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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2일 09시 26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10월 26일 12시 23분 KST

파국으로 끝난 궁정 권력 다툼 '10.26'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에게 총을 겨눠 그를 죽인 김재규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박정희의 입김이 곳곳에 서린 보살핌을 받아가며 출세길을 달려 왔고 그 직전까지 박정희 독재를 유지하고 반대자를 제거하는 공작에 열심이었던 독재자의 진돗개, 아니 충견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런 김재규를 속된 말로 빡치게해 박정희를 살해하기에 이르게 한 원인은 잘 알려졌듯이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갈등이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 논란 중에 배후 실세라며 일부 언론에서 지목하였던 정윤회씨가 드디어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제 그러한 논란이 발생한 청와대에서 나왔다는-_-; 소위 찌라시 문건의 진위는 일단 검찰이 밝히리라 기대해 보면서, 지금까지도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관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35년여 전에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께서 측근 간의 다툼으로 인하여 살해된 10. 26 사건을 그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번 되짚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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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박정희의 동향 후배이다. 박정희가 만주국과 일본의 육사를 각각 수석과 3등으로 졸업해 일제 식민지 하의 조선인이 출세할 수 있는 최대치를 가늠해 보고 있었던 반면에 말수 적은 음울한 청춘 김재규는 이인화의 소설 [인간의 길](쿨럭;)에 의하면, 일본제국주의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발악하며 시도하였던 자살 공격인 가미가제 특공대를 '양성'하였던 기관에 지망하였던 상태ㄷㄷㄷ

식민지 조선의 청소년이 아무런 희망과 보람도 없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학병으로 끌려가는 것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고, 박정희나 정일권처럼 일제 체제에 기생해서 출세하려는 자들이 나오는 것도 용서는 안 되지만 운명의 장난이나 인간의 심리상 그런 이상한 자들이 있을 수는 있다고 이해는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자진하여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원이 되고자 하였던 식민지 조선 청소년 김재규였다니 사실이라면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다행히 일제가 패망하는 바람에 소년 김재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김재규의 정신세계 속에 이런 일본 무사도(武士道)식 사생관(死生觀)이 깊이 침투해 있었던 징후는 그 후에도 나타난다. 특히나 10.26 거사(擧事)를 결행하기 전에 김재규가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에 심취해 있었다는 조갑제 기자(응?)의 기술 같은 것은 김재규의 사생관이나 10.26 거사에 이르기까지의 어떤 먼 원인 같은 것을 보여주는 느낌적 느낌이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고향 선산(善山) 후배로, 군대 후배로 챙겨주었다. 군대의 보직들뿐만 아니라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는 정부에서도 김재규는 동향 선배인 대통령 덕을 보아 그는 건설부장관까지 지냈다. (김재규가 건설부장관을 지낼 때 중동 산유국들의 건설프로젝트에 한국의 건설회사들과 그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중동붐이 일어나서 제1차 오일쇼크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35년여 전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있었던 측근 간의 다툼 끝에 대통령이 사망한 이 사건 후에 생존한 유일한 남자(여자들이 누구인지는 다들 아실 터이고, 쿨럭;) 김계원 당시 대통령비서실장과 김재규와의 인연도 기이하다. 1960년 당시 육군대학 총장 김계원은 교통사고로 사경에 빠진 부총장 김재규의 생명을 구했다고 한다. 만일 그 때 김재규가 죽었다면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박정희가 김재규를 동향/군대 후배로서 챙겨주기는 했으나 남한의 선후배 사이가 상당수 그러하듯이 박정희는 김재규를 (아무래도 편하다보니) 함부로 대하는 경향도 있었다고 한다. 암만 자신이 보살펴 줬더라도 김재규도 군과 정부의 공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크게 면박을 주거나 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이는 나름 일본의 무사도를 숭상하며 명예를 소중히 여기었던 김재규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그렇다고 해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후에 재판정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졌다고까지 보는 건 성급한 추측일 것 같다. 증언자의 박정희와의 관계(조카사위) 및 신뢰도를 감안해서 조심스레 들어야겠지만 김종필;도 10.26 전에 김재규가 자신을 찾아와서 '각하의 영구집권계획안'을 설명하고선 협박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김재규는 당시 미국 하원 프레이저 소위원회에서 박정희 정권을 격렬히 비난하는 폭로전을 벌인,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마지막 무기로 준비 중이던 회고록의 출간을 앞두고 이를 저지하려는 공작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35년 전 10월은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했지만 김형욱의 운명이 결정된(것으로 알려진) 달이기도 하다. 1960년대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은 동백림(東伯林)사건 등 조작의혹 있는 간첩사건들을 수사했고 무엇보다도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위한 정치공작에 앞장 서서 이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 및 여당 공화당에서 박정희가 재선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 후계자가 되리라 점쳐졌던 김종필을 지지하는 의원들에 대한 협박과 회유,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러나 김형욱은 3선 개헌안이 통과되고 나서, 공적(뭐래니?)을 인정받기는커녕 박정희에 의해 중앙정보부장 자리서 쫓겨났고, 이로 인해 그는 아마도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했다고 느끼고 박정희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품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김형욱은 그 후 당시 여당인 공화당 전국구 의원을 하다가 유신이 선포된 이후에 미국으로 사실상 망명하는 길을 고른다. 그리고 나서 김형욱은 남한의 대미(對美) 불법 로비 스캔들인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미국 연방하원의 프레이저 소위원회의 청문회에 출석해서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인권탄압에 대해 그 hit man으로서(쿨럭;) 생생히 증언한다.

김형욱은 자신을 버린 박정희에 대한 복수의 결정판으로 재미 언론인 김경재(응?)를 통하여 회고록 출간을 준비 중이었고, 박정희 독재에 대한 그 내부자의 생생한 폭로의 결정판이 될 김형욱 회고록 출간을 막기 위하여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동분서주한다. 그는 김형욱을 설득할 만한 군부와 정부 내 김형욱의 선후배들과 중앙정보부 인사들을 김형욱에게 보내어서 김형욱을 회유하려고 시도하였다. 김재규는 김형욱에게 직접 편지도 몇 차례 보내어서 귀국을 종용하기도 하였으며("김포공항 비행기 트랩을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시며 내려오시는 부장님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_-;) 회고록을 내지 않는 조건으로 김형욱에게 거액의 돈을 주기로 하는 협상이 양자 간에 진행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협상이 타결되었는지, 김형욱은 1979년 10월 어느 날 미국에서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나, 그는 파리의 호텔에서 '동양인 남자들'과 함께 나간 다음에 영구히 실종ㄷㄷㄷ되었다. 김형욱의 최후에 대해서는 그가 청와대 벙커로까지 끌려와 분노한 박정희에 의해 직접 총살되었다ㅜㅗㅜ는 억측이 카더라통신으로 유행하다가, 최근에는 파리 교외 양계장의 닭모이용 사료로 갈려졌다-_-;는 설이 꽤 지지(뭐래니?)를 얻는 편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건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에게 총을 겨눠 그를 죽인 김재규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박정희의 입김이 곳곳에 서린 보살핌을 받아가며 출세길을 달려 왔고 그 직전까지 박정희 독재를 유지하고 반대자를 제거하는 공작에 열심이었던 독재자의 진돗개, 아니 충견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런 김재규를 속된 말로 빡치게해 박정희를 살해하기에 이르게 한 원인은 잘 알려졌듯이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갈등이다.

4선 국회의원이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간다는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인사의 주인공인 차지철은 5.16 후 박종규(육영수 여사님 시해 당시의 대통령 경호실장)와 함께 박정희의 양 옆에서 찍은 사진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박정희를 일종의 부관으로서 계속해서 보좌해 온 또 한 명의 측근이다. 그는 박종규가 육 여사님 시해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다음에 경호실장이 되었고 '유신부통령'이라고까지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특히나 차지철은 자신의 사설 정보 기관까지 운용하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권한을 침해하고 야당 상대의 정치공작을 직접 벌이기까지 하여서 김재규와 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둘 사이의 충돌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는데 1979년 5월 30일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 전당대회가 대표적이다. 신민당에서 사쿠라 소리를 들어가며 어용(御用)야당 노릇을 한다는 비판을 받던 이철승의 당권에 선명야당의 기치를 든 김영삼이 도전했는데, 표결 전날에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 전(前) 대통령님께서 김영삼을 위하여 지지연설을 하러 오실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다고 한다(조세형 前 주일대사님의 회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날 가택연금이 느슨해져서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는 김영삼을 위해 지지연설을 하시며 이번 신민당 전당대회는 야당 내 친(親)유신 세력과 반(反)유신 세력 간의 대결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하여 주셔서 당시 전당대회장으로 총재선거 투표하러 나가는 야당 대의원들에게 사명감과 명분을 불러 일으켜주셨고 그 덕분인지(이기택이 김영삼의 손을 들어준 드라마도 있었음) 김영삼은 3표 차이로 이철승에게 승리하였다.

이 신민당 총재 선거가 중요했던 것이 이렇게 극적으로 당선된 김영삼이 반유신 기치를 들고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고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여성 노동자들이 경찰 진압 중에 사망하는 사건, 그리고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사대주의로 몰아붙여서 평생을 의회주의자로 산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당하는 초유의 사건 등이 연이어 벌어지고 이에 대한 반발로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과 마산에서 1979년 10월에 발생한 민중항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0.26 현장에서 차지철과 김재규의 말다툼 끝에 김재규가 차지철 및 박정희를 총으로 살해하게 되는;; 논쟁은 바로 이 부마(釜馬)민중항쟁 문제였다. 즉 김재규는 이 때 부마항쟁에서 대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까지 가담한 것을 현장에서 목격하고는 이는 민심이반임을 궁정동 만찬 현장에서 박정희에게 진언했으나, 차지철은 그 무렵 캄보디아 폴토트 공산정권의 학살처럼 그런 정치적 반대파들은 죽여 버려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 김재규의 주장이었고, 김재규는 논쟁 끝에 차지철과 그를 옹호하여 왔다고 믿은 박정희를 살해한다.

그런데 이런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 당선에 크게 기여한 앞의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김영삼 지지연설이 가능하게 된 것이 바로 차지철과 김재규의 알력으로 그 날(79년 5월 29일)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가택 연금이 느슨하게 풀려 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던 것이다(앞서 인용한 조세형 前 주일대사님의 회고).

10. 26에 관한 이야기는 그 외에도 차고 넘치나, 미국과 김재규의 관계에 대해서만 몇 자 더 적고 마무리하기로 하자. 김재규가 미국 CIA와의 교감 하에 박정희를 살해하였다는 주장은 10.26 직후부터 끈질기게 돌았고 심지어 CIA가 김재규를 빼돌려 김재규가 미국에서 골프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ㄷㄷㄷ는 어처구니 없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아 급기야 이런 유언비어를 잠재우려고 김재규가 교수형 당하는 사진들까지 공개되기에 이른다.

남한 내에서 미 CIA가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 베일을 어느 정도 벗겨준 것은 조갑제기자(쿨럭;)가 86년인가에 월간조선(쿠..쿠울럭;)에 쓴 "한국 내의 미CIA"란 기사이고 이로 인해 5공정권은 조갑제기자의 집필을 금지시켰었다. 조갑제 기자의 취재에 의하면 10. 26이 일어날 무렵의 한국 내 미국 CIA 책임자는 브루스터. 그는 자신의 카운터파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지속적으로 접촉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접촉이 일어나게 되면 서로의 생각이 어느 정도는 상대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남한의 가장 큰 우방인 미국이 당시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대해 불만을 품고 지속적으로 우려를 전달해 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특히 워터게이트 스캔들 후 도덕주의와 인권외교를 내세워 미국 대통령이 된 카터와 박정희의 불화는 유명했다. 미국의 관계자는 박정희 암살에 자신들이 개입하였다는 의혹에 대해선 강력히 부인하면서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고 인권탄압을 비판한 미국의 입장을 박정희에 반대했던 한국인들이 어떻게 해석하였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여운을 남겼다고 한다.

그나저나 35년여 전에 발생하여 이제는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건을 다시금 들추어 내서 혹시라도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뒤적거려 보는 이 심정이 딱히 유쾌하지는 않다. 모쪼록 최고 권력 주변의 잡음이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말끔히 정리되어 국정이 정상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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