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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2일 11시 58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12일 14시 12분 KST

[괴짜 부자를 찾아 떠난 여행] 1.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한 억만장자 닉 하나우어

우리 국민들에게 미국 시애틀은 영화와 드라마로 유명한 곳이다. 1993년 개봉한 불멸의 로맨틱 코미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나 2005년 시작된 최강의 막장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가 대표적이다. 이 도시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들르는 곳으로 이 영화와 드라마 관련 장소 외에 한 곳이 더 있다. 국내에서 인기 있는 스타벅스 1호점이 바로 이 여기 있다.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여기서 기념품 잔을 사곤 한다.

수박 겉핥기식 관광이 아니라면, 정보통신(IT) 대표 기업들이 즐비한 이 도시의 전통을 곧바로 실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곳에는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미 서부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실리콘밸리의 창의적인 감각이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 부호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신흥 부자들이 이 도시에 몰려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집과 회사 모두 이 곳에 둥지를 튼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는 어느 모로 보더라도 시애틀의 산물이다. 혼자 힘으로 부동의 미국 부호 1위에 올랐지만 그는 여러 면에서 옛 부자들과 다른 행보를 보인다. 회사에서 손을 뗀 후에는 투자 대가 워렌 버핏과 함께 대안을 제시하는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다. 생전에 자신이 번 돈 90% 이상을 사회에 내놓겠다는 공약도 지켜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통 부호들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부자 감세와 규제 완화를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지 않는다. 대신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고 법인세 증세에 찬성한다. 그래야 공정한 경쟁과 불평등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그는 단순히 자선사업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사회주의 억만장자(socialist billionaire)라는 비아냥도 듣는다.

빌 게이츠뿐만이 아니다. 시애틀에는 1세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자수성가형 부자들이 손을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최근 이 도시는 미국 최초로 2017년까지 시간당 최저 임금을 15달러(약 1만7천원)까지 올리기로 한 결정으로 주목을 끌었다. 이 결정은 비교적 진보적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뉴욕에도 상륙하기 직전이다. 이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노동단체와 시민단체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시애틀의 억만장자들이 앞장서서 최저 임금 인상안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닉 하나우어다. 그는 4대째 물려받은 가문의 사업이 있기는 하지만 IT 투자로 스스로 돈을 번 벤처캐피탈리스트다. 마이크로소프트에 간여한 적도 있고, 아마존에는 창업주 제프 베조스 가족 외의 최초 투자자였다. 스스로 1년 수입이 적게는 1천만달러(약 1백15억원)에서 3천만달러에 달한다고 밝히는 이이기도 하다. 신흥부호답게 대저택과 자가용 비행기, 요트 같은 재산을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는다. 그런 그가 시애틀의 최저임금 인상안을 주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중산층 이하 계층을 돕는 것이 어떻게 부자도 돕고 자본주의를 살리는 길인지를 역설하는 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뉴욕타임스>로부터 '저항적 억만장자(billionaire heading to barricade)라는 평을 들었다.

nick hanauer

"지난 30년간의 보수 혁명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로 이어지는 이 시기만큼 국내 부자들이 세간의 도마에 올랐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땅콩회항 사건과 승계를 둘러싼 롯데와 삼성가의 분쟁과 무리수는 말할 것도 없고, 중견·중소 기업가들의 해외 원정도박까지 숨 쉴 틈 없이 부자들의 추문이 이어졌다. <베테랑>이라는 영화의 천만 흥행은 재벌 2세의 악행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답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던 차에 한 방송사의 도움으로 닉 하나우어를 직접 만나 대담을 나눌 기회를 얻었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달 말 시애틀항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그의 사무실에서였다. 그는 타이를 매지 않은 편안한 차림으로 맞아주었다. 공부하는 기업가답게 그의 사무실에는 서적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그 책들 사이로 요즘 배우고 있다는 기타 한 대가 눈에 뛸 뿐이었다.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기업가가 최저 임금 인상을 포함해 중산층과 서민의 소득 증대에 신경 쓰는가?

자신을 기업가 겸 시민운동가라고 소개한 그는 더욱 직설적이었다. "그들이 더 많이 버는 것이 제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소득이 늘면 제 회사나 제가 투자한 회사가 만드는 제품을 하나라도 더 소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조차 없습니다. 최상위 1%의 소득이 더 는다고 이미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그들이 더 쓰지는 않습니다." 그는 2013년부터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서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중산층과 서민이 체제 전복적인 움직임에 나서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에 '중산층 구출'(middle-out) 정책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그가 중산층 이하 계층의 소득 증대를 외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30년간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실험된 보수 혁명이 실패했다는 진단에 따른 것이다. 이 주장의 핵심은 낙수(trickle-down) 효과라는 것이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면 이들이 일자리를 더 만들어 중산층 이하에게 그 혜택이 고스란히 돌아온다는 논리였다. 그 주장이나 논리대로라면 지금쯤 미국에는 일자리가 차고 넘쳤어야 했다.

하지만 낙수효과는 없었다. 그 기간 동안 1% 혹은 10%의 상위 계층이 더 부자가 됐을 뿐이다. 그 결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불평등은 더욱 가속화되기만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 정점이었다. 그렇다면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 이하를 더 부자로 만드는 정책을 실험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나우어의 주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어져온 월가점령운동이나 토마 피케티의 책,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 당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히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분교 교수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이것이 하나의 경제 사조나, 이 주장이 배경이 된 정치적 흐름으로 이어질지는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신흥 부자들 사이에서도 자본주의의 지속적 발전은 물론 끊임없는 부의 재창출을 위해, 소득이 늘지 않는 불평등한 체제의 피해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우리 사회, 특히 재벌 일가와 그들의 전위부대 어디에서 이 비슷한 이야기라도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누리는 모든 것을 당연시 한다. 그 혜택이 대대손손 이어지리라고 확신한다. 그 결과 재벌 2, 3세는 한국 사회의 법과 제도, 심지어 상식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분위기는 재벌가의 2, 3세에 대한 자녀교육 실패에도 기인하지만, 결국 우리 사회가 유한양행 창업주 고 유일한 이후 좋은 기업가나 자본가의 예를 제시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다. 시애틀 창공에서 떠오른 것은 영화나 드라마, 스타벅스 머그(mug)가 아니라 우리 재벌과 경제의 결코 밝지 않은 미래여서 귀국길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참고로, 닉 하나우어를 포함해 한국에 없는 특별한 부자들과의 대담은 교육방송(EBS)를 통해 다음 달 방영된다.

* 이 글은 데일리한국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