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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7일 10시 42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2월 17일 14시 12분 KST

박정희 10월 유신 독재의 악몽

1972년 오늘(10월 17일)은 박정희가 유신 친위쿠데타를 감행한 날이다. 박정희는 그 전 해인 1971년에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하며 마지막 유세 때 "내가 여러분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박정희가 3선까지만 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해석했으나 박정희는 선거 자체를 없애는 기괴한 방식으로 그 약속을 지켰다.

유신쿠데타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가 1972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투표를 거쳐 대통령에 취임하고 있다.

1972년 오늘(10월 17일)은 박정희가 유신 친위쿠데타를 감행한 날이다. 42년 전 오늘 요새처럼 국정감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든 유신 '헌법'에서는 국정감사가 폐지되었고, 이는 6월 항쟁으로 쟁취한 87년 헌법(현행헌법)에서 부활돼 16년만인 88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이런 사연에 비추어 보면 국정감사가 낭비라든지 국정감사에 불려가느라 공무원들이 "업무를 못한다"는 주장들을 펼치는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박정희는 그 해(1972년) 7월 4일 남북이 함께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조성된 남북화해 무드를 타고 통일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유신쿠데타를 정당화하였으나 실은 박정희와 김일성 모두 자신들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를 이용했을 뿐이다. 즉 박정희는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그의 거수기격인 조직을 만들어서 여기서 대통령을 찬반투표로 '선출'하게 바꿨으니 뒤에 최규하/전두환 때까지 이어진 악명 높은 '체육관 선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이 체육관 선거로 두 차례에 걸쳐서 압도적으로 '당선'됐지만 우리나라 내부나 국제사회에선 도대체 남한이 공산 독재국가 북한과 이제 다른 게 뭔지에 대해 점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그 전 해인 1971년에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하며 마지막 유세 때 "내가 여러분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박정희가 3선까지만 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해석했으나 박정희는 선거 자체를 없애는 기괴한 방식을 그 약속을 지켰다. 위 선거시에 박정희가 총통제를 하리라고 예측했던, 경쟁자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는 1972년 유신선포 당시에 외국에 계시다가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독재,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였다. 박정희는 국정원-_-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납치하여 살해하려다가 실패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서울로 강제로 끌고 온 다음에 자택에 연금시켰다.

박정희는 유신 선포를 통해서 국회도 무력화시켰는데, 그는 전체 국회의원의 3분지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게 하였고, 그렇게 선출될 국회의원의 명단은 박정희가 직접 고르고(쿨럭;)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역시 그 명단에 대해서 오로지 찬반투표만 할 수 있게 만들었다(누가 감히 반대를; 했겠는가!). 그렇게 해서 사실상 임명된 국회의원들은 유신정우회라는 것을 구성했고, 지역구에서는 1구 2인제를 도입해서 2등까지 당선되는 구조를 만들어 내니 여당 의원들이 국회의원 전체 숫자의 거의 3분지 2 가깝게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야당이라면 가능한 방법은 각 지역구에 2인의 후보를 내서 모두 야당을 찍어 달라고 호소한 다음에 헌법 개정을 노려보는 것이겠으나 당시의 제1야당인 신민당은 어처구니 없게도 그냥 한 지역구에서 한 명만 후보를 내서 박정희 독재 체제 하에서의 제1야당에 만족;한다.

박정희는 유신쿠데타를 하며 긴급조치라는 것을 도입해 자신에 반대하는 노동자, 학생, 지식인, 종교인 등을 사실상 고문하고 감금하고 때려잡아 넣을 수 있는 수단;을 확보했으니 9호까지 발효된 긴급조치를 통해서 독재정권에 대항한 용기있는 이들이 탄압받았다.

박정희가 자신의 독재 체제에 붙인 유신이라는 명칭도 참 어처구니가 없는데 박종홍 같은 이는 유신을 미화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으나-_-; 그게 일본의 명치유신과 소화유신;에서 나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특히나 일본 괴뢰 만주국 육사를 수석졸업하고 그 특전으로 일본 육사로 편입해 3등 졸업했다는 박정희이기에 정우회와 민정당의 썩어빠진 '정치'를 뜯어 고치고 천황을 모시는 청렴결백한(우웩-) 군인들이 효율적 '행정'을 하자는 소화유신의 그림자가 박정희의 10월 유신 쿠데타에 어려있었음.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보였던 박정희의 10월 유신 독재는 7년만인 1979년 10월 26일 다행히 박정희의 측근인 중정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으로 살해해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