심부름센터에 전화해서 심부름 시키듯이 자신들이 계약한 용병대를 불러내서 그들을 써서 반란을 진압하는 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도시국가와 용병대장 사이에서는 후대에 주류(主流) 경제학에서 얘기하는 이른바 대리인 비용 문제가 발생한다. 즉 도시국가 피렌체로서야 속국 피사의 반란을 진압하는 게 최우선이지만 용병대장이야 계약상 의무는 다 하지만 자신이 거느린 용병 부대를 가능한 한 다치지 않게 하면서, 즉 그 전력(戰力)을 계속 보존하면서 오랫동안 용병대장 노릇을 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기 마련. 그래서 실제 피사의 반란 진압에 있어서도 용병대장이 급료가 적다느니 지원이 부족하다느니 핑계를 대면서 전쟁을 질질 끌었고; 이 피사의 반란은 용병대에 무력을 의존하고 있던 피렌체공화국 정부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폭로한 예가 되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용병대장들은 예를 들어 자기네끼리 각각 도시국가에서 의뢰를 받아 전투를 할 경우엔 심지어 단 한 명도 전투에서 안 죽고 싸우는 시늉만 한 예도 있었다고(그 '전투'에서는 사고로 한 명이 딱 죽었다고 함) 개탄하기도 했었음.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비롯해서 고전 고대의 역사를 나름 깊이 공부했던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국방을 용병에게 외주를 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 신성로마제국 같은 외세의 개입을 불러와 이탈리아의 상황을 참담하게 만들었다고 인식하고 이러한 상황의 타개는 군사적으로는 이런 용병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 공화정처럼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군을 양성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로 마키아벨리는 (물론 다른 면에서도 그 매력에 흠뻑 빠졌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서자;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용병대장들을 처단했을 때 이탈리아를 좀먹는 자들을 없앴다는 취지로 발표하자 그야말로 열광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론적으로만 시민군을 주창한 것이 아니라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관으로 있을 때에는 아예 시민군조직에 나서기까지 했었다. 그가 조직한 시민군이 처음 대오를 갖춰 훈련하는(?) 날을 가리켜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다룬 그녀의 책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 마키아벨리의 삶 중 제일 행복한 날이었을 것 같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일전에도 썼듯이 마키아벨리는 군사지휘관으로서는 영 소질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가 조직한 피렌체 공화국의 시민군도 외세를 등에 업은 참주(僭主)가문 메디치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즉 뭐랄까 시민군이란 것이 민주주의나 공화국의 정신에는 분명 부합하지만 싸우는데 이골이 난 프로들인 용병들하고 말하자면 평소에 다른 일을 하던 일반인들인 아마추어 시민군들이 서로 맞붙으면 이 르네상스 시기에도 마키아벨리의 그런 시민군의 이상론과는 달리 실제 용병부대에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여간 르네상스기에 마키아벨리가 이렇게 다시 정식화한 시민군/국민개병제/징병제 옹호론은 마키아벨리 생전에 출판되어 그에게 어느 정도 상업적 성공을 안겨 준 [전술론]에서 제대로 전개 되었다는데 이런 시민군 옹호론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영국령 즉 후일의 미국으로 건너가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런 자작농들이 중심이 된 민병대(militia)야말로 민주주의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하며 실제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 대륙군 사령관이었고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워싱턴은 아예 민병대 지휘관 출신으로 프렌치 인디언 전쟁부터 입신양명했으니 미국이야말로 어찌 보면 건국부터 시민군/국민개병제/징병제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됨을 믿었던 이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말하자면 진정한 유격대국가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근대에 들어와 징병제를 대세로 만든 결정적 계기는 프랑스대혁명.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 아래 이 세상에 존재해온 모든 불의와 부정과 적폐를 이성의 힘으로 다 때려부수겠다는 장쾌한 청사진을 제시한 이 프랑스대혁명은 당연히 유럽대륙 전체에서 구체제(앙샹 레짐)에 동정적이던 외세의 군사적 개입을 불러왔다. 마악 태어난 프랑스공화국에 제대로 된 군대가 있을 리 없었고 결국 장비도 제대로 못갖춘 거지꼴인 채로 혁명정신만은 충만한 국민군이었는데 아아 정말 놀랍게도 프랑스혁명군은 유럽대륙 각국 군들을 거의 모조리 쳐부순다.

뭐랄까 왕이나 황제가 소집해 억지로 끌려나온 구체제가 지배하는 나라의 군인들이랑 비록 거지꼴일망정 공화국 시민들이 내 자유를 지키겠다고 뛰쳐 나온 군인들이랑 붙어서 후자가 완전히 전자를 무찔러 버린 것. 괴테는 프랑스혁명군의 첫 승리인 발미 전투를 두고서 역사가 새로 만들어지는 중이란 취지로 말했다던데 정말로 그러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등 유럽 열강들의 군대는 프랑스혁명군 나중에 나폴레옹의 대육군 앞에 그저 추풍낙엽이었다. 공병장교 루제 드 릴이 작곡했으나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이유에서부터 혁명을 구출하기 위해 모인 군인들이 우렁차게 불러제끼며 파리까지 진군해 와 '라 마르세이예즈'가 되었다는 프랑스국가처럼 근 30년 가까이 프랑스군은 유럽을 휩쓸었다. 프랑스혁명군/대육군 보다 더 국민군/징병제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는 예는 없었던 것 같았다. 프랑스혁명이 불러일으킨 자유/평등/박애의 정신과 민족주의가 결합하니까 정말 어마어마하고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준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게 나폴레옹 전쟁 말기쯤으로 가니까 유럽 전역에서 말하자면 반면교사 격으로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프랑스 말고 다른 유럽국가들에서도 이런 국민개병제에 바탕을 둔 국민군들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 이태리와 독일이 뒤늦게 통일될 무렵쯤에는. 민족주의적 열정에 감염된 각국의 국민군들로 유럽 대륙이 가득 차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인 1914년에는 이렇게 대치하던 각국의 징병제 하의 국민군들이 부딪히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제1차 세계대전 특히 서부전선에서 3년 넘게 계속된 참호전에서 한세대의 유럽 젊은이들이 포연 속에 사라지고 나서야, 민족주의라는 것이, 국민개병제라는 것이 실은 사람 목숨을 갈아 넣는 허울좋은 미친 짓이라는 것이 백일하에 폭로되고 만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불과 20년만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시즘이란 이념의 광풍을 통해 유럽이 또 한 번 잿더미가 되고 말자 이제 민족주의, 이념 과잉, 애국심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나름의 분위기가 적어도 (서)유럽(아니면 미국 아들 부시 대통령 때 국방장관을 지낸 럼스펠드의 표현대로라면 Old Europe)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런 유럽을 말하자면 바로 잿더미서 구출해 줬던 미국에선 여전히 국민개병제/징병제가 20세기에 들어 와서도 상당 기간 동안 큰 비판 없이 나름대로 유지되었다. 이게 좀 흥미로운 게 미국 독립전쟁이야 민병대에 의지한 면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실은 미국은 19세기 중엽의 남북전쟁이란 끔찍한 내전을 겪으며 징병제란 것이 생사람 잡는 짓이라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집단 체험을 하기는 했었고, 특히 미국 남부로 진격한 북군 셔먼 장군의 작전은 뒷날 일본군이 중일전쟁 때 했다던 삼광작전(三光作戰)을 방불케 하는, 그야말로 적의 민간인과 산업시설마저 초토화시키는 무시무시한 작전이었다.

이러한 내전을 직접 겪고 나서도 말하자면 툭툭 털어 버리고 (논란이 없지는 않았지만) 국가통합을 이루어낸 미국의 힘이란 것은 뭐랄까 그저 가공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듯싶다. 그리고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에 호출되어 (이건 뭐 데우스 엑스마키나라. 해야 하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몇 년 간 영불 연합군과 독일군이 지리하게 참호전으로 맞서던 서부전선을 단칼에 정리해 힌덴부르크선이라는 독일 방어선을 와르르 무너지게 하질 않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에서는 초기 일본 연합함대가 불과 몇 척의 항공모함을 가진 걸 두고 우리 항공모함을 전세계에서 제일 많이 갖고 있음하고 자랑하던 것을 전쟁 말기로 가면 미국은 항모 50척씩을 척척 생산해 낸다든지 버마에서 일본군이 정글전을 하려고 하니 정글을 모조리 밀어 도로를 만들어 버렸으니, 미국의 압도적 산업생산력과 이로 뒷받침되는 미국의 무력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겠다.

양차 세계대전 후의 한국전쟁에서도 미군은 사실 이런 불패의 신화랄까 이런 걸 계속 이어간 셈이고 말하자면 세계의 보안관 내지 소방수 역할을 한 셈인데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에게 패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배권을 포기하게 되는 시점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자신들이 이 전쟁을 떠맡게 되고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서 남북전쟁이란 내전을 겪고도 유지했던 징병제란 이슈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듯 싶다.

뭔가 눈에 씌인듯이 당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은 베트남에서 식민지에 대항하는 독립운동 세력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반공의 대결 프레임으로만 인도차이나 반도를 바라 봤다. 실은 미국이 공산권 지도자라 할지라도 예컨대 충분히 반소적일 수 있는 예를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 같은 경우로 겪고 나서도, 그리고 중국에서 공산당의 모택동이 아닌 장개석의 국부에 베팅했다가 폭망한 경험이 있음에도 호지명이란 베트남 독립운동가를 그저 공산주의 지도자란 틀로만 바라본 큰 실책을 한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이 결코 선린관계가 아니었다는 것도 간과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철저히 실패한 다음에야 이제 자진해서 자신들에게 군사 기지를 내어주며 접근하는 통일 베트남을 지켜보고 있다. 어쩌면 이런 일은 베트남전쟁이란 참혹함을 겪지 않고도 몇십 년 전에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 아니었을까 싶다.

징병제 찬반론 얘기한다고 시작한 글이니(쿨럭;) 다시 그 얘기로 돌아가면 이런 미국의 월남전 삽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조금 멀게 잡으면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의 정치적 타협을 거부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부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미국을 베트남전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가장 큰 책임자는 케네디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민주당 출신으로 미국 진보의 화신이며 심지어 그런 그가 못마땅한 이른바 군산복합체의 음모에 의하여 암살당했다는 음모론이 지금까지 떠도는 안타까운 대통령 존 F. 케네디이지만 그의 재임시부터 미국이 월남전의 수렁에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케네디 대통령 암살 직전에 그가 월남의 독재자 고딘디엠을 제거하는 것에 동의한 건 월남의 정정(政情)을 지극히 불안하게 만들었고, 결국 케네디 다음 대통령인 존슨 때의 통킹만 사건 후 미국은 본격적으로 월남전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특히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 이후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높아졌고 심지어 징병을 기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훗날 미 대통령이 되는 빌 클린턴은 징집영장을 불태웠고 조지 W 부시는 주방위군으로 복무해서 조부와 부친의 빽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렸으며, 민주당 대선 후보였고 현재 국무장관인 존 케리는 퍼플 하트 훈장을 받은 참전용사였으나 제대 후 반전운동에 뛰어드는가 하면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은 당시 부당하게 집행된 징병제가 미국민들의 단결을 해쳤다는 취지로 자서전에서 개탄하기에 이른다. 결국 미국이 북베트남과 파리 강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시킨 후에 닉슨 대통령 재임 중 미국은 사실상 징병제를 폐지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진 나라인 세계 최강국 미국이 징병제를 없앤 것이다.

여태까지 살펴 본 역사적 사례들을 살펴 보면, 징병제를 옹호해 온 가장 강력한 두 가지 근거가 징병제가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강력한 군대를 만든다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이 두 가지 주장 모두에 대한 또 하나의, 그것도 극히 최근의, 강력한 반례가 생긴 셈이라 하겠다. 미국 민주주의는 징병제를 폐지하고 나서 위기에 처하기는커녕 대통령을 탄핵해서 끌어 내렸고(닉슨), 탄핵시도를 하는가 하면(클린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뽑아서 여전히 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있음을 세계에 과시 중이다. 미국의 군사력도 여전히 세계 최강이어서 보스니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전쟁에서 유감없이-_-; 과시되었고 소련과의 냉전도 승리로 마무리하였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 봤지만 이렇게 역사를 살펴 보아도 징병제라는 것이 모병제(募兵制)에 비하여 반드시 군의 전력 강화라든지 사회통합,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군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이 시점은 어찌 보면 우리 사회도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징병제를 다른 나라와 시대처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순간이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마침 지난 대선 때 민주당 후보였고 차기 대선에서도 이미 유력 주자로 거론 중이신 문재인 새정치연합 전 비대위원께서 앞으로 모병제로 가야한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셨다니 어찌 보면 이로 인해 논의의 물꼬가 터질 수도 있을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다. 모쪼록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군을 모두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징병제와 모병제 관련 논의가 전개되기를 기원한다.

비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