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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선

부산 사는 주부. 두 손자 손녀의 할머니

부산 사는 주부. 두 손자 손녀의 할머니
모험가 고양이의

모험가 고양이의 가출

어느 날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더니 물 반 그릇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나는 얘가 어떤 모험을 겪고 왔는지 너무 궁금해서, 티거가 물을 다 마신 뒤 "이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나?"라며 긴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은 베란다에 나갔다가 몇 집 건너 있는 한옥 지붕을 천천히 타고 올라가는 티거를 보았다. "티거야!" 불렀더니 녀석은 나를 쓱 돌아보고는 보란 듯이 지붕 꼭대기를 훌쩍 뛰어넘어 사라져버렸다. 왜인지 나는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밥과 물과 따뜻한 잠자리가 있는 집을 두고 모험을 찾아 유유히 기와지붕 너머 파란 하늘 쪽으로 사라지던 티거의 모습. 거기엔 경쾌한 박력 같은 게 있었다. 티거는 행복해 보였다.
2017년 09월 22일 13시 41분 KST
이상한 책, 이상한 잡지, 이상한

이상한 책, 이상한 잡지, 이상한 사람

나는 이 멋스런 고집불통 사내가 정말로 고맙다. 정교한 만듦새와 아름다운 디자인에 기꺼이 가치를 지불하는 사람이었던 게 고맙다. 아름다운 우리 것을 잘 알아보고 그것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전하려 했던 그 태도가 고맙다. "때론 돈을 낙엽처럼 불태울 줄도 알아야 한다."던 그가 모아놓은 6500점의 유물이 고맙다. 그가 쓴 맛깔나는 문장들이 고맙고, 그가 남긴 잡지들이 고맙고, 그가 세상에 둘도 없는 멋쟁이였던 게 고맙다.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 남자가 〈뿌리깊은 나무〉 출판사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볼 때가 있다. 시간을 머금은 보드라운 질감의 토기를 들고 찬찬히 들여다 보다 한두 번쯤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손목엔 파텍 필립을 차고 말이다.
2017년 06월 02일 10시 43분 KST
라면과 개똥과

라면과 개똥과 기품

이십대쯤의 청년이었다. 우리가 앉은 근처에서 한 강아지가 쉬를 했다. 그 청년은 저 끝에서부터 순식간에 다가오더니 스폰지 밀대로 일단 그것을 훔쳤다. 그런 뒤 무릎을 굽히고 노련한 보안관처럼 등 뒤에 꽂힌 두 가지 스프레이 중 하나를 뽑아 칙칙, 뿌린 후 허리춤에 꽂힌 두루마리 휴지를 뽑아 긴 팔로 들어올렸다.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휴지봉에 꽂고 왼손으로는 휴지 끝을 잡더니 허공에서 휘휘 돌려 풀려나오는 것을 유려하게 감아 쥐고 바닥을 닦았다. 무슨 리본 체조 같았다. 연속 동작으로 등 뒤에서 다른 소취제를 뽑아 칙칙, 뿌린 후 정확히 같은 리본 체조를 반복하더니 사뿐히 일어나 가버렸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났던지!
2017년 02월 20일 11시 18분 KST
보답은

보답은 릴레이로

"세상에, 넌 정말 친절하구나."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하나. 나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아왔어. 이제 내가 너에게 그 친절을 돌려주는 거야. 그러니 하나, 너도 여행을 하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네가 받은 친절을 그 사람에게 돌려줘." 우리는 포옹하고 헤어졌다. 나는 공항 환전소에서 극적으로 여권을 되찾았고 그날 밤 늦게 숙소로 되돌아갔지만 두 번 다시 그 청년을 보지 못했다.
2017년 02월 10일 08시 28분 KST
나의 국어 경찰

나의 국어 경찰 아버지

아버지의 국어 경찰 활동은 집안뿐 아니라 대외 순찰로도 이어졌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공고문에서 '반듯이'와 '닥아 내어'에 줄을 긋고 '반드시' '닦아 내어'라고 고쳐놓은 사람은 보나마나 우리 아버지였다. 온 가족이 외식을 하러 갔던 날, 잘 가던 횟집 문 앞에 버티고 선 아버지는 들어갈 생각을 안 했다. 대신 사장님더러 밖으로 좀 나와보라고 불러냈다. 새로 바꾼 발 매트에 적힌 말이 문제였다. "어서 오십시'요'가 아이고요, 어서 오십시'오'가 맞습니더, '오'." 아버지는 피카소가 손전등으로 소를 그리듯 허공에 커다랗게 '오'라고 적어 보였다.
2016년 10월 09일 06시 06분 KST
충고하지 말라는

충고하지 말라는 충고

얘기 끝에 그분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부는 삼십년 넘게 같이 살면서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 했습니더. 비결이 뭔지 압니꺼?" 내가 물음표를 담은 눈으로 쳐다보자 그분은 특유의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충고를 안 해야 돼. 입이 근질근질해 죽겠어도, 충고를 안 해야 되는 거라예. 그런데 살다가 아, 이거는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꼭 한 번은 얘기를 해줘야 되겠다... 싶을 때도, 충고를 안 해야 돼요."
2016년 07월 21일 09시 42분 KST
WOMEN NOT

WOMEN NOT OBJECTS

그녀들은 달리기 위해 달린다. 달리는 동안의 즐거움, 한계를 너머 조금씩 더 나아가는 뿌듯함, 몸을 움직여 정직하게 땀 흘린 뒤의 상쾌함 등등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고 개인적인 성취감을 얻는 것이다. 그로 인해 살이 빠질 수도 있고 건강해질 수도 있지만 부차적인 거고, 그게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건 스스로를 위해서다. 여자들은 남심을 저격하려고 달리는 게 아니다. 남자들이 여심을 저격하려고 달리는 게 아닌 것과 똑같다. 그런데 남성이 달릴 때는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는 반면 여성의 달리기는 남자들이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행위가 되어버린다. 이 뻔하고 지겨운 주객전도라니.
2016년 07월 07일 08시 05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32 | 안과

아이디어 사칙연산 32 | 안과 겉

내 친구 부부는 아내가 회사에 나가서 돈을 벌고, 남편은 공부를 하면서 집안일을 돌본다. 그래서 아내를 바깥사람이라 부르고 남편을 안사람이라 부른다. 하하, 이거 재미있다. 안사람 바깥사람이라는 말은 옛날에 남자가 밖에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는 등의 일을 하고 아내는 안에서 밥을 짓고 아이들을 키우던 때의 전통적 성역할에서부터 비롯한 말이다. 그것이 점점 부부의 성별을 칭하는 말처럼 변해 왔다. 하지만 전통적 성역할에 따라 살지 않는 요즘 사람들에게 안사람과 바깥사람의 구분은 뒤바뀔 수 있다. 안과 밖을 성별로 못박아 두는 기존의 관념에서 풀려나면 생각은 훨씬 유동적이 된다.
2016년 06월 24일 12시 55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31 | 뒤집기

아이디어 사칙연산 31 | 뒤집기 한판

작년 연말 노홍철은 음주운전으로 인해 <무한도전>에서 하차했다. 분명 위기상황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 자리를 채울 새로운 멤버를 구하는 것 자체를 특집으로 만들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영화 <킹스맨>을 패러디한 <식스맨> 특집은 새 멤버 후보들의 섭외부터 면접, 그리고 최종 선정까지를 쇼로 만들어 웃음을 준다. 멤버가 불미스런 일로 하차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인데도 무슨 큰 잔치 같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들 한다. 그 말을 주워섬기기보단 이처럼 위기를 기회로 뒤집어 보인 멋진 실제 사례들을 발견하는 편이 더 와닿는다. 악재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왕 악재가 생겼다면 그것을 어떻게 뒤집어 놓을지를 연구해 보자. 쇼는 계속되어야 하니까!
2015년 04월 04일 08시 52분 KST
내가 정말 좋아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에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농담이 나온다. 품바가 생각한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진실이다. 그런데 티몬의 이야기도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만은 없다. 티몬의 이야기는 품바의 것과는 다른 층위에서 어떤 문학적 진실 같은 것을 품고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검푸른 융단 같은 것에 반딧불이들이 끼여서 빛을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피어오른다. 만약에 반딧불이들이 거기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반딧불이들이 거기서 새끼를 낳는다면 밤은 점점 더 밝아져서 언젠가는 낮처럼 환해지는 걸까?
2015년 04월 01일 12시 34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30 | 무대응의

아이디어 사칙연산 30 | 무대응의 기술

작년 이맘때 출판계에선 논란에 불이 붙었다. 한 출판사에서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새로 번역해 내놓으며 이전의 번역은 오역 투성이였고, 우리는 25년간 이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해왔다고 도발한 것이다. 그러면서 까뮈 번역에 있어 최고 권위자인 김화영 선생을 공격했다. 필요하다면 당연히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출판사의 행태는 여러 모로 무례했고 많은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시끌시끌한 와중에 공격의 대상이었던 김화영 선생은, 참 불쾌하고 때론 억울했을 법도 한데, 끝까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불쾌함과 억울함을 드러내기라도 했다면 노이즈에 기름을 붓는 격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2015년 03월 02일 11시 47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29 | 별일 없이

아이디어 사칙연산 29 | 별일 없이 산다

A. A. 밀른의 동화 <위니 더 푸>에는 곰돌이 푸와 그 친구들ㅡ피글렛, 래빗, 크리스토퍼 로빈 등ㅡ이 즐기는 푸스틱 Poohsticks 놀이라는 게 나온다. 다리 위에서 동시에 나뭇가지를 떨어뜨린 뒤 다리의 반대편으로 가만히 내다보다가 강물을 따라 가장 먼저 흘러내려오는 나뭇가지의 주인이 이기는, 썰렁한 놀이다. 가끔은 강물이 너무 느리게 흘러 다리 난간에 붙어 서서 한참을 멍하니 내려다 봐야 하기도 한다. 참 별일 없는 풍경이다. <위니 더 푸>의 평화롭고 별일 없는 세상을 사랑하는 영국사람들은 1984년 이후로 템스강에서 매년 <월드 푸스틱 챔피언십>을 개최하고, 우승자도 공식적으로 기록해 둔다.
2015년 02월 13일 06시 17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28 |

아이디어 사칙연산 28 | 제거하기

얼마 전 달력 선물을 받았다. 슬로워크Slowalk라는 디자인회사에서 만든 이 달력의 첫 장에는 "기억하라 그리고 살아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365일 중 단 하루, 4월 16일만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15와 17 사이, 비어있는 곳을 보는 순간 무언가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은 강조를 하기 위해 어떤 장치를 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라진 16만큼 강렬한 환기는 없을 것 같다. 4월 16일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 넣는다.
2015년 01월 29일 04시 33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

아이디어 사칙연산 | 이식하기

일본에 이식되는 것들은 곧바로 일본화 된다. 일본식 까르보나라, 명란 파스타 등등이 그렇고 위스키에 물을 많이 부어 마시는 미즈와리도 그렇고 브라질의 보사노바도 일본에 건너가면 일본식 보사노바로 꽃핀다. 반대로 브라질 사람이라면 부자든 걸인이든 한 켤레씩은 갖고 있다는 국민 쪼리 '하바이아나스'는 발가락을 끼워 신는 일본의 신발 '게다'가 브라질로 이식된 결과물이다. 브라질 게다인 하바이아나스는 브라질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어,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여름이면 불티나게 팔린다.
2015년 01월 20일 06시 10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

아이디어 사칙연산 | 취하라

작년에 개봉한 영화 <비긴 어게인>의 첫 장면에서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는 술집에서 친구에게 떠밀려 무대에 나가 혼자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다른 손님들은 그녀의 노래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잡담을 한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그날 자신의 음반회사에서 쫓겨난 음반 제작자인 댄(마크 러팔로)만이 넋이 나간 듯 노래를 듣고 있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그레타의 소박한 기타 반주에 어울릴 드럼, 피아노, 첼로를 환상 속에 그리며 함께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말한다. 그런 건 취해야만 들린다고.
2015년 01월 14일 10시 29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 결국, 실패는 정말

아이디어 사칙연산 | 결국, 실패는 정말 실패일까?

연금술에 성공한 인간은 지금껏 하나도 없다. 연금술은 2,000여 년 동안이나 유행했고 그 위대한 아이작 뉴턴조차도 30년 이상 연금술에 매달렸지만, 값싼 금속을 비싼 금으로 바꾸어내기 위한 인류의 노력과 실험은 모조리 실패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연금술은 허튼짓 같지만 그 허튼짓이 남긴 유산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새로운 물질과 원소가 수없이 발견되었고, 현대 화학이라는 거대한 분야가 그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연금술이 금만큼 값진 것을 만들어내는 데 결국은 성공한 셈이다.
2014년 12월 29일 06시 24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 지금 여기가 맨

아이디어 사칙연산 | 지금 여기가 맨 앞

지난주 tvN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는 엄마가 거꾸로 붙여놓은 세계지도를 보고 '파격'에 대해 깨달았다. 지도는 보통 북쪽이 위쪽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 속에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이 위쪽이고 남쪽이 아래쪽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그래의 말처럼, 우주에 떠 있는 지구는 구체이고 위 아래는 따로 있지 않다. 지도를 '바로' 놓고 보면 한국은 대륙 끝에 매달린 반도지만 '거꾸로' 놓고 보면 해양을 향해 뾰족하게 돌출한 당돌한 모습이 된다.
2014년 12월 01일 12시 49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

아이디어 사칙연산 | 성전환하기

셰익스피어는 걸핏하면 작품에 남장 여자를 등장시키곤 했다. <십이야>의 바이올라, <베니스의 상인>의 포샤, <뜻대로 하세요>의 로잘린드, <베로나의 두 신사>의 줄리아 등등. 성별을 가장할 때 생겨나는 긴장감과 재미에 대해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 드라마 중에도 <커피 프린스 1호점>, <바람의 화원>, <성균관 스캔들>, <미남이시네요> 등 남장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크게 히트를 친 것들이 많다.
2014년 11월 18일 06시 39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

아이디어 사칙연산 | 측정하기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에게 "날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물어본다. 사랑에는 단위가 없으므로 측정할 수도 없다. 그러니 "하늘만큼 땅만큼" 등 생각나는 가장 큰 단위를 말한다. 정지용은 노래했다.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2014년 11월 07일 06시 11분 KST
아이디어 사칙연산 | 머리

아이디어 사칙연산 | 머리 비우기

머리가 빈 것은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분명 머리를 비워야 할 때도 있다. 만화 <슬램덩크>에서 농구 감독인 안선생님은 작전 타임에 북산고 선수들을 불러놓고 말한다. "생각이 지나친 건 좋지 않아요. 발이 멈춰져 버리니까."
2014년 10월 24일 10시 22분 KST