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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9일 09시 14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2월 18일 14시 12분 KST

내 집에 허락없이 오지 마세요 | 삼고초려의 진실?

약속 잡지 않고 남의 집에까지 찾아가는 것이 이른바 진정성으로 포장되는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진정성도 뭣도 아니고 그냥 무례한 것 아닐까? 아니 전화, 이메일, 메신저, 중간에 쌍방을 아는 지인들을 다 놔두고서 대뜸 상대방의 사생활의 공간인 집으로 쳐들어가는 것인데, 더 고약한 것은 그렇게 찾아온 사람을 안 만나 주는 사람은 문전박대를 하는 그냥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를 시도한 사람은 손해 볼 것이 없는 꽃놀이패라 할 것이다.

한겨레

땅콩항공(웃음)의 모(某) 전(前) 부사장님께서 "비행기에서 뛰어내려"라고 하셨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폭언을 비행기 사무장님께 하시고는, 그렇게 모욕을 당하셨던, 사무장님 댁으로 두 번이나 찾아가셔서 뵙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셨으나, 첫번째 '편지'는 방송에서 공개되어 망신을 당하셨고, 두 번째 '편지'는 아직 우편함에 꽂혀 있어 개봉도 되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줄줄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가 정덕 워너비 아니랄까봐서), 나는 문득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야권 후보 단일화 문제로 한참 시끄러웠던 시점에 한쪽 당사자였던 문재인 의원님께서, 상대방인 안철수 전 새정치연합 대표님께서 외출할 예정이라고 알렸는데도 불쑥 안 전 대표님 댁을 찾아갔던 일이 떠오르는 것이다ㅜㅗㅜ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솔직히 내게는 엄청 불편했는데, 다른 것보다도 약속 잡지 않고 남의 집에까지 찾아가는 것이 이른바 진정성으로 포장되는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진정성도 뭣도 아니고 그냥 무례한 것 아닐까? 아니 전화, 이메일, 메신저, 중간에 쌍방을 아는 지인들을 다 놔두고서 대뜸 상대방의 사생활의 공간인 집으로 쳐들어가는 것인데, 더 고약한 것은 그렇게 찾아온 사람을 안 만나 주는 사람은 문전박대를 하는 그냥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를 시도한 사람은 손해 볼 것이 없는 꽃놀이패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도대체 (요새 유행하는 말투로 하자면) '왜 때문에' 남의 집에 연락 없이 불쑥 찾아가는 행위가 이렇게 진정성을 담보하는 행위인 것처럼 포장이 되었나 싶은 것에 절망하다가 혹시 이게 다 중국의 고전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故事) 때문이 아닌가 싶은 엉뚱한 데에 생각이 미쳐서, 이런 잘못된 관행이 뿌리 뽑히기 위해선(뽑힐 리가-_-;) 우선 원점타격(쿨럭;)을 하여 그 고사의 신화부터 철저히 부수어 놓아야겠어서 예전에 트위터에 올렸던 삼고초려에 관한 글을 수정, 보완하여 다시 올려 본다.

삼고초려란 중국사에서 십상시(十常侍)가 국정을 농단하던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후반까지의 후한(後漢)말에서 삼국시대를 다룬 소설 [삼국지연의]의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가 되는 사건이다. 보통 열권쯤 되는 삼국지를 날림으로 후딱 요약해 보면 이 소설의 전반부에서 착한 편(응?)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나라 황실의 후예 유비(현덕)는 악당(쿨럭;)인 조조한테 판판이 깨지다가 한자락 붙잡고 있던 가능성까지 여남이란 곳에서의 싸움에서 패하여 다 잃어버린다. 그 패배 후 부하들을 수습한 유비는 같은 집안의 먼 형님이라고 할 수 있는 유표가 다스리는 형주라는 곳으로 기어들어 와 유표가 빌려 준 신야라는 조그마한 성에서 웅크리고 산다. 이 무렵 유비는 일도 제대로 안 풀리며, 돼지처럼 먹기만 하여 말도 타기 힘겨울 정도로 살만 뒤룩뒤룩 쪘다면서 한탄(비육지탄, 髀肉之嘆)하던 한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유비는 이른바 때를 기다리며 숨어있는 용(복룡, 伏龍)이라고 불리던 천하의 기이한 인재(기재, 奇才)인 제갈량(공명)이 자신이 머무르던 이 형주/남양 땅에 있다는 것을 수경선생이라는 현자 및 서서(단복)라는 자신의 한때의 부하를 통하여 알게 된다. 유비는 자신이 당시 황제인 헌제로부터 숙부라고 불렸던(황숙, 皇叔) 존귀한 신분이고, 나이도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관직에도 나가지 않은 젊은 인재인 제갈량이 살고 있는 누추한 거처에 무려 세 번이나 직접 찾아 갔고(그 중 두 번이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세 번째도 낮잠을 자던 제갈량이 깰 때까지 정중하게 기다렸다가 그에게 가르침을 구했고 그를 군사(軍師)로 등용했으니, 이것이 바로 삼고초려의 고사이다.

유비가 인재를 구하기 위한 간절함과 진정성(아하!)이 이와 같았기에 제갈량은 이런 유비의 정성에 감복하여 그에게 천하제패의 기책(奇策)인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알려 주었고, 나중에 유비의 아들 유선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대를 이어(뭐래니?) 충성을 다하면서 제갈량은 전근대(前近代) 동아시아에서 모든 충신 워너비들이 읽으며 눈물을 줄줄 흐르게 했다는 출사표(出師表)와 같은 명문을 썼다고 하니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알홈다운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암만 십상시의 국정농단 후 망조가 들었던 후한이지만 그 황제에게 숙부라 불렸던 존귀한 신분이며 한때는 당대의 최강자 조조랑 맞짱을 떴던 유비가, 노블리스 오블리주(풉)를 실천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면서, 지금처럼 추운 겨울에, 자신의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마저도 투덜거리는 것을 꾸짖어 가면서 그들까지 강제로 같이 가자고 해서, 단 한 번도 실전에서 그 실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던, 결국은 고급 취준생쯤 되는 제갈량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세 번이나 직접 찾아갔다는, 이 삼고초려의 고사는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고, 실제 역사에 나오는 일이었을까?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는 중국사에서 이 삼국지연의의 악당이고 유비와 제갈량의 공적인 조조의 세력이 어떤 것이었는지부터 검토하여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조조가 차지한, 나중에 위나라가 되는 중원(中原=화북평원)의 위상은 중국사에 있어서 절대적이다. 중원 바깥의 강남(江南)의 경제력은 나중에 서기 12세기의 남송(南宋)대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중원을 앞설 수 있었다. 기나긴 중국 역사를 통틀어, 중국을 통일한 이들 중에서 강남을 기반으로 한 이는 남송과, 원나라를 지난 14세기 후반에 건국된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20세기의 국민당의 장개석뿐;이니 까마득한 중국 후한말과 삼국시대(서기 2세기말 3세기초)에 중원의 지배자인 조조, 문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후한제국 승상(모국의 국무총리와 혼동 금지)인 조조의 위상은 절대적이라고 하겠다.

실제 조조의 아들 조비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세운 위(魏)의 국력은 유비가 나중에 지금 중국의 사천성(四川省)에 세운 촉한(蜀漢)의 국력의 다섯 배라 했고, 삼국 중 나머지 나라인 손권이 세운 오나라의 국력이 촉한의 두 배라고 흔히들 일컬어진다. 다시 말해 촉나라와 오나라 둘을 합쳐도 위의 국력의 60% 정도인 셈이니 이건 뭐 처음부터 싸움이 될 수 없는 것이었고; 지극히 유리했던 위(나중엔 서진(西晉))의 입장은 촉과 오가 덤벼오는 것에 대해(특히 촉의 승상 제갈량의 북벌에 대해서) 전술적 방어와 전략적 공세의 방침(다시 말해 상대가 암만 싸움을 걸어 와도 자신의 땅을 굳건히 지키며 회전에 나서지 않아서 절대적인 국력이 딸리는 상대를 지쳐 나가떨어지게 하는 전략)을 고수하면 되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위는 촉을 멸망시켰고, 위를 이어받은 서진이 오를 멸망시켜서 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스스로를 중국 춘추시대에 제나라 환공을 첫번째 패자(覇者)로 옹립하는 공을 세운 제나라의 재상 관중과 전국시대에 제나라의 70여개의 성을 함락시켰던 연나라의 악의에 비유하였다는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졌던 제갈량이기에 이런 유비세력 내지 향후 촉한이 되는 세력의 절대적 열세를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았을까? 실제로 제갈량이 유비의 권유를 받아들여 유비캠프에 합류하게 될 무렵에 그의 동년배 동향인들 중 절대 다수가 위나라에 출사(出仕)했는데(뭐랄까 요새 같으면 대기업이 쓸만한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_-;) 나중에 자신은 촉의 승상이 되고 나서도 자신과 동문수학한 친구들은 위에서 겨우 중간관리자급에서 일하는 걸 보고, "이 사람이 아직도 이 자리밖에 오르지 못했다니 위에는 얼마나 인재가 많은가"하며 제갈량은 탄식했다고 한다.

이렇게 제갈량은 천하쟁패의 승자는 가만히 놔두면 조조나 그의 계승자들이 되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었지만 뭐랄까, 이미 다 주요 포스트들이 다 차있는 조조 측에 붙었다가는 자신이 가진 포텐셜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쓰이지 못할 것에 대한 계산을 마치고, 비록 현재는 요새로 치면 다크 호스 내지 이머징 마켓, 중소기업이지만 나름 좋은 아이템(십상시의 국정 농단으로 기울어진 한나라 황실의 부흥이라는 명분)을 가졌으나 주변에 제대로 된 참모가 없어 현재까지는 죽을 쑤고 있었던 유비라는 군벌을 골라서 한 번 도박을 걸어 본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제갈량 같이 가진 것이라고는 똑똑한 머리밖에 없는 이가 난세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 볼 선택을 하는데 위에 소개한 삼고초려 고사의 이른바 공식 설명처럼 한가히 유람이나 다니고 집에 가만히 있다가 유비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했을까? 난 그보다는 유비가 제갈량 자신이 사는 형주/남양 인근의 신야로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지역의 다른 인재들과 함께 신야성으로 유비를 직접 찾아가 회견하면서, 유비가 형주의 인재들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살펴보며 그의 사람됨을 가늠해 보고, 또한 제갈량이 그 자리에게 유비의 임시 근거지인 신야성의 호구조사를 다시 해서 임박한 조조의 침입에 대비해 군대를 보강하라는 원포인트 레슨을 유비에게 해주어서 자신의 실력도 슬쩍 보여줬다는 설이 오히려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다. 유비도 조조에 맞서 한때 천하패권을 다투던 효웅(梟雄)인데 수경선생 등 책상물림들의 추천만 듣고 일급참모를 뽑았다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실제로 제갈량의 실력을 테스트해 볼 기회를 갖고 그 결과가 맘에 들어서 뽑았다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제갈량의 전매특허처럼 알려져 있는 천하삼분지계만 해도 이미 [삼국지연의] 자체에 동오의 참모인 노숙과 무장 감녕이 유사한 아이디어를 자신들의 주군인 손권에게 (물론 동오 입장에서) 제기했던 걸 보면 당시 식자(識者)들 사이에선 어느 정도 공감대가 이미 형성된 시국관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지 꼭 제갈량만의 독자적인 대전략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서 아무래도 나는 앞에서 본 것처럼 조조 쪽에 비해서는 물적, 인적 resource가 훨씬 딸리는지라 가진 것은 말하자면 명분뿐이었던 이 유비 세력 내에서 자신들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참모인 군사(軍師)를 리크루트하는 과정을 좀 더 극적으로 묘사하고 또 그 과정에서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몸을 낮추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군 유비의 인덕을 과장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신화가 바로 삼고초려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응?) 진심 어린 사과를 하거나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 주고 싶은 이들은, 이렇게 논리적으로도 말도 안 되고 실제 역사적으로도 일어났을 법하지 않은 삼고초려의 코스프레를 하면서 남의 집에 무례하게 약속도 없이 찾아가는 무례를 더 이상 저지르지 말고 제발 사과를 받거나 부탁을 받는 입장에 선 분들께 더 이상 불편을 끼치지 않고 상대방이 편한 시간과 장소에서 뵙기를 청하는 최소한의 상도덕이라도 지켜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비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