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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23일 15시 38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9월 22일 14시 12분 KST

단일화고(考)

이번 동작을의 단일화 논의를 보면서 2002년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때부터 여론조사 단일화가 정말 패턴이 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좀 황당하기는 하다. 거죽으로라도 누구와 누구는 이런 이런 점에 공약상의 공통점이 있고 단일화 후보가 당선되면 양보한 쪽에서도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의정이든 공동으로 참여하게 하겠다고 하는 그런 방식을 취할 흉내도 못내나? 걍 대뜸 여론조사 돌려보고 앞서는 쪽이 단일후보가 된다면 탈락한 후보 지지하던 유권자들은 목동이 끌고 가는 양떼처럼 우루루 단일후보를 쫓아가서 찍어야 한다고?

연합뉴스

이번 7월 30일 재보궐 선거에서 동작을에서의 단일화 합의가 불발되었다는 속보가 들어 온 것을 핑계로 2007년 대선 전에 예전 대통령 선거들에서의 단일화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끄적여 보았던 글을 (동작을 단일화 관련 내용을 조금 보태어) 손질하여 재탕하여 보았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야당 후보 단일화는 이승만의 삼선(三選)을 저지해야 하는 국민들의 열망이 그렇게도 뜨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실질적으로 야당 후보가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달성되지 못했다. 선거 기간 중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不信)을 가지고 있던 민주당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조봉암 후보는 자신의 러닝 메이트인 박기출 후보를 사퇴시키기까지 하였으나 민주당은 자신들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을 찍고 대통령 후보로는 이미 돌아 가신 신익희에게 추모표를 던지라고 운동한다. 즉 이승만 정권이 계속되어도 좋으니 조봉암 대통령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_-;; 이는 삼년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한 조봉암 선생의 사형(死刑)을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방관, 묵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

1963년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에 의하여 임명되긴 했지만 4.19 직후의 과도정부 수반을 지내면서 민주정부로의 이행을 잘 마무리했던 허정 후보가 (후일 최규하/신현확 체제가 유사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집권을 꾀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 윤보선 후보의 당선을 위해서 중간에 사퇴하여 군정(軍政)에 반대하는 민간 정치인들의 단일화를 이루어 낸다(허정 후보 같은 희생을 한 이는 남한 대선의 역사에서는 2012년 대선의 안철수 후보 정도가 있을 뿐이지 않나 싶다).

이어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는 15만표 차이로 석패(憤敗)하는데 단일화가 이루어지더라도 특히 관권(官權)의 개입이 있어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 예라고 하겠다. 소설가 이병주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소설 [그해 5월]에서 낙수(落穗) 45만표라고 하여 여당이 프리미엄으로 가져갈 수 있는 표수가 그 정도는 된다고 하셨었으니 그렇게 치면 야권이 이겼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실은 윤보선 후보의 "정신적 대통령" 주장이 거기서 나온 것이지만 (그러고 보면 2000년 상국(上國) 대선의 알 고어보다 앞섰다고도...) 쿠데타 세력과의 사전 모의설(事前 謀議說)에 쿠데타 이후 약 1년간이나 대통령을 지내신 분인지라-_-;; 그런 주장이 좀 빛이 바래는 감이 있기는 하다.

1971년의 대통령 선거는 다들 양자대결로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제1야당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 후보 입장에서는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다. 비록 양복 안주머니에 밤잠을 설쳐 가며 교정(校訂)을 보았을 (솔직히 제대로 보았을지는 의문이지만, 쿨럭;) 후보 수락 연설문을 그대로 넣어 둔 채ㅋㅋ로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김대중 후보를 지원하겠다"고 김영삼이 제법 감동적인 경선승복 연설을 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도와 주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세 명의 40대에게 떨려 나가 당수직을 유지하면서도 후보가 되지 못한 총재 유진산은 말할 것도 없었을 터이구. 이는 대선 후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신민당의 추악한 내홍(內訌)으로 이어진다.

1987년 대통령 선거의 단일화 실패야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16년만의 대통령 직선제였고, 그 해 6월 항쟁에서의 전국민의 염원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도 헛되이 "두 김가(金哥)"(개표 다음 날 고교 때 선생님 표현인데 그 당시 심정으론 이런 얘기 들어도 싸다고 생각함)는 해괴한 논리로 각자 출마하여 노태우의 당선을 가져 온다. 김영삼이 단일화 전에 "마음을 비웠다"는 게 실은 머리를 비웠다는 뜻이라는 것이 확실해지는데는 (외환위기가 닥쳐오는 1997년까지) 10년이 걸렸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도 1986년인가에 하셨던 대통령 불출마선언을 29만원이 자진해서 직선제로 간 것이 아니라 국민이 강제한 것이기 때문에 안 지켜도 된다는 얘기를 들을 당시에는 참으로 기가 막혔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DJP 연합이나 피닉제(응?) 이인제님의 그 분 이름을 딴 법까지 나오게 만든 경선(競選) 불복사례야 다들 잘 아시는 일이실 터이고, 막판에 정몽준님과 노무현 대통령님 간의 단일화가 없었던 일로 되어 버린 황당한 일이 일어났던 2002년에 대해서야 다들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계실 것으로 보여서 더 이상 덧붙이지는 않겠다.

다만, 이번 동작을의 단일화 논의를 보면서 2002년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때부터 여론조사 단일화가 정말 패턴이 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좀 황당하기는 하다. (아무도 관심없겠지만) 난 그 때 도저히 공약과 이념에서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여론조사에서 누가 더 앞선다는 걸 확인해 단일화한다는 게 참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단일화를 하면 각각의 후보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단일화된 후보를 따라가서 표를 줄 거라는 자신감도 황당했었고. 결국 그 단일화는 막판에 정몽준님이 노무현 대통령님 지지를 철회;하는 바람에 우습게 되었지만.

그런데 그 때 다들 "재미 좀 보셨는지" 요새는 아예 단일화시에는 여론조사를 돌리는 게 패턴이 된 것이 입맛이 쓰다. 거죽으로라도 누구와 누구는 이런 이런 점에 공약상의 공통점이 있고 단일화 후보가 당선되면 양보한 쪽에서도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의정이든 공동으로 참여하게 하겠다고 하는 그런 방식을 취할 흉내도 못내나? 걍 대뜸 여론조사 돌려보고 앞서는 쪽이 단일후보가 된다면 탈락한 후보 지지하던 유권자들은 목동이 끌고 가는 양떼처럼 우루루 단일후보를 쫓아가서 찍어야 한다고? 이건 뭐 재미도 감동도 명분도 없다는 생각이다. 솔직히 이따위로 정치(풉)를 하면서 표를 달라고 구걸하고 이런 정치인들 꼴보기 싫다고 하는 유권자들한테 정치혐오니 하는 딱지나 함부로 붙이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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