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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02일 07시 18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02일 14시 12분 KST

대중의 프레임이 상품의 운명을 결정한다

한겨레

대중의 프레임이 상품의 운명을 결정한다 - 라면업계 흥망성쇠로 본 대중 심리와 마케팅 전략

2011년 4월 농심이 창립 25주년을 맞아 '신라면 블랙'을 출시했다. 명품업계에서 '블랙 라벨'이 그렇듯 프리미엄 급임을 강조한 제품이었다. 소뼈 달인 국물과 고급 밀가루를 사용한 면이 차별화 포인트였다. 가격은 보통 신라면의 두 배가 약간 넘는 가격인 1천3백20원. 이 제품은 출시 직후부터 네티즌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기존 제품과 맛과 원료 차이가 크지 않은 데 가격은 지나치게 비싸다는 비난이었다. 언론도 가격 논란에 합세했다. 신라면 블랙은 라면업계 절대 강자 농심이 실패한 몇 안 되는 신상품으로 기록됐다.

2015년 10월 라면업계 2위 업체인 오뚜기가 '진짬뽕'을 내놓았다. 이 해 여름부터 시작된 중화풍 라면의 열기를 이어가기 위한 신제품이었다. 짬뽕라면은 이 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제품은 더 굵은 면발과 진한 국물, 풍부한 건더기로 차별화 했다. 이 제품은 출시 후 석 달만에 4천만개가 팔릴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일부 대형마트 매장에서는 오랫동안 부동의 1위였던 농심 신라면을 제쳤다는 집계가 나올 정도다. 진짬뽕의 가격은 1천5백원. 일반적인 라면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 가격임은 물론 신라면 블랙 출시가보다도 비싸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가격 논란이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두 신제품을 바라보는 소비자의 프레임(frame·사고의 틀)이 다른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라면 블랙은 일반 라면에 비해 '비싼 라면'이었다. 국물과 면을 달리 했다고는 하나 표면적으로 다른 점을 확인하기 쉽지 않았다. 맛의 차이도 미세한 데 그쳤다. 반면 진짬뽕은 기존 라면과는 아예 '다른 라면'이었다. 실제로 이 라면을 위시한 짬뽕과 짜장 라면 봉지에는 라면이라는 문구가 대부분 없다. 이 프레임 하에서 짬뽕 라면 가격의 비교 기준은 보통 라면이 아니라 실제 짬뽕이었다. 중화풍 라면은 대개 5천원대인 진짜 짬뽕이나 짜장면에 비해서는 싸다.

2010년 하얀 국물 라면과 2016년 중화품 라면 열풍의 차이는?

라면시장에서는 2010년에도 한 차례 파란이 인 적이 있다.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이경규가 닭 육수를 주조로 한 라면 제조법을 선보였다. 이는 후에 한국야쿠르트에서 '팔도 꼬꼬면'이란 신제품으로 출시됐다. 그 후 각 라면 제조사가 하얀 국물 라면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당시 삼양라면의 나가사끼 짬뽕도 한때 신라면 매출을 앞지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열풍은 1년이 채 가지 않았다. 하얀 국물 라면은 유행(fashion)이라기보다는 일시 유행(fad)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화풍 라면 열풍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갈 가능성이 커졌다. 두 유행 주기의 차이는 과연 무엇에서 기인한 것일까?

이것 역시 프레임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닭고기 육수를 기본으로 한 하얀 국물 라면은 전통적 라면과는 달랐다. 그 범주에 들려면, 소고기 맛을 주조로 갖은 양념을 더한 빨간 국물이어야 했다. 1963년 삼양라면이 국내에서 처음 인스턴트 라면을 내놓았을 때부터 그랬다. 심지어 고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얼큰한 국물을 선택하도록 지시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마저 돌았다.

소비자들은 낯선 상품에 호기심을 느끼고 한두 번 구입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맛에 인이 박인 상품처럼 지속적으로 소비하지는 않는다. 재미 삼아 사보는 데 그친다. 새 프레임을 내건 상품은 그 속성이 웬만큼 강렬하지 않으면 소비자의 익숙한 취향을 단기에 완전히 바꾸기 어렵다. 하얀 국물 라면은 라면과 빨간 국물 라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게 보면 소비자들에게 하얀 국물 라면은 오랫동안 좋아해온 라면은 아니었다. 반면 무슬림이 대다수인 서남아시아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라면이라고 하면 으레 닭고기 육수를 주조로 한 하얀 국물을 떠올린다.

대중의 프레임이 상품의 운명을 결정한 예는 라면업계나 제조업을 넘어선다. 국내 주요 유통업체의 흥망성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찌감치 한국에 진출했던 월마트와 까르푸는 2000년대 중반 철수해야 했다. 미국과 유럽의 세계 양대 대형 마트가 국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을 두고 현지화(localization)에 실패했다는 지적이 많다. 그들이 적응하지 못한 것은 입지나 구색만은 아니었다. 국내 소비자의 프레임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소비자들은 대형 유통업체에 대해 백화점식(급) 서비스를 원한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붙잡고 물어보고, 상품을 찾지 못할 때는 대신 골라줄 수 있는 직원이 매장 곳곳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소비자가 대형 유통업체에 기대하는 바다. 이는 가능한 직원을 줄여 비용을 낮춘다는 월마트나 까르푸 같은 창고형 할인매장의 개념과 상충한다.

한국 다이소는 19년 전 일본의 1백엔 숍에 영감을 얻어 창업했다. 별개 기업이지만 일본 다이소에 납품한 인연으로, 이 회사는 여전히 국내에서 불황형 점포인 1천원 숍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회사가 매출 1조원을 돌파한 것은 단순히 장기화 된 불황 덕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저가 상품을 주로 취급하되, 상품 구색을 획기적으로 늘린 데 있다. 오늘날은 거의 모든 생활필수품과 상당수 소비재를 취급하고 있다. 1천원 안팎의 소품을 사러간 소비자들에게 중저가 스마트폰을 판매하는 것을 보는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월마트나 까르푸가 한국 소비자의 프레임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다이소는 프레임을 깨는 전략으로 성공을 거듭하고 있다.

정치 소비자가 보는 대선주자 3인의 프레임과 전략

유권자라는 정치 소비자 역시 프레임을 통해 정치인을 본다. 그들의 사고 틀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선거 전략의 핵심이다. 이는 소수 업체가 독과점한 포화상태 시장에서 신제품으로 히트를 치는 것처럼 녹록치 않은 일이다. 신규진입 업체가 내놓은 신제품은 소비자에게 깊숙이 뿌리 내린 기존 제품의 특성을 넘어서기 어렵다. 기존 업체가 내놓은 신제품은 포장만 바꾸고 가격을 올리려 한다는 의혹을 벗기가 쉽지 않다. 유력 대선 후보나 여야 사이의 경쟁과 대립 역시 마찬가지다.

프레임 전쟁의 좋은 예인 라면시장에서, 현재까지 대선 후보들이 보여주는 프레임과 전략의 예를 찾아보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신라면 블랙'이다. 유력 대선 후보면서도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바로 '박의 후예'라는 틀이다. 이를 벗어나자면 많은 소비자를 잃어야 하는 위험 부담이 따른다. 당분간은 옛 프레임과 새 것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더블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삼양라면'이다. '친노'라는 옛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비난받으며 제조사나 소비자로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를 돌파할 목적으로 대표직을 버리고 백의종군 모드로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아직 새 프레임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오랜 향수에 기댄 일부 소비자층이 핵심 지지자들이다.

반면 국민의 당 안철수 의원은 '꼬꼬면'이다. 그는 여야와 보수·진보 진영을 넘어서는 제 3세력이라는 기반을 겨냥해 '새 정치'라는 프레임을 제시했다. 하지만 새 프레임에 부합하는 행보를 아직까지는 보여주지 못했다. 탈당과 인재 영입 과정, 지역 기반 등에서 낡은 정치를 답습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호기심을 느꼈던 소비자들마저 막 그가 정치 무대에 섰을 때처럼 환호하지는 않는다. 빨간 국물을 넘어설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한 하얀 국물 라면의 운명이다.

어떻게 보면 정치라는 오래된 성숙 시장(mature market)에서도 지난 20년 라면시장에서 거듭된 프레임 전쟁이 재연될지 모른다. 그 결과에 따라 이번 총선과 다음 대선의 성패가 판가름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